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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새로운 출발 


"출산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인구가 너무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워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분들은 아이를 낳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합니다. 앞으로 애국을 하실 모든 분들은 아이를 낳으시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으신 분들은 지원을 해드리니 동사무소를 찾아오시고, 칩을 가진 분들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위험하오니..." 

"단 생각, 들었어? 이 나라에서 희망이를 키울 수 있어." 
"내가 잘못 들었나?"
"전쟁은 끝났을까?"
"전쟁은 아직까지야. 이제 한 달 남았어. 한 달 뒤에는 헬기가 올거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작정이었잖아."

단생각은 할거니를 보았다. 

"음, 저는 그럼 헬기 타고 유학 가면 되나요?"

할거니는 싱긋 웃었다. 
 
"일단 내가 도심에 잠깐 갔다올게. 혹시 동사무소 갈 수 있으면 가야되니까 그 동안 준비하고 있으라고."

단생각이 서둘러 나섰다. 대충 점퍼를 걸쳤다. 

"알았어요. 희망아, 옷입자."
"응! 나 멋진 옷!"

희망은 단생각을 닮아 그런지 성격이 수월한 편이었다. 솔리와 할거니는 희망을 씻기는 준비를 했다.
할거니는 집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고 솔리는 단생각을 기다렸다. 1시간 만에 단생각이 돌아왔다. 아이를 준비시키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어서, 그렇게 기다렸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거리가 완전히 변했어."
"안 좋아?"
"아니.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어. 로봇들이 다 청소하고 있어서. 일단 가보자. 아직 출생신고도 안했잖아." 
"그래."

솔리와 단생각은 티코 702에 탔다. 한참 점검을 안 해서 불이 껌벅껌벅거렸다. 

"동사무소까진 갈 수 있어. 그 근처에 점검하는 데도 있고." 
"그래, 걱정 안 해. 단생각의 차니까."
"고맙지만 그건 너무 맹목적인 믿음이고. 어쨌든 가자."

거리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로봇들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고, 이 쪽은 한 바탕 일이 일어나고 지나간 것일까 싶기도 했다. 사람도 다녔는데 이상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희망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저건 뭐예요?"
"로봇이야."
 
동사무소에 도착했다. 차에 내려도 로봇들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동사무소 안에는 출생 신고 간판이 붙어있었다. 단생각이 등록하는 동안, 솔리는 희망의 손을 잡고 밖을 걸었다. 불안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죽이려고 했었는데. 그 때였다. 로봇들이 몰려 들었다. 

-아이다.
-아이다. 

"물러나!"

솔리는 공포에 질렸다. 희망을 품 안에 두었다. 희망은 엄마가 겁에 질리자, 같이 겁에 질렸다. 

-10살 된 아이다
-10살 된 아이다 
-10살 된 아이다

로봇이 10대는 몰려들었다. 청소를 하려고 하는 걸까, 소름이 돋는데 로봇이 아이를 빼앗아들었다. 

"뭐하는 거야! 내 놔!"

-어화둥둥
-어화둥둥
-어화둥둥 

로봇들이 아이를 헹가레했다. 

-등록

-101번째 엄마. 

한 로봇이 친절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엄마 구청에 오세요. 표창합니다. 

그러더니 로봇들은 다시 흩어져서 청소를 했다. 휴머노이드 로봇들이었다. 뒤늦게 단생각이 오더니 말했다. 

"구청에 오라고? 표창 받을래?"
"이대로 살아도 되는데."
"로봇도 헹가레를 하는 거 보니까 이제 진짜 괜찮은 가봐. 가보자." 

구청에 갔다. 

표창이라고 하지만 간단했다. 

표창 뱃지를 달고 20세의 앳된 구청장 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애국자십니다! 허허. 희망아, 잘 크렴." 

구청장 님은 위법한 사항에 대해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고 다만 허허 웃었다. 

솔리는 어려워하며 고개만 수차례 꾸벅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 더 멀어졌다. 

단생각은 티코 702에 솔리와 희망을 태우고 싱긋 웃었다. 

"할건대의 행방을 알 수는 없지만, 다 무사하대. 장모님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할건대는..."

할거니에게 어떻게 전달해야할 지, 솔리는 막막했다. 모르니까 희망을 갖고 살다가 포기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좀 어렵기는 할 거야. 그 때 가서 지금까지 안 돌아왔으면."


단생각이 말했다. 


"전달하지는 않으려고."

"그래, 그건 그 애 몫이니까."

"그래."

"그럼, 우리는 20세이잖아. 그리고 출산 제한이 풀렸고. 희망이는 너무 예쁘고." 

무슨 말을 하려고 단생각이 뜸을 들이는 걸까, 솔리는 단생각을 보았다. 

"11명은 더 낳아서 축구단 만들까?" 
"미쳤나봐."
"그럼 9명 낳아서 야구단?"
"내 생각은 안해?"
"음... 100명에서 줄여서 말했는데."
"내 생각은 안 해? 한 명도 버거워."
"형제 한 명 더는 어때?"
"그건 생각해볼게. 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앞이나 잘봐!"
"오해하지마. 네가 최고야." 
"아빠 나는?"
"너도 최고야."

티코 702는 혼자서 핸들을 움직이며 씽씽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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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함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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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두 칩 간의 전쟁 




집은 산 속에 있었지만 평평한 정원도 있었고 좁은 길을 10여분만 걸으면 도로도 나있었다. 울타리는 꽤 높게 둘러쳐져 있었고 덩굴 나무가 쇠 울타리를 휘감고 있었다. 앞문, 뒷문이 있었는데 앞문이 더 찾기가 힘들었다. 뒷문으로 가면 텃밭과 작고 하얀 길이 나있었다. 집 자체는 200년 전 국민 평형에 가까웠지만 쓸 수 있는 공간은 야생을 좀 가꾸면 더 늘어날 것같았다. 

"출퇴근은 한 시간이면 되고, 걱정 없어." 
"나는 걱정되는 게 누군가 신고를 했다는 게." 
"걱정마. 너는 이 안에 있고, 내가 물건 사다나를게. 문제는 네가 답답하다는 건데, 뒷문으로 나가면 산길이 또 있으니까 뱀이나 들짐승 조심하고 산하고 친하게 지내. 희망이가 15살만 되어도 좀 나다닐 수 있지 않을까?"
"너무 편한 생각이야. 목숨이 달려있는데."
"나도 걱정이 되어서 한 소리야." 
"누가 자꾸 신고를 하는 걸까?"

부러움이 둘을 보고 카트와 아기 인형을 맡겼다. 

"저는 멀리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올 수 있을 거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사이 가르칠 건 다 가르쳤고 사모님이 다 배우셨으니까." 
"감사합니다." 

솔리는 왜 이렇게 우울할까,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도움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 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건 아이를 키우는 동안 좀 더 심화되었다. 같은 일의 반복.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건 재미있었지만, 내도록 희망은 자신을 찾았다. 자신이 좋아서 만나게 된 희망이었지만 힘들 때도 있었다. 단생각은 매일 출퇴근을 하긴 했지만 솔리는 너무 힘들 때면 이틀 간 만들어놓은 것만 간신히 먹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이는 혼자서도 잘 놀았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솔리는 미안한 마음이 더 쌓여갔다. 부러움은 3년 정도 도움을 주다가, 멀리 까지 오기가 이제 힘에 부친다며 솔리에게 맡겼다. 

'너를 이 세상에 데려온 게 잘한 일일까? 너는 행복하게 살아나가게 될까?' 

아이는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다. 멍하니 누워있는 솔리의 옆 벽으로 송충이가 슬슬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 벌레!"
"응 그래. 벌레는 지지."
"잡아줄게!"

희망은 송충이를 덥썩 잡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솔리 앞에 당당히 자랑했다. 

"으윽, 버려줄래?"
"응!"
 
희망은 힘차게 창문을 열고 송충이를 툭 떨어뜨렸다. 

"차소리! 차소리!"
"응 차소리."
"아빠 와, 아빠."

단생각이 꽤 이른 시각 돌아오고 있었다. 

"아빠 오려면 10분은 걸려. 그 동안 마당 열 바퀴 뛰는 건 어때?"
"응!"

애를 케어 하는 데에 요령이 생겼다. 10분간 내도록 칼싸움 하면서 놀아 주기는 힘에 부쳤다. 아이는 알아서 자기 주먹 만한 모래 주머니를 끌고 마당을 돌아다녔다. 

단생각이 곧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불안한지 매번 올 때면 통조림과 같은 식료품을 쟁여놓았다. 뒤에 산도 있고 텃밭도 있어서 먹을 거리가 당장 떨어질 일은 없는데도 점점 창고에는 물건이 가득 차고 있었다. 

"솔리야."
"오늘은 일찍 왔네."
"의논할 게 있기도 하고, 우리 이민 갈까?"
"이민?"
"찐국은 아직 출산제한령이 있지는 않대. 세계에서 그 나라 뿐이지만." 
"이민은 생각해본 적없는데."
"이민까지는 아니고, 국적은 우리나라 껄 가지고. 전쟁도 곧 날 것같고, 그리고." 
"말할 게 더 있는 거 같은데."
"아냐. 아냐."
"숨기고 있는 게 있지?"
"사실은 장모님이 회사에 오셨어."
"우리 엄마가? 왜?"
"너도 통 못 봤고, 또"
"또?"
"술값이 밀렸다고 빚 좀 갚아달라셔서."

솔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숨을 푹 한 번 쉬고 다시 단생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갚아줬어?"
"그렇게 센 금액도 아니었어."
 
솔리에게 이민 준비가 어쩐지 희망적이고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이민은 당장 가는 거야?"
"10년은 걸릴 것같아. 그래도 5년은 안전하게 사는 거야. 또 그때가 제일 위험하고. 사춘기잖아."
"그렇지. 생각해보면 우린 두 번이나 신고를 당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사람이 정보를 넣은 거 같지 않아?"
"아는 사람?"
"우리가 이 집을 얻었고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는 거잖아. 우리 연애할 때도 그랬고."
"그러고보니, 그러네. 이민을 간다면 또 신고가 들어올 수도 있겠어."
"누구의 짓일까?" 

단생각은 식탁의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구설수일 수도 있어. 그 사람 나한테 원한을 가지고 있거든."

단생각이 구설수를 짚었다. 솔리는 의문을 제기했다. 

"새모이일 수도 있지 않아? 같은 날 결혼식을 해서 잘 살고 있는 우리한테 원한이나 질투를 가질 수도 있어."
"새모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치면 할건대, 할거니 남매도 할 말이 많지." 
"그렇게 나온다고? 난 전여친도 의심스러워."
"전여친을 왜 의심해? 걘 나한테 관심도 없다니까?"
"이름이 의심스러워. 그리고 엄마 나홀로여사 일수도 있어. 내가 아이 가지는 걸 계속해서 반대하셨거든." 
"의심하자면 부러움씨도 의심할 수 있지."
"부러움씨를 의심한다고? 은인이야! 그렇게 치면 아들을 빼앗긴 시부모님은?"
"와, 너 그렇게까지 나간다고?"
"자기지인만 감싸고 도는 거야?"
 
단생각은 식탁을 쿵 내리쳤다. 

"어쨌든. 아직 까지 아무 일 없으니까. 전쟁도 안터졌고. 희망이도 잘 크고 있고."
"금방 클 거야. 20살만 넘으면 안전하잖아."
"거기까지 살아남기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 별 일 다 있다고."
"유학이라도 보내자."
"그래. 희망이는 살아남아야해."

대화가 돌고 돌아 솔리와 단생각은 극적으로 타협했다. 


"유학이요?"

할거니는 통화 너머로 까르륵 까르륵 웃었다. 단생각과도 6년을 같이 사니까 맺힌 한을 어디로 라도 풀 데가 필요했다. 들어줄 사람은 할건대, 할거니 남매뿐이다. 

"저도 유학 준비하고 있는데 마침 잘 됐네요. 같이 데리고 갈까요?" 

할거니는 흔쾌히 말했다. 

"너도 유학가?"
"언니도 기술 학교 자격증 있잖아. 같이 가도 되고요. 그거, 패션 안경 쪽이랬나? 저도 패션 쪽이거든요. 저는 악세서리 쪽이니까 잘 맞을 수도 있어요."
"간다면 단생각이 가겠지. 준비도 다 해놨고, 나는 여권도 없어."
"언니, 우리는 진짜 언제까지 살 지 몰라요. 100년은 우습다고요. 1000년도 살 수가 있죠. 이런 저런 시도를 좀 해봐요. 그 긴 세월, 심심하지 않겠어요?"
"희망이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은데, 문제는. 우리를 신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자꾸 머릿속을 괴롭혀. 의심하게 되고." 
"그래요?"
"친가쪽일 거같은데, 단생각은 내 쪽을 공격하는 거야. 난 아니라고 했지. 할건대, 할거니 믿는다고."
"흐음."
 
원래는 할거니쪽이 전화를 먼저 걸었는데, 이젠 솔리가 자주 전화를 걸었다. 바깥생활과 통하는 게 할건대, 할거니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매일매일.

매일매일. 

남편에게 섭섭한 점을 토로했다. 

어느덧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힌 것만 같다. 

"언니, 희망이가 10살이죠? 언니한테서 한 5년, 10년 이야기 들으니까 귀에서 피나겠어요."
"그랬어? 미안하다. 너밖에 얘기할 사람이 없어."
"유학에 관한 걸로 넘어가자면요, 1000세는 넘게 살 수 있는 시대니까 준비도 여유롭게 했는데, 준비가 거의 마쳐진 것같아요. 형부는 여전히 국제관계에 몸살앓고 계시나봐요."
"아무래도 무역을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나한테 맡기겠대요? 본인이 하시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지."
"단생각한테는 말안했는데, 네가 내가 첫사랑이라는데 맡기기가 좀 그렇지 않겠니?"
"에이~ 그건 언니가 내 귀에 피내기 전의 일이죠."
"그래?"
"그래요. 나도 외국 여자도 한 번 만나볼 거고. 나는 친절했던 언니를 좋아했는데, 이젠 아줌마가 됐어."
"너무하는 거 아니니? 안심이 되면서도 되게 꽁기꽁기하다 야."
"좋아하죠. 좋아해. 하지만 김치로 치면 이제 감정도 숙성이 되어버렸다. 그 뜻이죠." 
"아냐. 너무 좋아할 필요 없어." 
"흥. 아 나 좀 있다 전화할게요. 할건대가 연락이 와서."
 
전화를 끊고 솔리는 빨래를 개었다. 로봇이 빨래도 다 개어 주지만 아이 옷은 사람이 빠는 것이 편하다. 특히나 로봇은 전부 성인 옷 세탁에 맞추어져 있었다. 전쟁이 나더라도 어쩌면 로봇 끼리의 전쟁일 수도 있다. 찐국과 워국은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힘의 균형은 잘 맞추고 있었다. 우리나라, 아워국이 사이에 끼여서 몸살이었다. 

그래도 아워국은 인재가 많았다. 인구도 많다고 난리였지만 2억명쯤 되는 인구라 내수 시장도 탄탄했다. 

이민 준비를 하며, 솔리도 찐국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단생각에게는 찐국 대통령 여봐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보나 마나 단생각 아니면 할건대, 할거니이다. 전화를 쓰니 편하기는 했다. 칩을 이식해서 썼다면 이렇게 여유롭지 못했을 것같다. 

솔리는 전화를 받았다. 

"큰일났어요!"

할거니의 비명이었다. 

솔리는 숨을 흡 들이쉬었다. 

"전쟁이라도 났니?"
"그게 아니라, 칩이! 언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솔리는 집을 둘러보았다. 외딴집과 철 울타리, 나갈 일은 없었다. 

"위험하면, 네가 우리 집을 오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그래."
"나 언니 덕분에 산 거 같아."

무슨 일인지 할거니는 흐느꼈다. 

"울지말고. 진정하고. 올 수 있지?"
"할건대가, 할건대가!"
"진정해. 운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긴급상황이라며." 
"갈게요. 빨리 갈게요."
 
솔리는 구식 티비를 틀었다. 공중파밖에 나오지 않는 낡은 티비였다. 그 것도 지직 거렸다. 구식 티비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자 조금씩 화면이 접점을 찾기 시작했다. 


속보, 한센놈 체포. 

빨간 글자로 밑의 화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화면은 온통 모자이크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희망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리포터 연결하겠습니다. 
-네, 지금 현장에 와있는데요,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입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네, 지금 머리에 이식되어 있는 두 개의 칩이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리포터, 조심하고요. 머리에 칩이 없습니까?
-저도 칩이 있는데요. 

리포터의 눈이 갑자기 붉게 변했다. 그러더니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급히 모자이크가 씌워졌다. 솔리는 티비의 화질이 나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면이 돌아가고 카운터에 앉은 앵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칩이 없습니다. 뉴스는, 진행되어야합니다. 칩이 없는 분들을 모셨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티비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되었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통신할 수 있는 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찐국 A사에서 나온 칩과 워국 B사에서 나온 칩입니다. 점유율이 각각 30%, 40%가 되는데요. 그 칩이 A사는 B사를 적으로 규정하도록, B사는 A사를 적으로 규정하도록 시스템이 조작되었습니다. 두 나라가 비밀리에 유사시에 그럴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요, 그 기폭 버튼을 누른 것이 한센놈입니다.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것이죠."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칩을 이식한 사람들은 수술해서 칩을 빼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이미 조종당하고 있어 그러기가 불가능할 것이고요. 민간인도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피해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종의 전쟁입니다. 로봇들은 명령 조작이 되지 않았으니 믿으셔도 될 것같습니다. 칩이 있으신 분들은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까지 출산률과의 전쟁이었는데요, 앞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인구수가 반 이상은 줄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산 인구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전쟁입니다. 서로 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단생각의 권유로 솔리는 칩을 심지 않았다. 단순히, 여유 시간을 즐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아까 할거니의 말이 떠올랐다. 

'언니 덕분에 나 산 거 같아.'

할거니에게도 단생각의 이야기를 하며 칩을 심지 않아도 즐겁게 살 수 있다고 권유했었다. 

그 뜻이었구나. 

그럼 할건대는? 

목이 찌릿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바깥에서 철창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산발이 된 할거니가 문을 찾지 못하고 식물이 없는 곳을 흔들어보고 있었다. 솔리는 얼른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언니!"

솔리를 보자마자 할거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거니야. 할건대는?" 
"벌받았나봐."
"벌?"
"사실 언니 어렸을 때부터 신고한 거, 오빠였어요. 말렸지만 말릴 수 없었고 언니 마음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말을 못했어. 이번에도 말릴 수 없었어. 어디론가 가는데 난 잡을 수가 없었어."

괜히 새모이를 의심했다. 솔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밝혀져서 시원한 느낌과 그리고 이 일을 어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들었다. 

"무릎꿇을까?"

할거니가 말했다. 

"들어와. 어쨌든. 나중에 단생각한테 꿇든지 하고."
"도심은 엉망이예요. 피투성이야."
"로봇은?"
"로봇은 다니고 있어요. 할 일만 하지 뭐. 나도 로봇택시 타고 왔고."
"진작에 유학을 보냈어야 했나?"
"나 좀 씻어도 되요?" 
"그래."

솔리는 단생각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리야.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단생각, 어떻게 된거야. 올 수 있어?"
"최대한 빨리 갈게." 

말하지 않아도 사건에 대해서 다 안다는 느낌은 통했다. 
전화를 끊고, 이젠 기다림의 시간이다. 

샤워를 하고 할거니가 진정이 되었는지 바닥에 앉았다. 희망이 손님이 온 게 기쁜지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여권이랑 신분증은 챙겨왔어요. 찐국에 편지를 써보는 건 어때요?"
"찐국에? 내가 편지를 쓴다고 되겠어?"
"어쨌든 생물학적 아버지잖아요."
"넌 진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언니가 너무 많은 걸 얘기했으니까."
"한 마디를 안져."
 
할거니는 혀를 멜롱 내밀었다. 

"어쨌든 써보자. 희망이는 살려야지." 
"홈페이지 주소는 나오네요. 보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자극적으로 써버려요." 
-나는 아워국에 있는 당신의 딸입니다.

제목을 입력하자 솔리는 어쩐지 떨리는 마음이 생겼다. 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있는 걸까?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보내고 구식 컴퓨터를 닫아두었다. 

곧 단생각이 헐레벌떡 집에 왔다. 

"무릎꿇을 시간이야."

단생각을 마중하며 솔리는 할거니를 보았다. 할거니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괜찮아? 억, 이거 뭐야!"

할거니를 보더니 단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얠 어떡하지. 손까지 들라고 한 적은 없는데.' 

솔리는 할거니를 보다가 자신도 냅다 무릎을 꿇었다. 단생각은 처녀귀신처럼 머리를 늘어뜨린 두 여자가 앞에 작은 장승처럼 서있자 기겁을 했다. 

"왜 그러는 건데? 왜. 왜." 

"의심해서 미안해, 단생각."

필살기다. 솔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단생각을 올려다보았다. 단생각은 손을 잡아끌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럴 때도 아니고 일어나, 일어나세요. 거니씨."
"형부, 이렇게 좋은 형부를! 우리 할건대 어떡해요! 살려주세요!" 

할거니의 생각변화는 변화무쌍했다. 갑자기 죄인이 된 자신이 처량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단생각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없어 꼭 농구에서 디펜스를 하는 사람의 자세였다. 

"식탁에 앉아서 얘기하자."

어느새 일어난 솔리가 의자를 끌어놓았다. 할거니는 훌쩍이며 탁자에 앉아 할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생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다가, 할거니의 말에 대꾸했다. 

"그건 벌 받은 게 아니예요."
"흑흑."
"운이 안 좋았던 거죠."
"미안해요."
"아니! 죽을 죄가 아니잖아요. 그게 죽을 죄입니까?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요."
"그래. 내가 스트레스 받았지, 단생각은 스트레스 받지도 않았어."

솔리가 말했다. 

"맞아. 난 신경도 안 썼어. 어쨌든 할건대는 사람들 속으로 갔다고요. TV와 라디오 틀어놓고 여기서 기다립시다. 그리고 식량은 3개월치는 있어요.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아빠, 아빠, 나 햄 먹고 시포요." 

어른들 눈치만 보던 희망이 아빠의 무릎을 꾹꾹 눌렀다. 

"그래, 햄도 많고 더 사왔어."
"햄은 건강에 안 좋아."

솔리가 태클을 걸었다.
 
"지금 그럴 때야?"
"맞아. 그럴 땐 아니지."

작게 투닥 거리는 걸 보며 할거니가 고물 노트북을 들고 왔다. 

"메일 한 번 확인해보죠."
"안봤을텐데 뭐." 
"그래도 확인해보는 거죠. 늦지 않게 할건대를 살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

솔리는 노트북을 열었다. 놀랍게도, 메일은 확인되어 있었다. 
답신도 와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솔리는 조심스럽게 메일을 눌렀다. 
그러자, 첫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내 딸이 아닙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알고 있었지만 확인사살이다. 

-그러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헬기를 보내겠습니다. 2개월 후 도착할 것입니다. 위 버튼을 누르면 위치 추적을 허용합니다. 

이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솔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건 받아들였지만 조금 더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위치 추적 허용을 눌렀다. 

"언니, 여봐라 대통령이 그래도 자식 생각을 하시나봐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일단 할거니씨가 찐국에서 희망이 데리고 한 2년만 살아줄래요?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하니까."

단생각이 말했다. 

"언니랑 형부는요?"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좀 있다 가야 하지 않을까요? 가더라도. 평화 시에는 갔겠는데. 비상시지만 우리는 안전하기도 하고." 

할거니는 조금 생각하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할건대를 부탁해요. 저는 희망이 잘 케어할게요. 여기서 식량을 더 축낼 수도 없고." 
"그래요."

앞으로 2개월간, 버텨야했다. 

라디오에서는 일주일, 일주일이 다른 소식이 전해져 들려왔다. 

첫 주는 아워국의 인구가 1억 5천 명이 되었다고 했고 둘째 주는 1억 명이 되었다고 했고 셋 째 주는 5천 만 명이 되었다고 했다. 

"언니, 라면 말고 딴 거는 없어요?"
"이 상황에 평화로운 줄 알아. 배부른 소리야." 
"질리네." 

그 때, 솔리의 귀를 스쳐 가는 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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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의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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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출산 

 



​1여 년을 기다렸지만 다행히 순조롭게 아이가 들어섰다. 솔리는 6개월부터는 나가기가 힘들었다. 뉴스만 보고 있자니 더 우울해졌다. 

-인구정책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더 느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속보. 태어난 아기는 전부 안락사 시키는 법안통과. 

"그럼 앞으로 태어날 아기는 어떻게 되나요?"
"그런 일도 없어야겠지만, 20세가 넘은 사람들까지 국가가 통제할 수는 없고요. 19살이라도 20세 이하라면 불법으로 간주해 안락사해야겠습니다.
"무서운 청소년들을 잡을 수 있을까요?"
"그건 옛말입니다. 인구가 적어 힘이 없습니다. 세대 갈등도 있는데요, 일단 사고사가 아니면 사람은 줄지 않으니까요."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재하는 사람들의 생명도 중요하죠? 그리고 개도 기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임신을 한다는 건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네. 다음 안건 보겠습니다. 세대 갈등이 아직도 있다고요?"
 
솔리는 결국 채널을 돌렸다. 이번에는 하하호호 웃는 사람들. 하지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들. 

"아이는 잘 클 거야." 

솔리는 생각을 비우고 웃었다. 

딩동딩동.

벨이 울렸다. 
 
집에만 있자니 꽤나 우울했다. 그래서 새모이든, 할건대, 할거니에게 자주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솔리의 결혼식을 망쳐버린 주범들 이었지만 1년이 지나니, 다시 잘 지내게 되었다. 사실 불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벨이 울리니 설레는 마음이 든다. 솔리는 걸어나갔다. 화면에 뜬 것은 어머니, 이해심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덩치가 커보이는 여자사람이다. 

"오셨어요?"
"응. 산파가 필요할 거같아서. 일을 봐주는 분도 있어야 할 것같고." 
"감사합니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건 어떨까?" 
"저희 수입이 빠듯해서요.."
"우리가 좀 도와줄 수 있지. 단생각은 요즘도 바쁜가보구나."

단생각은 요즘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네. 일이 바쁜 가봐요."
"네가 이해해. 우리 땐 더 심했단다."
"네, 걱정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이 친구랑 인사해. 일 돌봐 줄 도우미인데."
"아 네."
"부러움이라고 해." 
"러움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100년 전에 산파 일도 많이 해봤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잘 될까 모르겠네요. 그래도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은 엔돌핀이 돌죠. 너무 좋은 기회에 너무 기쁜 마음으로 오게 됐답니다."

20대의 얼굴인데도 듬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솔리는 웃으며 그녀가 청하는 악수를 받아들였다. 두꺼운 손이었다. 힘에서는 되지 않을 것같다.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너 얘기할 상대도 필요할 것같구. 나가지를 못하잖니. 이 험한 세상에." 
"감사합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무슨. 넌 애가 너무 고풍스럽다. 다같이 20대라 다른 집은 해심 씨라고 그냥 부른다더라." 
"그래도 엄마가 지킬 건 지키라셔요." 
"그래, 그래. 시간은 알아서 협의하고 시엄니가 오래 있어도 좋지 않을 게다. 먼저 가볼게."
 
부러움이 푸근하게 웃었다. 
솔리는 조금 낯설었지만 첫인상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 

*

"힘줘요! 힘!" 
"끙!"
"좀 더!"

부러움은 능숙했다. 곧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탯줄을 끊고 부러움은 아이를 안았다. 

"수고했어요. 멋있는 아드님이야."

솔리는 집안에서 이불을 움켜잡고 턱 힘이 풀려버렸다. 

"보시겠어?"
"네."

까만 머리칼, 반짝이는 눈빛, 빨갛고 주름진 피부. 너무 예뻤다. 솔리는 보에 쌓인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는 순조롭게 낳았다. 그러나 그 때에도 단생각은 없었다. 요즘 그는 무슨 생각일까. 

부러움은 침착해서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잘 들어주기도 했다. 일을 봐주는 것과 겸해서 산파일까지 하는 거라서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었다. 

조리하는 일주일의 시간 동안 부러움하고만 얘기했다. 

"사장님은 바쁘신가보네요."
"아기가 싫은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다 갖출 수 있나요. 저는 아이만 으로도 너무 부러운 걸요. 저는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못 가졌고, 이젠 정말 가질 수가 없게 됐죠."
"100년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어요. 대학 병원 산부인과 간호사였죠. 하지만 병원도 망하고, 간호사 일만 하다가 어찌어찌 흘러왔어요.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더라고요. 오래 살다 보면 좋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사모님은 젊으시니까 그게 어떤 건지 모르실 수도 있을 것같아요. 그래도 일거리가 있는 거에 감사하며 살아야죠!"
"네. 아이도 있으니까 부모님이 이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던데요."
"물론이죠. 도와드릴게요. 여기선 아이 키우기가 힘들어요. 좁고 세대 수도 많아요. 비밀리에 키우기엔 악조건이죠. 아구, 애기 운다." 

응애, 응애, 아이는 울었다. 아이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단생각은 일주일 째 집에 들어 오지를 않고 있었다. 
부러움은 7시면 퇴근했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다. 아이가 있으니까. 그래도 혼자다. 아이는 말을 못하니까. 
우는 아이 덕분에 수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저녁 10시, 벨이 울렸다. 

단생각이 이제야 들어오나 싶었는데, 화면에 뜬 건 할건대였다. 이 시간에? 하지만 솔리는 일단 문을 열어주었다. 

"할거니는?"
"나는 안 반겨?"
"아니. 항상 둘이 같이 오라고 했잖아."
"남매가 그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괜히 오해 받기도 싫고."
"오해받을 게 뭐 있냐?"
"있지. 넌 모르겠어?"
"아 부를게. 부를게."

할건대는 머릿속 칩으로 할거니를 불렀다. 

"올 지 안 올지는 모르겠어. 네가 심심하대서 왔는데." 
"들어와."

할건대는 집 안을 들어와 둘러보더니 아이를 발견했다. 

"아기?"
"내가 이름을 지을까싶어."
"아직 안 지었어?"
"단생각이 요즘 안 와."
"단생각이? 요즘 바쁘다고는 하더라. 일을 찾아서 맡는다던데." 

마침, 또 벨이 울렸다. 할거니인가 싶어서 문을 여니 단생각이었다. 

"아아."
"오랜만. 단생각."

솔리의 말이 좀 차가웠다. 단생각은 일주일 째 입던 옷이어서 후줄근해보였다. 

"오셨어요."
"아, 손님이 있었어?"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오셨어요."

할건대는 살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보더니,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나 갈게. 거기 든 거 산후조리품이야." 
"그래. 고마워. 가봐." 

솔리는 쌀쌀맞게 단생각을 보았다. 그래도 아이아빠다. 

"당신, 아기 이름도 안 짓고 일주일 째 집에 안 들어온 거 알고 있어."
"아아."
"바람이라도 난 거야? 뭐야?"
"집에 들어왔더니 외간 남자가 있는데, 네가 찔린 거 아니야?"
"할건대는 그냥 친구야. 결혼식 때 봤잖아!"
"솔리야."

단생각은 얼굴을 손 두 개로 덮었다. 

"난 일만 했어. 일만 했다고."
"왜 일만 했는데. 아이 이름도 좀 짓고 해야지."
"왜 이렇게 부담이 되는지 모르겠어. 아이를 위해서 라면 난 돈이 필요해. 그래서 일을 늘린 거야. 그래도 일을 늘렸으면 책임은 져야하잖아. 그러다 보니 꼬였어." 
"알았어. 아이 이름은 생각했어?"
"단희망이. 어때?" 
"남자아이야."
"그렇구나."
"인사라도 해. 아빠라고."
 
그제야 단생각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울었다. 

"이사가야겠다. 들키겠어."
 
그래도 단생각은 아이는 들고 조금 흔들어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무대포인 거야. 들키면 죽음이야."

단생각은 솔리를 질책했다. 단생각은 초췌해보였다. 솔리는 일주일 째 오지도 않은 단생각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달리 더 할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솔리는 한숨을 쉬었다. 단생각도 한숨을 쉬었다. 


이사를 가기로 했다. 일주일 안에. 

도움이 필요했다. 시부모님, 단지와 이해심이 아이를 키울만한 집을 구해 주기로 했고 이런 쪽으로는 전문가인 부러움과 함께 비밀리에 아이부터 옮겨놓기로 했다. 짐은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단생각은 욕심이 나서 물건이며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이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일단 쌀이랑 물만 챙겨가면 돼."

솔리는 앞에 아이를 매고 큰 빅 사이즈 옷을 걸쳐 입었다. 부러움이 카트를 마련했다. 

"아이가 어려서, 카트엔 못 내려놓겠어요."
"페이크죠."

부러움이 침착하게 웃었다. 삶의 경험일까, 가는 것 만으로도 솔리는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데, 부러움은 침착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티코 702에 무사히 올라탔다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순간, 주차장 입구가 경찰 검문으로 막혀 있었다. 

"단생각 침착해." 
"걱정마. 저 사람은 새모이가 매수해놨어." 

단생각이 창문을 내리고 눈짓을 하자, 경찰은 눈짓을 하고 차단기를 올렸다. 

"170년 간 아무 일 없었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창문을 닫고 단생각은 내달렸다. 

"어떻게 말한 거야."
"일하느라 바쁘게 가야 한다고 했어. 국제 관계 업무이거든." 
"요즘 뉴스에서 워국이 시끄럽던데."
"찐국이랑 워국이 전쟁을 하게 될 지도 몰라. 급한 일이야."
 
단생각은 입술을 질겅질겅 물었다. 뒷자리에는 부러움이 카트를 싣고 타고 있었고 앞자리에는 단희망이 엄마의 품에 안겨서 조용했다. 

집은 근교 외곽에 있었다.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적고 스산했는데, 산봉우리가 많았다. 도시에서만 살았는데 이런 데에서 살 수 있을까? 그래도 갈 수록 공기가 맑아졌다. 솔리는 창문을 내리고 마음껏 들이쉬었다. 

"걸어서 들어가야해."
"산 속이네."
"어쩔 수 없지."

단생각은 차에서 내려 짐을 끌렀다. 한 손에 들기 충분한 양이었다. 솔리의 배 언저리에 아이는 안겨 있었고 카트는 부러움이 끌었다. 산의 진입로에 또 한 번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경찰이었다. 

"여기는."

단생각은 식은땀을 흘렸다. 두 번째 경찰검문이다. 이 곳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가요. 침착하게."

부러움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집주인인가요? 여기 아이를 키운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검문 좀 하겠습니다." 

-응애! 응애! 응애! 

경찰은 눈이 날카로워졌다. 

"카트 안이군."

"배도 이상해. 뒤져."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솔리가 발악했다. 

카트에서 발견한 아기가 먼저였다. 완전히 진짜 같은 인형이었다. 

"우리는 20년 전 산부인과 간호사들이라고요." 

부러움이 외쳤다. 

"아니, 잘린 것도 서러운데 공부도 안되나요?"

"아니, 지금 이 시국에 아기 공부를 왜합니까? 왜해요! 아줌마! 20세면 20세답게 살 것이지."
 
경찰은 짜증을 냈다. 

"아니, 신고 들어와도 공부할 건데요! 공부 끝나면 알려드릴게."

"필요없어요. 아 다 인형이야 버려. 아까 차 안에서 아기면 우리도 한 번은 봐드릴려고 했는데, 다 압수예요."

솔리는 숨을 흡 들이쉬었다. 버리면 더 큰 문제였다. 

"버리다니, 하나에 2000만원인데 물어 줄 거야? 고소해버릴 거예요."

"아 씨. 가져가세요. 가져가."

"흥."

"사람들 놀라니까 소리 내지 말고요! 아 진짜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놀라잖아. 진짜 아기도 아니면서." 

그 때 단희망이 서러웠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솔리는 배를 꽉 붙들었다. 

"소리 끄랬죠! 쇼하지 말고 얼른 가요! 철수하자. 아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죄송합니다."

단생각이 인사를 하고 두 여자를 앞으로 보냈다. 솔리도 급하게 걸었다. 부러움은 응애 소리를 틀어놓고 인형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소리가 시끄럽다. 

응애, 응애, 응애, 

앞으로 걷고 있었다.

바리케이트를 지나 집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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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웨딩 

 



그리고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혼 준비를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식장에서 웨딩 헤어, 메이크업, 드레스를 입어보고 바로 날짜를 정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뜨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태어날 아기가 우리의 끈을 튼튼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이미, 공범이었다. 

며칠 후, 날짜가 정해졌다. 그러나 

청첩장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이 계획이 있는 우리로서는 알려지면 불리하다. 단생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친구가 없어서 성대한 파티는 부담된다고 했지만, 솔리의 입장에서는 몇 번 파티를 따라가 본 결과 단생각이 친구가 없다는 건 엄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친구가 없는 것은 솔리였다. 할건대와 할거니밖에는 올 사람이 없을 것같았으니까. 

"그냥 혼인신고만 할까?"

솔리가 묻자, 단생각은 픽 웃으며 솔리의 이마 잔머리를 쓰다듬었다. 

"식은 해야지. 부모님도 계시고."
"우리 엄마는 아마 안 올거야."
"어쩔 수 없지." 

솔리는 결혼이야기가 오가는 지금까지도 단생각이 엄마를 보게 되는 것을 극구 말렸다. 

"이제 곧 졸업이지?"

기술 학교는 6년제였다. 솔리는 그 동안 꽤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은 무난히 할 수 있을 것같다. 학교에서는 해외 유학도 보내 준다고 권했지만, 솔리는 곧 태어날 자녀를 생각하며 거절했다. 

"그건 그렇고, 청첩장을 받았어."
"청첩장? 우리 껄 만든 거야?"
"아니. 우리 껀 아니고."

솔리는 청첩장을 보고 생각했다. 

'이런다고?'

똑같은 날, 다른 장소. 새모이가 구설수와 함께 결혼식을 열었다. 솔리야 학교를 다닌다고 늦게 미루었다지만 이 사람들은 왜 미뤘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똑같은 날짜라니. 어차피 주목 받지 못하는 결혼식이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5년간 또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 출산율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동성애를 권장했다. 지금은 일처다부제도 검토하고 있었다. 모두 출산율을 제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들은 환영받는 결혼식이었고 우리는 소외된 결혼식이었다. 사실 자녀 계획이 없다면 소외될 것까지는 없지만 솔리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단생각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8년간 널 만나며 생각한건데, 누가 널 말리겠니."
"부모님만 계시면 되는 거잖아."
"맞아. 우리 결혼은 아는 사람이 없게 하자."
"그래도 돼?" 
"나는 네 뜻에 따를 거야." 

단생각이 이 상황에서도 웃자, 솔리는 웬지 안심이 되었다. 

결국 결혼식을 진행했다. 단생각의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전부 새모이의 결혼식에 갔다고 했다. 단지와 이해심은 허허 웃으며 휑한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가가 손주를 보여 준다니 너무 좋구나."
"그래,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솔리는 그런 말을 들으니 살짝 불안했다. 금지 약물을 무효화했지만 임신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건데 압박감이 느껴진다. 

"어떻게 새모이가 오늘 결혼식을 할 수 있지?" 

솔리는 분통이 터졌지만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자 레드카펫을 걸었다. 그리고 단생각을 만나 걸었다. 

"저희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지 않더라도 30년 간 잘 살아보겠... 어?"

단생각이 마이크에 대고 말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장모님!"

할건대와 할거니가 엄마를 모시고 오고 있었다. 

할건대에게는 결혼식에 대해서도 미주알고주알 말했었다. 엄마는 오늘은 낮술을 하지 않았는지 멀쩡했고 옷차림도 엄마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이었다. 

"안녕하세요. 사돈어른." 
"안녕하세요. 얼른 앉으세요. 식끝나가요."

단생각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큼큼, 장모님 감사합니다. 저희는 30년 간 잘 살겠습니다! 그 이후로도요!" 

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뒤풀이 자리에서 할건대와 할거니는 뭘 먹을 거냐고 졸랐다. 화장은 했지만 짜장면이나 먹으러 갈까 싶었다. 솔리가 할건대와 이야기하는 사이 단생각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리고 솔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 새모이 결혼식 좀 갔다올게."
"뭐라고? 우리 결혼식이잖아."
"미안해. 갔다올게."

솔리는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파하도록 하죠."

단생각이 쓸데없이 주도력 있게 모처럼 모인 가족모임을 파토냈다. 

"화장, 지워야겠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솔리의 말에 할건대가 눈치를 보더니 솔리의 걸음에 따라 메이크업을 하는 곳에 따라 들어왔다. 

​"너 30년만 딱 살아. 보니까 안되겠다. 그리고 나랑 살아."

할건대가 말했다. 

"뭐라고?" 
"혼인신고 안 했으면 지금이라도 파투 내는 거 어때?"
 
이렇게 심각하고 진지한 할건대는 처음이었다. 항상 순하고 장난기가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엉뚱한 소리였다. 

"난 단생각말고 다른 사람 생각한 적 없어." 
"여러가지로 너 애도 낳는다며." 
"그래." 
"너 애까지 책임질 수 있어."

무엇으로 책임진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경제적인 게 마음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솔리는 할건대를 이성적으로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할건대는 호텔 청소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 

"너 그런 소리 할 거면 나가." 

할건대는 순순히 나갔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며 빼꼼히 할거니가 들어왔다. 

"언니."
"그래."

솔리는 힘없이 웃었다. 

"신랑이 없네요." 
"응. 그러네."
"나 언니 응원하고 좋아해요." 
"고마워."
"아니, 좋아한다구요."
"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다들 오늘이 내 결혼식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는 것일까?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좋아요."
"뭐라고?"
"언제든 부탁하면 도와줄게요. 내 첫사랑."
"뭐, 뭐, 뭐."

자기 할 말만 하고 눈물을 훔치며 할거니가 나갔다. 

솔리는 결혼식이 아무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거기다가 남편을 잃고, 유이했던 친구 둘까지 고백으로 잃었다. 최악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자. 울컥했지만 솔리는 화장을 지우고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할건대와 할거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엄마와 있었지만 솔리는 둘을 보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할까요?"

솔리는 책임지고 화장을 지운 얼굴로 말했다.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어차피 환영받지 못하는 결혼식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그래. 그래."

단지와 이해심이 허허 웃었다. 나홀로가 옆구리를 찔렀다. 

"결혼식을 이렇게 진행하면 어떡하니? 나는 혼자 결혼을 했지만 이러진 않았다."
"엄마 난 좀 있다 들어갈게. 늦게 갈지도 몰라." 
"어디가?"

할건대가 물었다.

"혼자 있고 싶네. 한강."
 
솔리는 로봇택시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무 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사서 강물이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예쁜 강물이었는데, 오늘 따라 울적하고 깊어 보이는 강물이었다. 

두 캔 쯤 깠을 때, 솔리 옆에 앉는 사람이 있었다. 경계심이 들어 확 돌아보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치 조커처럼 얼굴이 화장으로 일그러진, 새모이였다. 

"아니, 여긴 어떻게?"

"할건대한테 들었지. 나 걔 알아." 

"얼굴이?"

"걱정마. 네 결혼식만 망한 거 아니니까." 

"그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안됐나? 아쉬운걸."

강물을 보다가 솔리는 의문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예요. 대체."

"설수가 바람나서 가버렸어. 결혼식날." 

"구설수씨가요?"

그렇게 안 보여서 정말 의외였다. 구설수는 말이 거의 없고 믿음직하게 새모이를 지키는 이미지가 강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아기고양이. 사랑 너무 믿지 마."
"그래도 사랑해서 결혼하신 거잖아요?" 

새모이는 다시 한 번 얼굴을 쓸었다. 화장이 더욱 이상하게 번졌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단생각이 급하게 간 건가.' 

솔리는 웬지 이해될 듯도 했다. 

"난 네가 딸같다."
"제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결혼 하지마."

이 정도쯤 되면 진상이었다. 

"하지마. 나도 네 출산계획 알고 있다고. 일러버릴 거야."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지금 단생각이 누구랑 있는 줄 알아?"
"누구랑 있는데요?"

솔리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전여친."

새모이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담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솔리가 새모이를 보았다. 

"안 통하는군. 맞아. 둘이 만나기는 했는데 구설수를 어떻게 할 것 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어. 같은 남자로서 바람 피는 거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결혼식 날 가버린 건 이해를 못해!" 

"하아, 남자들은 바람 피는 걸 이해하나요?"

솔리는 이제는 느꼈다. 당연한 사실이다. 바람? 그건 사람 따라 다르니까. 단생각은 바람을 필 스타일은 아니고 자신은 그걸 믿고 있었다. 어쨌든 새모이와 있으면 속이 시끄럽다. 

"어쨌든, 단생각은 죽었어요."
"뭐?"
"나한테."

솔리는 엄지로 목을 그었다. 새모이는 픽 웃었다. 솔리도 픽 웃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나도 인간이야. 조금의 미안함은 있지." 
"조금이라고?"
"인간은 이기적인 거야. 나도 맥주 줘." 
"네 캔 밖에 없는데."
"네 캔이나?"
"먹고 더 사려고 했는데."
"너 술 안 한다지 않았어?"
"누구덕분에."

허락 없이 새모이는 캔을 덥썩 집었다. 

"많이 마시면 안 좋아. 아기고양이. 울지마." 

우는 건 당신이거든요. 솔리는 계단에 기대어 훌쩍이기 시작한 새모이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단생각을 용서해줘야하나? 생각이 많았다. 


어차피 신혼여행을 갈 생각도 없었고, 가더라도 조용히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이렇게 엉크러져서야 할 말이 많다. 일단 6개월 전에 마련해둔 신혼 집에 솔리는 도착했다. 50층 고층 빌딩의 중간층, 방은 두 칸, 전에 살던 집보다는 컸지만 월세였다. 집주인은 신혼부부라고 하니까 반기지 않는 눈치였는데, 2년간 방이 안 나가서 울며 겨자먹기로 방을 준다고 했다. 

방은 바람이 들어와 시원했다. 작은 창을 열어두고 외출을 했던 것같다. 

솔리는 맥주로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만 다시 탁자에 앉아 단생각을 기다렸다. 아무리 취하려고 해도 더 이상 자신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단생각은 12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안 잤어? 미안해."
"오늘 우리 결혼식이야."
"아."
"누구 만났어?"
"아아. 아무도 아니야. 그냥 결혼식갔었어."
 
거짓말. 

"누구 만났는지 정보가 들어왔는데."
"아아."
"솔직하게 말해."
"응 솔직하게 말할게."
"전여친이랑 만났지?"
"아니."
"왜 속이는 거야? 더 의심스럽잖아."
"아아."
"둘이 무슨 사이인데."
"그게,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솔리는 심호흡을 했다. 

"단생각."
"응."
"난 오늘 결혼식을 망쳤고 남편을 잃었어. 정말 당신을 잃어도 될까?"
"진짜 별 관계 아니어서 그래. 그러니까 전여친은, 친구이자 우리 모두의 연예인이었어. 그래서 그래." 

솔리는 속이 부글거렸다. 역시 그런 거였어. 

"하지만 오늘은 정말, 새모이 결혼식에서 구설수가 도망쳤어. 그것 때문에 의논하려고 모였던 거야. 정말이야."
"당신이랑은 정말 아무 관계도 없고? 당신만의 짝사랑?"
"아니. 짝사랑도 아니야. 내가 7일 사귀어봤거든. 헤어졌는데 너무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행복했고!" 
"사귀었다고?"
"잘 들어봐. 솔리야. 너랑 헤어졌을 때는 밥도 못 먹고 너무 괴로웠단 말이야. 이게 이별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그리고 어렸을 때 친구라 잠시 어렸을 때는 그럴 수도 있잖아!" 
"떨어져. 머리털 쥐어뜯고 싶으니까." 

단생각은 다가오다가 다시 멀찌감치 서 있었다. 

"난 진짜 모태솔로야."

단생각은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당신을 처음 만나서 이렇게 고생하는 거거든. 단생각." 
"미안해. 화해하자."
"결혼식을 이래놓고?"
"다시 할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솔리야."

단생각이 다시 다가오자, 솔리는 이번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미안해. 진짜로."
"진짜지?"
"그래. 미안해."
"내가 새모이를 봐서 용서하는 거야."
"그래." 

단생각은 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피곤할텐데, 자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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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캠핑 

 




​1월 1일, 정확히는 12월 31일 저녁 10시. 단생각의 연말파티였다. 

솔리는 저번처럼 큰 파티장이면 어떡하지? 라고 걱정하며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입을 옷이 없었다. 무난한 게 최고다. 검은 티에 청바지를 입고 한편으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일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다르게 입을 옷도 없었다. 

그러나 단생각이 보낸 모임 장소를 봤을 때, 솔리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우린 역시 잘 맞아.'

라고. 주소는 캠핑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옷도 괜찮지 않을까. 

"데리러 갈까?" 
"그렇게 해주면 좋지만, 너무 힘들지 않겠어?"
"뭐가 힘들어. 데리러 갈게." 

사실 힘들지 않기는 했다. 5단계 완전 자율주행도 180년이나 되었으니까. 돈만 있으면 안 힘든데, 문제는 솔리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그래도 단생각은 차를 아껴놓는다고 타고 다니지를 않고 로봇택시를 이용했는데 차를 끌고 올 모양이었다. 어떤 차길래 그토록 아껴놓는 걸까? 부담스럽지 않을까? 솔리는 상상력이 뭉개뭉개 피어올랐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는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났다. 

조수석에 타자 단생각이 머리를 긁적였다. 

"왜 웃어?"
"티코 702네."
"오 차를 좀 아는 걸?"

자율주행으로 새롭게 나온 티코, 귀엽고 작은 소형차였다. 

"그걸 이렇게 아껴둔 거야?" 
"모르는 소리 마. 한정판이라고. 한정판."
"네. 네." 
"소규모 파티야. 10명 정도 될까? 새모이도 오고, 전여친도 오고. 아빠 친구분들 오시고. 그냥 가서 고기 구워 먹자." 
"응."
"옷차림이 됐네. 청바지에 티, 캠핑장엔 딱이지."
"장소를 너무 늦게 보내줬어."

솔리는 툴툴 거렸다. 

"뭘 입든 난 상관없어."

단생각은 눈치를 보았다. 차는 그 동안에도 계속 내달리고 있었다. 숲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 그리고 나뭇잎이 반사하는 달빛. 오늘은 보름달이어서 밤길이 밝았다. 단생각은 창문을 내렸다. 나무들이 내쉬는 공기와 우리가 내쉬는 공기가 소통하고 있었다. 

차단기가 티코를 막아섰다. 단생각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캠핑장 예약했는데요. 500번이요."
"들어가세요."
"사람 많이 왔어요?"
"이번 연말은 많지가 않네요."
"아뇨. 저희 일행이요."
"다 도착하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단생각은 창문을 열고 천천히 진입했다. 솔리는 이건 어쩌면 상견례보다 더 부담되는 자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순간 생각이 번쩍 들었다. 상견례는 두 분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데, 이건 열 명한테나 잘 보여야한다. 

"너는 고기만 먹고 가." 
"해 뜨는 거 보러 온 거 아니야?"
"부담스러울까봐."
"해 뜨는 거 봐야지!"
"그래. 어쨌든 딴 거에 집중하지 말고 먹는 거에 집중해." 

그렇다 하지만 들고 가야 할 짐도 있었다. 단생각 혼자 들기엔 무리였다. 

"놔둬. 내가 두 번 가면 돼."
"같이 들자. 같이 하면 한 번만 가면 되는데."
"넌 오늘 손님으로 온거야."
 
그렇게 투닥 거리고 있을 때였다. 두 남자가 저 멀리에서 걸어왔다. 전에 봤던 얼굴이긴 했는데 자세히 보지 않아서 저렇게 몸이 좋은 사람이었나 싶었다. 얼굴도 오늘은 입술을 빨갛게 칠해서 뱀상이 부각되었다. 얼굴은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그 옆에 남자는 우락부락한 얼굴이었는데, 그래도 잘생겼다.

"새모이. 마침 잘 왔다. 이거 좀 도와줘."
"안 그래도 도와주려고 왔지. 오호?"

새모이라는 사람은 하얗고 우락부락한 남자보다 키가 조금 작았다. 그래도 슬림하고 큰 편이다. 그는 솔리를 보더니 작은 눈을 반짝였다. 

"안녕. 아기고양이."

'응?' 

솔리는 약간 얼어붙었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짐을 우락부락한 남자에게 넘기고 달랑 지퍼 백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세 남자는 걷기 시작했다. 솔리는 뒤를 쫒았다. 단생각이 제일 귀엽고 약한데, 단생각이 제일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구석자리에 강물이 잘 보이는 자리에 테이블과 화덕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파티는 시작 중이었다. 삼겹살과 꽃등심이 잘 구워져서 몇 접시나 가져갈 수 있도록 되어있었고 단생각이 가져온 것은 양념 된 갈비와 폭립이었다. 다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는데, 며칠 전에 봤던 그 여자도 술병을 사람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아가, 네가 아가구나." 

이해심은 솔리를 금방 알아보았다. 단생각 옆에서 쭈볏쭈볏하고 있는 솔리의 손을 덥썩 잡았다. 솔리도 어색했는데 알아봐 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덜 어색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솔리는 그렇게 말하고 성인이고 모두 평등한 20세가 되었지만 이건 너무 빠르고 낯설다고 생각했다. 아, 코가 꿰어버렸다. 

"내가 아가구나! 허허허. 앉아, 앉아. 앉아서 먹어."

20살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 시아버지인 단지는 20살의 몸이었지만 몸이 꿀단지처럼 통통했다. 그게 솔리의 눈에는 다 좋아보였다. 솔리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좋았다. 나무가 양 옆으로 그늘을 쳐주었지만 정면은 강물과 함께 탁 트여있었다. 동쪽이었고 강물의 폭은 넓어서 건너편이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은 달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달빛에서 빛나는 사람이 있었다. 솔리의 눈은 몇 분이나 멍하니 전여친을 쫓아다녔다. 

"술해요?"

달빛이 아름다운 밤, 모두가 20세였지만 새모이는 그 중에서도 외모가 빼어났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술이요?"

망설여졌다. 술은 아직 입에도 대본 적 없는데. 솔리는 술을 보다가 엄마가 겹쳤다. 

"아니요. 안 마셔요. 앞으로도 마실 생각 없구요." 
"단호하시네."

새모이는 픽 웃었다. 

"결혼은 왜 하려고 해요? 젊은데. 다 젊지만, 우린 구식의 20대이고, 당신은 신식의 20대이고. 모두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배워야할 게 더 많지 않아요?" 
"구식, 신식,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단생각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솔리는 경계심이 들었다. 이 사람은 왜 다 안다는 듯한 느낌을 풍길까. 

"새모이. 괴롭히지 마."

화덕에 고기 걸어두는 일을 마친 단생각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막았다. 
그러나 솔리는 처음 만난 날이 생각이 났다. 

그 날은 새로 나온 옥수수크림감자프라페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가자고 했고 57세의 솔리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공짜로 줄 수 없냐고 터무니 없는 질문을 직원에게 던졌다. 솔리는 엄마를 말렸고 직원도 난처해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사람도 있었고 솔리는 너무 쪽팔렸지만 죄송하다는 인사를 반복해서 하자 사태는 수습되었다. 엄마 나홀로는 그렇게 해서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없다며 성질을 냈지만 솔리는 눈물이 날 것같았다. 

엄마를 달래 거리를 걷는데, 뒤에서 직원이 달려왔다. 또 무슨 일일까. 솔리는 긴장했는데 직원이 옥수수크림감자프라페를 건넸다. 

"한 남자 분이 100만원 충전해놓고 가셨어요." 

너무 쪽팔려서 솔리는 더듬었다. 

"지금말고 다음에 먹어도 될까요?"
"네! 언제든 오세요."

배려 깊은 직원이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려는 찰나 솔리는 무슨 충동이었을까 직원에게 다시 뛰어갔다.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갚으려고요."
"가게 맨 오른쪽에 앉아계신 분인데요. 아직 계실지 모르겠어요."

솔리는 엄마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가게로 뛰어갔다. 
거기에 단생각이 작은 종이 팜플렛을 보며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앉아있었다. 

"저기요."
"네?"
"전화번호 뭐예요."
"전화?"
"아님 계좌번호 뭐예요."
"계좌?"

그는 환하고 귀엽게 웃었다. 

"100년은 사셨나보다. 그죠? 전화 소리 들으니까 구수하고 좋네. 아, 오래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죠. 드시고 힘내서 좋은 일 하세요." 

단생각은 솔리를 100세는 된 20세로 알아보았다. 어떻게 57세를 20세로 알아볼 수 있는지 그 눈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그 정도로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가난해서 100세의 용어를 쓰고 있던 솔리는 일단 잘 지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편견도 없었고, 가난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솔리는 다시 새모이를 보았다. 하얀 얼굴, 빨간 미소, 약간 드러난 치아. 

"내가 먼저 단생각 꼬신 거니까, 이상한 소리,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내가 신고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그런 생각도 그런 말도 한 적 없는데요. 찔리신 건가요?"
"결혼 선배로서 해주는 말이예요. 결혼 선배로서." 

단생각이 거들었다. 

"맞아. 나쁜 놈은 아니야. 저 녀석 이혼한 지 100년 됐거든." 
"이혼?"
"정확히 말하면 30년은 살았고. 이혼은 아니고 졸혼?" 

단생각의 말에 새모이는 픽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이번에 결혼하지." 

새모이는 아까 봤던 우락부락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름은 구설수. 저 사람이랑."
"남자랑?"
"응. 남자랑."

새모이는 쭉 앞으로 두 팔을 팔짱 껴서 괴고 나를 보았다. 

"이상할 것도 없잖아? 아기고양이."
 
​솔리는 위협감을 느꼈다. 무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단생각의 절친이 게이라니.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난 단생각을 지킬 거예요."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는지 새모이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내가 저 녀석한테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저한테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가족이니까요. 이제."

단생각이 접시를 10개는 옮겨놓다가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하필 새모이의 옆이었다. 

"우린 말이 잘 통해. 서로 싫어하는 것조차 잘 통해. 우리는 서로 이성적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것까지 잘 맞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솔리는 단생각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왜 내 옆이 아니라 새모이의 옆에 앉은 것일까. 

"매력제로."

새모이는 킥킥 웃었다. 단생각은 속도 없는지 픽 웃었다. 

"매력 있거든요! 매력 많거든요!" 
"그래요. 그래. 나한테 궁금한 건 없나?"
"전여친이라는 저 분, 어떤 분이예요?"

솔리는 기회를 덥썩 잡았다. 너무나 궁금했다. 

"나에 대한 건 없어요?"
"그래. 좀 그렇다."

그런데 두 남자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그러자 솔리는 뭔가 이 숨겨진 집안에 대해 더 미스테리함을 느꼈다. 뭔가 있는 것같았다. 

"단생각, 나한테 숨기는 거야?" 

새모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단생각을 보자, 단생각은 새모이를 보았다. 새모이는 빨간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다면야." 
"뭔데요?"
"내 전부인의 여동생." 
"네?"

완전히 뜻밖의 말이었다. 

"산행메이트야." 
"전부인은 남자고요?"
"전부인은 여자였어." 

이 사람, 정말 혼란하다. 

"그 당시로는 분위기가 그랬어. 계약결혼이었지."
"계약결혼?"
"참 잘 통했고 좋은 사람이었고, 그 것도 사랑이었을지도."
"자녀는요?"
"날카롭군. 딸이 한 명 있는데, 이제는 날 안 봐."
"아."
"날 싫어하거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새모이는 픽 웃었다. 

"왔다갔다하는군, 아기고양이. 어쨌든 단생각하고 있으면 고생 좀 할거야. 나도 그렇고 단생각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많거든. 이상하게 짜증 나는데 그렇게 돼." 

아까 짐을 지퍼 백 하나를 달랑 들고 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게 할 소리인가. 솔리는 불만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새모이 앞에서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이상한 위압감이 있었다. 

그 때 통통한 20대의 얼굴 단지가 이 쪽으로 걸어왔다. 

"우린 들어가 자야겠다. 아가, 너도 자려면 조금 자두렴."
"저는 괜찮아요! 들어가서 쉬셔요."

솔리는 방긋 웃었다.

"우리도 20대의 몸이긴한데, 옛날 습관이 있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좀 더 있다 들어갈게요." 
"그래. 텐트는 좋구나."

단지와 이해심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몇몇 사람들도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것은 단생각, 새모이, 전여친, 구설수 그리고 솔리. 

"사람도 몇 없는데 우리끼리 모여 앉자!"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새모이가 고함을 쳐서 두 명을 불러들였다. 솔리는 환영하지 않는 기분이었지만, 새모이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전여친은 술이 좀 올랐는지 발그레한 상태였고 구설수는 우락부락하고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였다. 

구설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단생각에게 손짓으로 쫓는 제스처를 했다. 단생각이 한 칸 옆으로 옮기자 그 자리에 앉았다.

전여친은 술에 좀 취했지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사정을 알게 되어도 미스테리하다. 솔리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단생각하고는 어떻게 만나게 됐어?"

새모이와 똑같은 질문. 

"단생각이 괴롭히지 말래."

새모이가 말했다. 

"단생각이 연애에는 정말 재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의 부드러움에 솔리는 나만 신경 쓰고 있었구나, 하는 뭔가 모를 지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홀짝이는 사람들. 그리고 소외감. 이렇게 술을 마셔도 잘 사는데. 그래도 겁이 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시작했고 솔리는 따뜻하고 은은한 보름달을 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들을 게 많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솔리가 모르는 게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언제 쯤이 되었을까, 단생각이 솔리를 깨웠다. 

"해뜬다. 일어나자." 

눈을 뜨자 솔리의 주변에서는 어수선한 인기척이 많았다. 이미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솔리는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전여친은 술을 너무 마셔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구설수가 그녀를 챙기고 있었다. 

'내가 나설 것까지는 없겠지.' 

솔리는 동쪽을 보았다. 

벌겋게 달구어진 해가 뜨고 있었다. 

​오는 길에 단생각이 말했다. 
전부인과 딸에게서 모두 배척 받는 새모이는, 전여친을 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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