“마법을 쓰면 몬스터에게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신성력을 기다리는 것이 법이니까.”
“하지만 원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마법이 깃든 마방구들은 잘 팔리는 편이야. 그건 고대의 거라고 하기도 하고, 어딘가에서는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잘 모르지. 하여튼 뭉크는 칼코스 남작의 영지에만 있으면 과로야. 과로. 맞고 사는데다가 사제들 안의 궂은 일도 다 몰아서 시키고, 봉사활동도 제일 열심히 하거든.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라고 하지만,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래서 우리에게 협력하는지도? 마법쪽으로 돌아설지도 몰라.”
페리온스의 생각은 달랐다. 뭉크는 자신의 신념을 저버릴 것같지는 않다.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은 회복력만 있는 게 아니라 공격력도 있나봐요.”
페리온스가 말하자 카르멘이 싱긋 웃었다.
“넌 아직 우기를 못 겪어봤구나.”
“어둠의 60일.”
어니스트가 중얼거렸다.
“성기사들 중 대부분은 빛의 300일에 돌아다니지만, 아수라라는 성기사들이 있어. 그들은 어둠의 60일에 돌아다니지.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해. 그런데 그 숫자가 상당하다는 말을 들었어.”
“제가 살던 마을에선 어둠의 60일에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 정도는 있었지만……. 몬스터를 조심해야한다는 것 정도밖에 몰라요.”
페리온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신경쓸 건 없어. 성기사들이랑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들도 몬스터 퇴치하느라 바쁠 테고.”
“카몬만 안 마주친다면 말이죠.”
“그래, 그 놈도 꽤 집요하더라. 이겼으면 됐지.”
어니스트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카르멘도 이제 실컷 말했다 싶었는지 손을 흔들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웜은 호롱불을 들고 책을 읽었다. 웜은 요즘 페리온스에게 영 말이 없었다.
카르멘 때문일까?
페리온스는 날을 봐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을 피해서, 저녁이면 시간이 날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초승달이 뜨는 날이었던가?
페리온스는 어니스트가 색색 잠들자, 책을 보는 척하며 웜을 보았다. 페리온스는 영어를 익히고 있었다. 가끔씩은 다른 언어도 들여다봤지만 이해는 더 되지 않는다. 웜은 늦은 시간까지 미동도 없이 책에 빠져 있었다.
“웜.”
불러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웜.”
페리온스는 나지막하게 웜을 불렀다.
웜은 고개를 들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갈래?”
“아니, 괜찮아. 자려고. 늦었다.”
역시 분위기가 이상하다. 웜은 새초롬하게 말하고서는 자리에 누웠다. 둔한 페리온스라도 뭔가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강제로 불러낼 수도 없었으므로 페리온스가 불편하게 자리에 누웠다. 웜은 호롱불을 껐다.
가는 동안 커다란 몬스터는 발견하지 못했다. 슬라임떼 50여 마리가 나와서 정신없이 검으로 쓸어버린 것 외에는 15일 동안 큰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국경은 벗어난 것같았다.
날이 좀 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걷는 길, 요정과 정령들이 일행을 보며 작게 웃고는 사라졌지만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숲의 좁다란 길을 걷고 있었다. 아주 좁은 길이었지만 이런 숲 속에서도 길은 나있었다. 누구일까. 먼저 이 길을 갔던 사람은.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여기 말고는 평지가 없을 것같아.”
돌무더기와 함께 꼭대기 부근에는 그래도 텐트를 칠 만한 장소가 있었다. 꼭대기까지 10분 정도만 걸으면 벼랑 끝에 서있는 침엽수가 있을 것같았다. 꼭대기라서 서늘했지만 동쪽으로 왔을 뿐인데, 날씨는 전보다는 확실히 더워졌다.
“우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푸코에 빨리 도착해야 해. 우기가 오면 모닥불도 만들 수 없을지도 몰라.”
어니스트는 그런 말을 하며 뚝딱뚝딱 텐트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제가 마법으로 불을 붙여 볼게요.”
페리온스가 일행의 중심에서 익혀놓은 언어와 낯선 발음을 생각하며 말했다. 일행은 모닥불 주위로 빙 둘러 서서 페리온스를 보았다. 페리온스는 모닥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fire(파이어).”
촛불의 불만한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마른 장작에 옮겨붙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곧 화르륵 옮겨붙었다.
“오오!”
투마가 탄성을 질렀다.
“와아!”
다른 일행도 뒤이어 박수를 치며 뛰어올랐다.
“축하해. 페리온스.”
뮤오린이 미소를 지으며 페리온스를 바라보았다. 페리온스는 씨익 웃었다. 이렇게만 해나가면 될 것같다.
일행은 화기애애하게 각자의 텐트에 들어갔다. 힘이 생겼다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페리온스는 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그런 불꽃조차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웜, 무슨 생각해?”
텐트 안에서 페리온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해?”
“그게 무슨 뜻이야?”
“넌 어차피 네 맘대로 할 거잖아.”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어니스트가 둘의 눈치를 살폈다.
“어이, 내가 나가줘야하는 건가?”
“아니예요. 형. 웜, 산책 좀 하자.”
웜도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당장이라도 싸울 태세였다. 페리온스는 웜이 그러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감했다.
오늘은 며칠이지? 페리온스는 속으로 계산했다. 다행히 보름달이 뜨는 날은 아닐 것 같다. 어느 샌가부터 보름달이 뜨지 않아도 하늘을 보기 두려웠다.
웜은 당장은 말하고 싶지 않은지 씩씩거렸다.
“웜, 뭐가 문제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한테 나는 친구도 아니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페리온스도 답답해서 화가 나려고 했지만, 돌산을 걸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웜도 산꼭대기로 가는 동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자 둘의 마음은 좀 풀리는 듯했다. 배경은 검었지만 마을의 굴뚝에서 나는 김서림, 낮은 지붕 사이로 작은 호롱불의 흔적, 먼 도시의 경비대가 내뿜는 횃불의 작은 빛.
“하늘을 봐도 되는 거야? 페리온스.”
웜이 말했다. 페리온스는 뜨끔했다.
“역시 나한테는 비밀인가.”
웜이 말했다.
“카르멘, 뮤오린에게는 다 말하고서, 나한테는 비밀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페리온스는 식은땀이 흘렀다.
“너는……!”
웜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메아리가 산 너머로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웜도 입을 다시 꾹 다물다가 작게 말했다.
“너는 나를 그렇게 못 믿어?”
“나는, 아니, 우리는 아티마를 찾으러 가야 해. 웜.”
“그거랑 나한테 말 못한 게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없잖아!”
“너한테 말을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너를, 너를 꼭 고쳐주려고 생각했었어. 나는 의술이 있으니까. 네가 말하기만 하면, 꼭 고쳐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페리온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웜,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게 중요해?”
“난 타모르를 다치게 했어. 다들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넌 타모르를 다치게 하지 않았어.”
“다치게 했어.”
“다치게 하지 않았어. 그 때는 이바가 얼음을 뿜어 공격한 거라고.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대. 나도 카르멘에게서 들은 거지만…….”
페리온스의 등의 털이 곤두섰다. 몸이 떨렸다. 자신이 아니었다고?
“널 꼭 고칠 거야. 치료할 수 없는 병은 없어.”
“웜, 그래도 이건 비밀로 해야해.”
“넌 그렇게도 날 못 믿어?”
웜은 벌떡 일어섰다.
“난 갈게. 너랑 같이 가기 싫으니까.”
“웜…….”
페리온스는 앉아서 웜을 바라보았다. 웜은 모닥불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페리온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순간에도 이바는 꼭 차고 있었다. 잘 때도 이바는 가지고 있다. 페리온스는 이바를 꺼내들었다.
“이바, 왜 말 안해줬어? 그리고 왜 그런 거야?”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바는 혼잣말을 해도 대꾸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이바가 몸을 약간 뒤튼 것같기는 했다.
“바보녀석, 이바.”
페리온스가 혼잣말을 할 때였다. 단도 이바가 번쩍 빛을 냈다.
-누가 바보야! 바보 녀석!
“이바!”
-그래, 이바님이시다, 이 자식아.
“하,”
-웬 한숨이냐? 엣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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