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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강복주

 

 

 

이젠 너무 오래되어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 저 멀리 어딘가에 살아있을 게 분명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희미해진 그림자는 색깔마저 원색은 없었다. 구름이 내려온 10시의 하늘 색깔이 생각나는 그 사람은 몇 번이고 되새긴 이름만이 화석처럼 남아있었다.

 

김이원.

 

그 이름은 잊어보려고 하지만 잊혀지지 않았다.

 

글자는 대개 검은색이다. 그래서 그의 색깔은 흰색, 하늘색, 검은색, 그리고…….

 

갈색벽돌로 쌓아올린 4층짜리 건물의 1층에는 때가 탄 흰 바탕에 검은색 글자로 한세상 부동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벗겨진 중개사가 무심히 바라보았다. 한적해 보였다.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개사는 몇 가지를 묻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금빛마을에서 오셨다고요? 그런 데도 있어요?”

 

. 구석진 곳이라 모르실 거예요.”

 

서래마을도 아니고, 특이하다.”

 

그게 거래하는 데 필요한가요?”

 

, 아뇨. 아뇨.”

 

그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에게서 스쳐 간 순간적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뭐 이리 까칠하지? 와 같은. 그러나 찰나의 표정이었다. 그는 프로답게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운 호인의 표정으로 지도를 툭툭 쳤다.

 

어디로 알아보고 오셨어요?”

 

대통령이 거주할 예정이라는 신도시, 아파트 한 채면 되겠어요. 20평 정도면 좋겠어요.”

 

네에. 나오면 연락드리죠.”

 

재희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그녀가 또각또각 사라지는 뒤로 복덕방 주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얼음공주네. 얼음공주야.”

 

재희가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복덕방 주인은 웅얼거렸다.

 

 

깨진 유리같은 공기였다. 재희는 삭막한 빌딩 숲이 새삼 숨이 막힌다. 지도를 보고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뱅뱅 돌아서야 도착한 곳은 은빛신문이었다. 멀거니 건물 위를 보았다. 층수를 육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켜켜이 쌓아진 건물에서는 때마침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오의 태양은 붉은 갈기의 말처럼 공기를 뚫고 달렸다.

 

재희야!”

 

그런 말을 탄 한 장수처럼 직선으로 뚫고 오는 음성이 있었다.

재희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강하게 발산되는 기운은 태양에 못지 않을 듯 싶었다. 그에게는 깨진 유리같은 공기조차 눈처럼 녹여버리지 않을까. 그의 기운은 때로 부러웠다.

재희는 싱긋 웃었다.

 

은빛신문의 기자로 일하고 있는 기도운이었다. 재희와는 대학을 같이 다녔는데, 알고 지낸 것은 초등학교쯤부터였다. 도운은 방학이면 할머니댁에 내려오는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도운은 키가 190이 넘었고 어깨도 딱 벌어져, 옛날로 치면 장군감이 틀림없었다.

 

밥 먹었어?”

아니.”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

그래.”

그렇게 올라오라고 해도 안 올라오더니……. 금빛마을이 그렇게 좋아?”

.”

근데 올라온 걸 보면, 역시 유효했나?”

 

도운은 허허 웃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김이원이 행방의 단서를 찾았다고 하니까 바로 올라오네.”

…….”

나 좀 서운해?”

 

도운은 답지 않게 재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재희가 말이 없자 일부러 크게 웃었다.

 

신경 쓰진 말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성미도 급하지.”

어디 있어?”

 

도운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찾았다며? 어디 있어?”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인지 재희의 말은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도운은 외면했다. 재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러 간 이원이었지만 소리소문이 없었으니 성공한 것은 아닐 터. 그러나 잘못되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찾았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도운은 얼버무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만에 산을 타다가 실족해버렸다는 소식이 들렸어. 그래서 지금은 한국에 있는데…….”

생명엔 지장 없어?”

하루이틀하고 있다. 병원을 소개해줄게. 나도 같이 가자. 금방 와야 하긴 하지만.”

 

재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재희를 도운은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10분만 기다려줘.”

…….”

가자.”

 

재희는 애써 걸음걸이를 가지런히 했다. 앞이 검다.

도운은 택시를 잡았다.

 

도착한 곳은 동빛병원.

재희와 도운은 말없이 걸어 5층 중환자실로 향했다. 6사람 정도 누워있는 중환자실은 사람이 가득한 데도 가라앉은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다들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재희의 눈에는 바로 박히는 글자가 있었다. 그동안 기억해왔던, 김이원이라는 검은 글자.

 

재희는 그에게 다가가 혈관이 튀어나온 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질환이 있었대.”

 

도운이 말했다.

 

그래도 난 놈이야. 저 꽃, 국무총리가 보낸 거다.”

 

?”

 

정치권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았나 보지. 권력은 없었어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해. 저 녀석, 돈과 명예가 있다고 하기는 힘드니까.”

 

돈 벌러 간다고 했는데.”

 

사업을 하기는 했었지. 그렇지만 발견된 건 트래킹과 등산 쪽이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같고. 몸담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재희의 눈에 김이원이라는 명찰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 명찰을 붙잡았다. 명찰은 처음부터 붙어있지 않았는지 가슴팍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쉽게 떼어졌다.

 

…….”

 

재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명찰을 바라보았다.

 

충격받았겠지만, 사는 게 이런 것 같다.”

 

애써 위로하는 도운을 올려다보며 재희는 작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그래라. 그래.”

 

재희는 직선으로 걸어 화장실까지 갔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직선이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 걸음이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바로 손을 씻었다. 사실은 명함의 글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 이름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되새겨지던 것은, 이것이었을까.

 

이름.

 

명함은 물에 씻겨서도 변함없었다. 번지지도 않고 투명한 플라스틱 그대로 있었다. 재희는 명함을 꼭 움켜쥐었다. 그대로 존재하던 이름은 그제야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흑백이다.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이 새는 걸까? 재희는 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새까만 하늘과 먹구름이 보였다.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재희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의 냄새가 훅 끼쳤다. 비에 젖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익숙하고 달큰한 냄새였다. 비닐처럼 매끈한 재질로 된 재킷이다. 고개를 들어 재킷을 씌운 사람을 바라보자 수줍은 듯 씨익 웃었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40줄의 주름이지만 40대치고는 동안으로 봐줄 만한 얼굴이다.

 

김이원.

 

재희는 그제야 눈물이 왈칵 났다.

 

안녕? 오랜만이다.”

김이원.”

그래, 이재희.”

꿈이지?”

그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지금은 이 병원이 없어.”

…….”

금빛마을로 갈까?”

 

다정한 목소리였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꿈같이 달콤한 목소리. 그래, 이건 꿈이야. 그렇다면.

 

그래. 가자.”

 

끝까지 괜찮겠지.

 

 

거리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도 않았다. 택시의 크기도 크고 무거워 보였다. 사진으로 보던 과거의 풍경처럼. 이원은 익숙한 듯 택시를 잡았다. 재희의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원은 재킷으로 대충 부볐다.

 

입고 있어.”

.”

미안하다. 남겨진 시간이 많이 없어서. 금빛마을로 가야겠어.”

 

그는 다소 조급해 보였다. 이렇게 오고 싶었다면, 그렇게 기다릴 때 와줬으면 좀 좋았을까. 재희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용케도 재희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추었다. 빙그레 웃는 얼굴. 재희는 볼멘소리했다.

 

바람둥이 같아.”

 

이원은 허허 웃었다.

 

나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야.”

꿈이라서 그런지 듣고 싶은 소리만 해주네.”

계속 가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거야. 정말이야.”

 

택시기사는 그러는 그들이 마치 없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가끔 백미러를 통해 시선이 왔지만, 그리 고운 시선은 아니다. 그렇게 택시는 금빛마을로 내달리고 있었다. 가까워져 올수록 재희는 눈은 커졌다.

 

……낚시터가 없어.”

원래 금빛마을이야.”

 

이원은 덤덤하게 말했다.

 

호수는 없었다. 원래 낚싯대를 빌려주던 곳에 내리자 한적한 골짜기 아래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리고 폐교된 지 오래된 중학교에 멀쩡히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들판을 가로질러 둑 밑으로 걸었다. 여유가 배어있는 몸짓이지만 지금만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희는 이원을 쫓아갔다.

 

.”

 

그러다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온다. 하이힐이 접혀 그대로 고꾸라져 데굴데굴 굴렀다.

 

저기, 괜찮아요?”

 

익숙하지만 앳된 음성. 재희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앞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 남자아이는 깜짝 놀랐다. 재희도 덩달아 놀랐다. 어느새 길가에까지 나뒹군 걸까. 축축한 머리에 들러붙은 나뭇잎 향기가 넓게 퍼졌다.

 

도운?”

절 아세요?”

 

도운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중학생이었다. 도운은 중학교 때부터 큰 편에 속했다.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에 이원이 내려왔다. 이원은 재희를 부축하고 도운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안녕, 꼬마야.”

절 아세요? , 익숙하긴 한데요.”

당연하지. 금빛마을 사람인데, 한 다리 건너면 다 알지.”

하긴 휴가철이니까. 저도 휴가 왔어요.”

친구는?”

재희랑 이원이랑 놀고 있었는데, 저는 잠깐 개구리 찍으러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도운의 손에는 작은 디지털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재희는 이원을 빤히 보았다. 꿈이라기에는 생생하지만 이미 생각하기를 멈춰버리고 이원이 하는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우리 이름도 재희, 이원이야.”

? 에이, 거짓말.”

같이 놀래?”

 

이원은 저렇게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사람이었을까. 재희는 이원을 바라보았지만, 이원은 여전히 웃고 있다.

 

친구들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따라가도 돼?”

? 마음대로 하세요.”

 

도운의 눈빛에 약간 불안이 서리더니 불만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상한데.”

이름이 같은 건 신기하잖아.”

 

도운은 투덜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었다. 재희와 이원은 뒤따라갔다. 이원은 슬쩍 재희의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재희는 이원은 째려보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못마땅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정작 만나니까 전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원은 그런 재희의 손을 잡았다. 꿈인데도 따뜻한 손. 재희는 금새 마음이 누그러졌다.

 

무슨 생각이야?”

 

재희는 물었다.

 

곧 말해줄게. 우리를 만나면.”

 

이원의 깔끔한 턱이 이질적이다. 병원에서는 어땠었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거칠거칠하지 않을까. 그래, 이건 꿈이다. 재희는 수십 번 되뇐 말을 또 한 번 되뇌었다.

 

 

소녀 재희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재희는 어린 재희를 소녀 재희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이원은 소년 이원이라고 부르자. 이걸 어떻게 협상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사이 도운이 손을 흔들었다. 소녀 재희는 쾌활하게 그네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도운에게 다가왔다. 소년 이원은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그네에 깜짝 놀라 피했다.

 

너희랑 이름이 같은 어른이래.”

우리 엄마랑 닮았네.”

우리 아빠랑 닮았는데.”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이 입을 모아 말했다.

 

친척이에요?”

 

도운이 물었다.

 

비밀로 해둘까.”

 

처음으로 이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재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양팔에 팔짱을 끼고 견고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재희는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에게 이해를 구할 생각은 없는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꿈이기 때문이다.

 

소녀 재희는 생각보다 쾌활했다. 두 사람이 있는데도 둑을 껑충 뛰어 올라가 걸었다. 둑은 점점 낮아져 어른의 허리 정도에 오는 낮은 높이였지만 그런 둑을 부닥치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원이 그 옆을 걸었고 도운은 계속 재희의 사진을 찍었다.

어린 도운을 눈을 보며 재희는 미안했다.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을 만난 이후로 도운은 어른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이렇게 신랄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때부터 무의식적으로는 알았던 것일까. 꿈속이라 해도 도운의 시선이 적나라하다.

 

아줌마는 지금부터 뭐 하고 놀 거예요?”

 

소년 이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

?”

 

소년 이원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재희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꿈이니까, 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예요. 해봤자 소용없는 건 없어요.”

넌 뭐할 건데?”

돈 벌 방법 연구 중? 금빛 마을에도 돈 되는 건 많을 거라고 믿으니까.”

돈 벌어서 뭐 하려고?”

비밀이에요.”

 

소년 이원은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재희는 귀를 내밀었다.

 

재희랑 결혼할 거예요.”

 

재희는 피식 웃음이 났다. 재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근심 어린 눈으로 이원이 소년 이원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원은 계속 소년 이원을 보고 있었다. 반 친구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노리는 소심한 아이처럼.

 

그때였다. 악 소리가 나서 재희는 둑을 보았다. 소녀 재희의 한 발이 둑 너머 강물에 빠졌다. 소녀 재희의 두 손이 둑을 꽉 잡았다.

 

재희는 수영을 못해.

 

재희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치자, 두 손목을 부리나케 낚아챘다. 그래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 때 물살이 가파른 물길 위로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김이원이었다. 큰 이원. 그는 금세 소녀 재희를 끄집어 올렸다.

 

.”

 

돌에 긁힌 자리를 바라보며 재희는 탄성을 질렀다. 히말라야에서 있었다더니 역시 남다르게 빠른 조치다.

 

감사합니다.”

 

소녀 재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소년 이원과 소년 도운이 사색이 되어 내달려왔다.

 

자신을 구했군.”

 

이원이 말했다. 농담조였다. 재희는 힐끗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실감 나게 나서고 말았다.

 

기억나? 너 물에 빠진 적이 있어.”

 

재희는 섬찟했다. 기억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는 분명,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가 왔어.”

 

재희는 그대로 굳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뭐하니?”

 

삼촌!”

 

소년 이원이 일어섰다. 까만 밍크코트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리고 뒤에 있는 체격이 왜소한 남자. 재희는 그를 기억해냈다. 훨씬 젊은 얼굴이지만 현재의 국무총리를 맡은 이. 정치계의 인사인 것은 확실했다.

 

?”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이원을 보고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닮아있었는데, 기묘한 것은 상반된 인상이었다. 이원이 하얗다면, 그는 검었다.

 

소년 이원이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이원을 유심히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누구쇼?”

김이원입니다. 등산객이죠.”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생긴 게 우리 가족과구만요. 친척인가?”

. 오랜만에 왔죠. 먼 친척입니다.”

……아 진짜로요?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따져봐야겠구먼. 김에 이면, 나보다 항렬이 낮을 것 같은데. 금빛마을에는 웬일이오? 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

돈 냄새를 맡았구먼.”

금빛마을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는 소년 이원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타라. 당신도 탈 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원은 재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재희는 소녀 재희를 바라보았다. 섬뜩했다. 이날 이후로……. 재희는 이원을 보았다. 노려본다는 것에 가까운 경계심 어린 표정. 이원은 체념한 듯 웃으며 손을 놓았다. 재희는 이원을 따라 차 안에 들어갔다. 좁은 차 안에 소년 이원, 이원, 재희가 비좁게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소녀 재희와 소년 도운이 아른거리며 없어졌다.

 

그래, 이때부터였나. 재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원은 우리를 버렸다.

 

차는 어느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주차장이 있는 어느 집에 도착해서 삼촌이 내리자 이원과 재희도 따라 내렸다. 이원은 소년 이원에게 중얼거렸다.

 

이사 간다고 하면 싫다고 말해라.”

왜요?”

재희나 도운과 영영 이별일 거야.”

, 왜요?”

 

소년 이원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원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이원은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삼촌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특이하군. 이라는 소리. 그러게, 커플로 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이원은 왜 나를 데리고 온 것일까.

 

익어가는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저녁 먹고 가요. 그 이상은 바라지 말고. 우리 집도 어려우니까.”

 

검은 밍크코트를 입은 삼촌이 집 안에서도 옷을 벗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식탁에는 이원의 아버지도 주변을 서성였지만, 삼촌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재희는 반사적으로 이원의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마치, 중학교로 돌아간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신지?”

먼 친척이랍니다. 소문도 빠르다니까. 의원님. 여기 앉으시죠.”

 

그동안 한마디 말도 없던 깡마른 남자가 상석에 앉았다. 콩이 섞인 잡곡밥이 올라왔다. 삼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형수! 내가 흰쌀밥으로 하라 했잖아요!”

건강에 좋아지라고 그랬지…….”

 

집안 전체가 삼촌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분위기였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삼촌은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괜찮네.”

 

그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원과 재희는 식탁의 말석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재희는 이원이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금빛마을에서 이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보상금은 서울 한복판에 땅을 사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따로 더 드릴 수도 있고.”

 

하지만 여기서 먹고 산 지 오래되어서 다른 곳에 갈 자신이 없군요. 거기 분들도 소식 듣고 오셨습니까?”

 

이장님은 이원의 아버지였는데, 삼촌의 기세에 비해서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 그러긴 했는데, 제가 중앙에서 듣기로는 돈 안 될 겁니다.”

 

이원의 말에 식탁에 앉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제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은빛마을 전략기획팀이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적혀 있었다.

 

사기꾼이군.”

 

삼촌이 벌떡 일어섰다.

 

이런 팀은 없어! 그렇죠? 의원님!”

 

의원이라 불리는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타인의 말을 듣지 말고 우리 가족끼리 결정합시다. 이원이 네 생각은 어떠냐? 이사 가고 싶어? 이사하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다.”

 

어 그게.”

성공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

성공하고 싶어요…….”

들었지? 들었죠?”

 

이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괴로워했다. 재희는 그런 이원을 당혹스레 바라보았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이원과 재희는 소년 이원의 방에 들어왔다. 이원은 소년 이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야겠다고 말했다. 소년 이원은 물었다.

 

제가 잘못한 거 있어요?”

됐다. 넌 후회할 테니까.”

 

이원을 따라 재희도 나왔다. 그는 터벅터벅 걸었다. 재희도 옆에서 걸으며,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구나 생각했다. 설명이 없는 걸음걸이. 자신에게 왜 이 모든 상황을 보여주어야만 했는가. 재희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지난 일일 뿐.

 

걷기만 했다. 그러자 어느새 택시가 내려주었던 거리에 섰다. 허름한 이 건물은 익숙했다. 자신이 훗날 매입한 건물이었으니까.

 

이원은 그곳에 서서 재희를 보았다.

 

이것만 있으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희의 손에 있던 플라스틱 명함이 이원의 손에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달려오며, 형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소년 이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원은 소년 이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사 가기 싫다고 말했어요.”

 

그의 뺨에 시퍼런 붉은 기가 있다. 삼촌에게 맞은 것일까.

 

다르게 성공할 방법이 있겠죠. 형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

삼촌의 길로 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잘 몰라도.”

 

이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재희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어붙은 심장에 누군가 작은 촛불을 갖다 댄 듯한 그런 느낌이. 부자연스럽게 그을리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아프게 녹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이제 가도 되겠다. 가자.”

어디로?”

이별하는, 곳으로.”

…….”

한 번 안아봐도 될까?”

 

이원은 재희를 덥석 안았다. 10여 초 그러고 있다가 재희는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꿈인가. 역시.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파란 물.

 

금빛마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을은 수몰되었고 위쪽의 낡은 낚시터엔 황량한 기운이 가득하다.

서울 간다더니?”

 

익숙한 엄마의 얼굴. 젊은 얼굴이 아니다.

 

엄마?”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도운이었다. 재희는 급하게 열고 귀에 대었다. 도운의 벽력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너 어디야! 화장실 간다더니.”

미안해. 무슨 일 있어?”

이렇게 마지막을 보내면 어떡하냐. 속상하다. 진짜.”

무슨 일이야?”

이원이 세상을 떠났어.”

미안해. 지금 금빛 마을이야.”

올라와. 아무리 이원이 우릴 버렸다 하더라도,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미안해. 곧 갈게.”

 

전화를 끊고 호수를 보았다. 꿈일까, 꿈이 아닌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이원의 각종 노력에도 호수는 여전히 맑았다. 마을이 잠긴 것은, 소년 이원의 이사하기 싫다.’는 말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었으리라.

 

그는 금빛마을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버린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 땅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은 잊지 못해서였을까. 플라스틱 명함은 이름 석 자가 뚜렷하다. 재희는 호수에 명함을 던졌다.

 

그의 품의 비린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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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립스틱

 

강복주

 

 

 

붉은 립스틱, 짧은 치마, 망사스타킹. 그녀는 그야말로 TPO를 탈피했다. 수많은 18세 소녀, 소년들이 머물러 있는 학교. 수많은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녀를 포착하면 둘 중 하나였다. 외면하거나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그 주인공인 그녀는 시선을 즐긴다기에는 뚱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이완.”

 

이완이라는 학생도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교실 책상에 큼지막한 신문을 올려놓고 밑줄을 쳐가며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을 보자, 여자의 망사가 보였다. 이완은 얼굴을 찌푸렸다.

 

옷 좀 입어라.”

잘 입은 건데?”

나 생각해봤는데.”

……그래서.”

!”

그래. 일단 책상에서는 내려가라.”

오늘부터 1! 딴 놈이 볼까봐 두려운가봐?”

 

이완은 입을 꾹 다물고 여자를 노려봤다. 그제야 그녀는 내려왔다. 아무도 들리지 않게 완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계약연애야. 지도연.”

후후.”

 

지도연이 떠나가자 반친구들이 이완에게 몰려들었다. 그 중에 이완의 단짝이었던 이수국은 완의 어깨를 잡고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쟤 곧 퇴학이야.”

 

그러나 그의 말림은 대다수의 떠들썩한 부럽다에 묻혀버렸다.

이완은 눈을 감았다. 괜한 선택이었을까. 미친 짓을 해버린 걸까. 소문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텐데.

 

이완은 같은 반의 새봄을 바라보았다. 새봄은 여기를 쳐다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완은 뚜벅뚜벅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새봄은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문 들었어?”

너무 시끄러워서 직접 봤는데, 축하해.”

다른 할 말은 없어?”

없어.”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문제집에 펜을 갖다대었다. 그러나 한 줄도 더 적지 못하고 막혀 있었다. 새봄은 다시 이완을 올려보았다.

 

가줄래?”

…….”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것은 친구인 수국이다. 수국은 이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였다고 미친 짓하는 중?”

. 그런가.”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새봄에게 차인 것은. 물론 수국과 이완만이 아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열. 어쨌든 사귀긴 사귀었네. 우리학교 최고 꼴통과 사귀시는 느낌은 어때?”

거절이 거절로 안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

거절이지.”

더 다가와 달라고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게 헷갈려.”

그럼 더 다가갈 것이지, 꼴통이랑 왜 사귀어, 등신아. 한 번 해보려고?”

 

왜 그랬을까. 이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새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냥한 것이 질투가 났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매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새봄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무언가 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내어 보이고 싶다. 이완은 자신의 마음이 삐거덕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마음에 한 번의 거절이 또 들이닥친다. 그래도 조금 더 지나면 또 한 번의 거절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멀쩡해지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마음과 같이 하늘도 울적했다. 먹구름이 울먹울먹하다가 끝내 가는가 했더니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종이 울렸다. 세상은 어두웠고 이완은 우산을 들고 아이들 사이를 걸었다. 눈에 띄는 아이가 있다. 새봄이다. 우산을 잊었는지 먹구름을 보고 있었다. 초조하게 손가락이 까닥거린다.

 

이완은 말없이 우산을 내밀었다. 새봄이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동안 서로가 서로를 읽어내려 시선이 엉켰다. 이완의 시선이 먼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타다닥.

 

이완의 시선이 잠시 엇나간 사이 새봄은 뛰었다. 비는 새봄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고 몸에 스며들었다. 이완은 멀거니 새봄을 보았다. 새봄은 멀어지고 있다.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 섞여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완의 팔에 세게 부닥치는 팔이 있었다.

 

선생님한테 혼나다 이제 왔다?”

 

애교섞인 말투였다. 전교생의 시선이 여기로 내리꽂히는 듯하다. 이완은 흘끗 옆을 보았지만 다시 시선이 저 멀리에서 흔들린다. 도연은 이완의 턱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이완의 고개가 강제적으로 도연에게 향했다.

 

헤이, 내가 왔다구. 지도연.”

그래.”

 

이완의 고개는 다시금 도연을 피한다.

 

커피 마시러 갈래? 비도 오는데.”

집에 갈래.”

그럼 나도 너희 집에 가도 돼?”

?”

, 겉으로만 연애하는 거니까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야할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맛있는 건 없어도 돼.”

 

도연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자, 이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합의사항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다. 도연이 합의에 다다르기 위해 이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완은 좀 더 경직되었다. 도연은 정말로 자신의 집에 가기 위해 발을 옮긴 것이다.

 

카페가자.”

.”

 

도연은 촐랑촐랑 앞서서 걸었다. 누가 봐도 튀는 차림새. 이완은 그런 게 참 무디게 느껴졌다.

 

카페에 가기 전, 도연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다. 신문이라고는 전혀 가까이 할 것같지 않은 도연이었기에 이완은 의외였지만, 곧 자신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구석에 곧 자리를 잡고, 이완이 미간을 찌푸린 모습을 과장되게 흉내 내며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완은 그냥 놔두었다. 그러나 곧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새봄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맞고 걸어갈 것을 걱정했는데 우산을 씌워준 사람이 있었다. 한 학년 선배였던가, 종종 봤던 얼굴이다.

 

이완은 마음이 시렸다.

 

놔두자.’

 

그렇게 생각하고 시킨 라떼를 후루룩 들이켰다.

 

해장국 먹어? 후루룩 후루룩 먹네.”

 

뭐가 그리 웃긴지 도연은 깔깔 웃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봄과 그 선배다. 이완은 바로 긴장을 해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조금 흘린 모양이다. 도연이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안녕. 이완.”

안녕. 새봄아.”

여긴?”

 

선배가 물었다.

 

같은 반 친구예요.”

 

새봄이 대답했다.

 

저는 여자친구고요.”

 

새봄이 씩씩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완은 홀로 남겨진 듯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선배라는 사람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새봄이랑 친해 보였는데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새봄에게 고백한 것은 새봄과 이완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완이 발설한 수국 정도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봄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비밀은 지켜지고 있는 것같았다. 이완은 벌떡 일어섰다.

 

저희 나가보겠습니다.”

? .”

 

당황하는 틈에 이완은 나와버렸다. 도연은 당황하다가 신문도 커피도 놔두고 이완의 걸음에 따라붙었다. 도연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좀 천천히 걸을 수 없어?”

알았어.”

 

이완은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천천히 걸었다. 도연이 물었다.

 

너네 집 가는 길?”

네 집 가라.”

내일 콘서트 티켓 생겼는데, 보러 갈래?”

알았으니까 오늘은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좋았어! 가는 거다.”

 

도연은 팔짝 뛰다가 주저앉았다. 힐이 아픈 것같다. 이완은 손을 내밀었다. 도연은 베시시 웃었다. 일으켜 세운 후, 이완은 가만히 서 있었다. 도연은 가라는 무언의 압박에 웃으며 사라졌다. 절뚝거리며 자신의 집으로 가는 도연을 보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이상하게 마음에 찝찝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현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외면했다. 또 누구와 무슨 비교를 하려고.

 

아들, 이상한 소문이 있어?”

.”

누구랑 만나고 다녀?”

나 알아서 해.”

, 이리 나와.”

 

이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방문을 닫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엄마의 목소리가 뒤이어 꽂혔다.

 

좋아. 저녁시간 때 얘기하자.”

 

그 말이 더 불편했다.

저녁 시간에는 나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이런저런 하루의 점검을 하기 때문에 불편했지만 안 나가면 완전히 안 해버린 게 된다. 대체로 경제공부를 시키는 편, 이라고 생각한다. 이완도 돈이 없으면 죽고 만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다.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고 점검받는 것을 내심 즐기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불길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역시 부엌으로 가니 식구들의 표정이 심상찮다.

 

이완아.”

.”

성인 되고 나서 시작했으면 했는데 주식 한 번 시작해봐라.”

.”

그리고 여자 함부로 만나는 거 아니다.”

…….”

노는 애하고 사귄다고 말이 많더라. 얼른 정리해라.”

안 그래도 정리하려고 했어요. 정리할게요.”

앞으로 여자친구는 금지다. 네가 잘 나가면 다 따라붙을 텐데, 왜 그래? 고작 그거 하나 못 참아?”

…….”

이완은 불만을 눌러 삼킬 수 있었지만, 살갑게 말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대답 안 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이구, 속터져.”

 

엄마도 옆에서 탕탕 가슴을 쳤지만 이완은 그냥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완은 대충 먹고 나서 바로 양치를 하고 침대 위에 앉아 휴대폰을 한 손으로 뒤적였다. 연락이 오는 곳도 없었다. SNS도 하지 않았고 때로 단톡에 규정적인 말이 뜨는 것이 전부였다. 그 중 하나는 사진 동아리였다. 어떤 카메라를 샀고 찍었고가 매번 올라왔지만 이완은 거의 유령회원이었다. 사실은 새봄이 카메라를 샀기 때문에 함께 들어간 동아리였는데, 장점은 선배들의 잔소리나 기합이 거의 없었다. 참석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심지어 선배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 흔하지 않은 동아리였는데 이완에게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새봄은 선배들과 함께 잘 어울려 다녔으니까.

 

그런데,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왜 보질 못했지? 이완은 황급히 문자를 보았다. 새봄으로부터 와있는 문자였다.

 

-내일 우리 동기끼리 출사하려고 하는데 너도 갈래?

-

 

무심코 보내고 나서야 도연이 생각났다. 이완은 찝찝했다. 그래도 계약연애니까 반드시 가야하는 것도 아니었고 괜찮을 거야.

이완은 우선순위를 새봄으로 잡기로 했다.

 

다음 날, 다행히 도연은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완에게는 좋은 점이기도 했지만 역시 잘 안 맞는다고 느껴지는 점이기도 했다.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왜 안 나타나는 것일까. 찾아다니기는 귀찮다. 이완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문자 하나는 보내두기로 했다.

 

-오늘 못 감.

 

답장은 없었다. 방과 후에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갈 데까지. 정신 없이 풍경을 바라보며 구도를 잡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끝없이 위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폰을 꺼내든 이완은 화들짝 놀랐다. 문자가 300여 개. 전화도 울리고 있었다. 이완은 전화를 꺼내들었다.

 

너 어디야?”

못 간다고 말하려 했는데…….”

됐고, 당장 와.”

…….”

계속 기다릴 거니까 빨리 오라고. 당장 와. 끊어.”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이완은 식은땀이 났다.

 

이완아, 여기 봐.”

 

새봄이었다. 어느 새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좀 웃어.”

 

이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급한 일 있으면 가도 돼.”

없어. 급한 일.”

 

이완은 여유로운 척 허세를 부리며 카메라를 집었다.

 

너도 찍어줄게. 너는 모델답다.”

모델은 무슨.”

 

새봄은 풋 웃었다. 이완은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기억은 다시 지워진 채로 웃음이 있었다. 다행히 오해는 풀린 건지도 모르겠다. 이완은 이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도연에게는 내일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

 

석양이 축축한 땅 곳곳을 붉게 적셨다. 닿는 곳마다 마른 먼지가 일었다. 이완은 어깨를 펴고 석양을 바라보고 정면을 찍었다. 오늘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잠이 잘 올 것 같은 하루였다. 이완은 뒤돌아보았다. 그대로 새봄이 있었다.

 

나 걔랑 헤어질 거야. 도연이.”

아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좋은 선택이라고 봐.”

너는 나를…….”

, 내가 통솔자라 애들 좀 모아올게. 마칠 시간 다 되어서.”

 

결국 새봄과는 별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약간 달뜬 마음은 학교 가는 길까지 유지 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는 수국이 어깨를 내리쳤다.

 

인마, 어떻게 된 거야?”

?”

도연이 울던데. 뭐 어디 갔는지 물어서 사실대로 말하긴 했지만.”

……사과해야하나?”

 

그 때 이완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가 이완의 어깨를 잡았다. 이완은 무심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악력이 강해서 무겁고 아프다.

 

이완이랬나? 잠깐 볼까?”

수업 10분 전인데요?”

 

수국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이완은 그를 보았다. 그를 알았다. 야구부 3학년 장기철이다. 학교에서는 유명한 선수였다.

 

갈 테니까 걘 놔주세요.”

그래야지. 따라와.”

 

장기철은 이완을 앞장세웠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밀리는대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곧 체육관이 보였다. 체육관 안에는 네 다섯 명의 부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도연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자신이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이완이었다.

 

왜 불렀어?”

뻔뻔하네.”

안 그래도 사과하려고…….”

사과? 필요없어. 이완, 사람 마음 가지고 논 댓가가 뭘까?”

 

이완에게 보여줬던 그 애교로 이번에는 장기철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너도 놀림당하는 거지? 안 그래? 그래야 공평하지.”

묶어.”

 

장기철이 말했다. 이완은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묶이는 데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벗겨.”

 

지도연이 말했다. 전의 그 미소로 키득키득 웃는다.

 

너라면 비명 안 지를 줄 알았어.”

사진 찍으려고?”

 

비명을 안 지른다기보다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라 질려버린 게 아닐까. 이완은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완전히 겁에 질려 나온 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비명을 지를 준비는 되어있다. 소리가 들릴까? 어느덧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물비린내가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는 쏟아붓고 있었을까. 이 비를 뚫고 목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안 찍어. 그런 짓을 왜 해?”

영상을 찍는 건가?”

상상력이 풍부하네. 노노. 단지, 앞으로 잊혀지지 않게 해줄게.”

 

지도연은 벗긴 상체 위로 립스틱을 꺼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이완이 몸을 뒤틀자, 바로 다시 부원들 손으로 고정된다.

 

오빠 이름도 적어줄까? 깔깔.”

 

지도연이 장기철을 보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난 됐다.”

 

라고 말한다.

 

살려주세요!”

 

그제야 이완은 크게 외쳤다. 바로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이완은 절망적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도 들린다. 꽤 여러 명이서 온 것같다. 수국의 신고일까?

 

튀자!”

 

야구부원들과 지도연은 곧 사라졌다.

 

이완은 멍하니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새봄의 그림자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은 헐레벌떡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누가…….”

 

하며 몸을 살피다가 곧 알아냈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지도연이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이름이 적혀있네.”

 

이완은 앗차 싶었다. 그래, 아무 거나 써놨을 리가 없지. 몸에 씌여진 립스틱을 생각하자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문제아 녀석! 증거를 남겨놓자. 사진찍어 놓을까?”

괜찮아요.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완은 힘없이 대답했다.

 

이 녀석아! 증거가 있어야지!”

됐어요.”

 

잊혀 지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잊어주리라. 결코 찍히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니 새봄을 보았다. 새봄은 사진기를 들더니 자신을 찍었다. 휴대폰 사진기가 아니라, 평소 들고 다니던 디지털카메라였다. 렌즈가 외계인의 눈처럼 커다랬다.

 

찰칵.

 

?”

증인은 있지만, 증거도 있어야 해.”

새봄아. 혹시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싫어하니?”

 

평소에는 묻지도 않았던 말이 충격을 받자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싫지 않아.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새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절이었다. 아마도 잊혀지지 않을. 야구부원들을 뒤쫒아 간 동료들은 다행히 듣지 못했다.

 

이완은 천천히 밖으로 걸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소나기일까, 계속 올 비일까. 자신으로서는 그 것은 알 수 없었다.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자 어느덧 빗속이다. 립스틱은 지워지고 있었다. 바지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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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 하는 다온이

 

강복주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그래서 네가 싫어. 더 다가오지 않으면 좋겠다.”

 

새하얀 얼굴이 정이 안 갈 정도로 날카로웠다. 머리카락의 그림자마저 예술적으로 보이는 조각상같은 외모, 여자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선이 고왔지만 여성스럽지 않을 정도로 선이 강하고 딱딱 끊겼다. 그는 깔끔하게 걷은 셔츠의 끝을 다시 빳빳하게 펴내며 다온을 바라보았다.

 

알겠니?”

 

다온은 충격을 받았다. 네가 싫어라고 말할 정도라면 진짜 진심으로 싫은 거잖아. 머리털이 쭈볏쭈볏 서는 느낌이 왈칵 눈물샘까지 자극되었지만 다온은 꾹 참았다.

 

…….”

 

보이는 것만 믿어. 보이는 것만.”

 

정말 울고 싶었다. 그저 수다였을 뿐이었던 것같은데 이렇게 까지 된 걸까. 다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정진.”

 

그러는 거 또라이 같으니까.”

 

…….”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잘못했던 걸까.

 

사과 안 해?”

 

다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는 것도 사과해야하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과 안해도 돼. 하지만 타로카드는 기분 나빠.”

 

내 취미야!”

 

그게 취미라고?”

 

정진은 피식 웃었다. 그는 다온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다온은 그가 다가올수록 서서히 걸음을 물렸다.

 

그럼 똑똑히 기억해.”

 

다온은 덜덜 떨며 정진을 바로 보았다.

 

나는 네가 싫어.”

 

 

 

*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다온이가 정진이한테 고백했대. 진짜? 말이 되는 조합이야? 그러니까 킥킥, 장렬하게 차였다던데 불쌍하다 야.

 

오늘의 핫토픽은 다온이었다. 다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제 타로카드 셔플을 세 번이나 했다. 그리고 밖에서 다른 타로리더에게도 봤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그는 왜 내가 좋냐며 물었고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너도 나를 좋아하는 것같아서, 라고 했을 때,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타로카드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고, 결과는 심장에 칼 세 개는 꽃힌 느낌.

 

사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다온은 벌떡 일어나 소각장으로 달려갔다. 점심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소각장에 아끼던 타로카드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꼴도 보기 싫었다.

 

정진은 다온이 달려가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따라가려는 건 아니지만 소각장에 한 번 가봐야겠다 싶어 가보았을 때는 이미 다온은 사라진 뒤였다. 정진은 타다 반이나 남은 카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다온에게 있어 오늘의 불행은 그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정진의 출중한 외모에 힘입어, 그에게는 팬클럽이 있었다. 다온의 행동은 그들의 분노를 산 것이 틀림없었다.

 

너 얘기 좀 해.”

 

학교 종이 울리자마자 우르르 몰린 5명의 소녀를 바라보며, 다온은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지. 예의지켜!”

 

꼴 좋다.”

 

다온은 힘없이 일어섰다. 그 때였다. 물이 머리로 쏟아졌다. 뚝뚝 떨어지는 물.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어머, 실수.”

 

그들은 까르르 웃었다.

 

뭐하냐. 니들.”

 

그 때 그 분위기에도 또 찬물이 끼얹어졌다. 그들이 뒤를 돌아보자 정진이 서 있었다. 이정진은 다온에게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뭐하냐. 이정진.”

 

팬클럽도 지지 않고 정진에게 물었다.

 

불쌍한 애한테는 수건이 제격이다.”

 

깔깔, 그렇지. 그렇지.”

 

다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일행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가 쨍쨍했다. 물기가 마른다. 두피가 시원하다. 뒷목이 스트레스로 짜릿짜릿하다. 그렇지만 견딜 수 있어. 현실은, 그래 이게 현실이구나.

 

그래. 고맙다. 이정진.

 

다온은 그제야 삐질삐질 눈물이 새어나왔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집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낼 거다.

 

아파트 앞에 오자 아이가 이상하게 다온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리만 안 냈다뿐이지 눈물콧물이 범벅이었다.

 

누나…….”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온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 친구들이 이만큼 사려깊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말을 걸어온 아이는 타다 만 카드를 내밀었다. 다온은 흠칫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귀신의 장난?

 

가방에서 떨어졌어요.”

 

가방에서?”

 

아이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물을 곳은 없었다. 가방에서 떨어지다니. 난 분명히 다 버렸는데. 아니야. 내가 틀릴 수도 있어. 이번에 배웠잖아.

 

, 다온은 코를 들이마셨다.

 

그래도, 내게 많은 위로를 줬던 카드. 한 장 정도는 기념하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집에 오자 책장은 한 면은 각종 타로카드로 꽉 차 있었다. 이걸로 사람들을 봐주기도 했는데, 다 잘 맞다고 그랬는데 착한 사람들이었나보다.

 

이제 안 봐.

 

그래도 버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구를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정진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궁금해서 결국 하나를 뽑아 셔플했다.

 

원카드. 쓰리소드가 나왔다. 심장에 칼 세 개. 내 마음이 나온 건가? 끼워맞추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고 카드를 거두었다. 다온은 집에 오면 더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오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아리 모임입니다. 내일 방과 후, 과학실로 모이세요.

 

 

엄마의 강요로 들어간 과학실험동아리. 거긴, 이정진이 부회장으로 있었다. 뒷골이 다시 서늘하다. 다온은 다시 메시지를 보았다. 심지어 보낸 사람도 이정진이다. 이건, 소시오패스 아닐까?

 

아냐. 내가 잘못한 거야.

 

다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갈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안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저녁시간에 아빠가 방에서 나오라고 강제로 끄집어 내어 앉은 식탁에서 다온은 돌씹듯이 밥알을 씹었다.

 

다온이는 왜 그렇게 얼굴이 부었냐?”

 

밥만 먹다가 아빠가 물었다. 다온은 뚱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얘가, 아빠 말씀하시잖아.”

 

, 실험동아리 안 가면 안 돼?”

 

? 잘 다녔잖아.”

 

나 걔 싫어.”

 

누구?”

 

이정진.”

 

어머, 걔랑 싸웠어?”

 

아니. 내가 잘못했는데 걔가 나 싫어해.”

 

아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놈이랑은 엮이는 거 아냐. 겉만 멀쩡했지, 파산직전이라 아주.”

 

맞다. 당신 그 집 아저씨랑 친하죠?”

 

친하진 않지만, 그 집 마누라가 사이비에 빠져 파산 직전이라 하더라고. 안 되더라는데. 자식인들 제대로 크겠어?”

 

그럼 그만둬야겠네.”

 

이 사람이. 다온이가 왜 그만둬?”

 

그럼요?”

 

그 놈이 그만둬야지!”

 

아빠 그건 좀.”

 

아빠를 믿어라.”

 

아니. 아빠, 그런 게 아닌데.”

 

다온은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아빠!”

 

아무 것도 아니라니.”

 

그런 거야. 나 안 먹어!”

 

다온은 회피하듯이 방안에 들어가 방문을 잠궜다. 사춘기라서 그렇다는 소리가 닫은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루에 일정량만 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울음이 새어나왔다.

 

 

과학실험은 가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엄마는 손을 질질 끌고 차량에 태웠다. 다온은 시무룩하게 가방을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실험실에서는 서로 눈치보는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다온은 빈 자리에 섰는데, 친구인 혜은이 다가왔다.

 

들었어? 이정진 실험실에서 나간대.”

 

걔가 왜?”

 

교수님한테 잘못한 모양이던데? 점수 못 얻어갔네. 잘 됐어. 어제 일 들었어. 네 편도 있으니 걱정마. 실험실 애들은 다 네 편이다. 사실 이정진 걔 교수님 빽으로 들어온 거잖아.”

 

아이 씨!”

 

자기도 모르게 다온은 소리쳤다. 혜은이 깜짝 놀랐다.

 

왜 그래?”

 

그냥 아빠 짜증난 게 생각났어.”

 

너희 아버지 좋던데? , 사실 그렇게 당하고 화가 안 날 수 있냐?”

 

?”

 

혜은도 이미 아는 모양이었다.

 

물까지 뿌렸다며? 전쟁이야. 인간들. 미쳐가지고.”

 

다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넌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못 참아. 우리랑 연합한 동아리가 몇 개인데 해보자고.”

 

다온은 이제 감히 하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혜은은 너무나 기세등등했고, 물을 맞았던 것도 사실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정진이 피해자 같지.

 

미안했다.

 

다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니까, 내가 싫은 거지. 나라도 싫겠다.

 

다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감동할 것없어. 당연한 일을 하는 것 뿐이니까.”

 

혜은은 오해를 한 듯했지만. 다온은 빠르게 정리를 끝내고 아직 명부에 올라와있는 정진의 주소를 폰으로 찍었다. 학교에서는 도저히 못 마주치겠으니까, 가서라도 사과의 인사를 하고 싶다. 오늘 명부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는데도, 오늘도 나오지 않는다.

 

밤늦게 몰래 어떻게든 나와 정진의 집으로 향했다.

 

복도식으로 된 아파트를 걸어 405호에 섰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찍다가 흔들렸는지 405호인지 406호인지가 헷갈린다. 비교적 조용한 406호를 두드리려고 하는데 405호가 벌컥 열렸다. 익숙한 날렵한 체형이 빠르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다. 이 쪽은 보지도 않은 것같다.

 

!”

 

다온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꽥 질렀다. 힐끗 뒤돌아본 눈동자는 조금 커진 것같다.

 

신다온?”

 

, 얘기 좀 해.”

 

흐음.”

 

태연하게 다가와 피식 웃는 걸 보니 정진은 역시 강철심장이다. 다온은 왜 얘 앞에만 서면 좀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얘기할 거 없는데.”

미안해.”

미안할 것도 없는데.”

실험실 그만두게 해서.”

괜찮아. 귀찮았어. 당장 대학 갈 것도 아니고.”

…….”

 

울면 안 되는데, 여러 번 거절되는 느낌이 속상하다.

 

울보는 질색인데.”

안 울거야.”

얘기나 좀 할까? 어차피 나왔으니 시간은 많다. 놀이터에서 마실 건, 네가 사라.”

마트가 어딘데?”

같이 가자. 그리고 다음부터 이럴 때는 안 산다고 하는 거야. 호구잡히지 말고 살아. 걱정이다. .”

 

다온은 입술을 삐죽였다. 말을 참 밉살맞게 하고, 또 얄밉다.

요구르트를 두 개 사서 그네에 앉았다. 차가운 하늘 위로 삐끄덕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온은 정진의 옆얼굴을 보았다. 반듯한 얼굴이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듯하다.

 

널 모르겠어. 냉탕이었다가. 온탕이었다가.”

그래?”

거절인 거지?”

카드 보면 알잖아? 카드가~ 거짓인가?”

 

역시 말을 밉살맞게 한다.

 

나도 맹신하는 건 아니다 뭐.”

내 카드는 네 가방에 꽂아뒀어.”

?”

 

그 때 가방에 올려놓은 카드는 정진이 올려놓은 건가?

 

까맣게 타서 알 수 없는 카드. 그게 내 카드야. 다른 카드는 다 거짓이야.”

…….”

뭐든 너무 믿지 마. 그게 다 갉아먹으니까.”

너도?”

나도 믿지 말구.”

사과 받아 주는 거야?”

……안 받아줄 거야.”

뭐라고?”

 

분위기는 분명 훈훈한데, 정말 도무지 알 수 없다. , 알 수가 없다. 다온은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또 사과하러 와.”

 

차가운 얼굴에 싱긋, 싱거운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아마도 또 사과해야할만한 일이 생겼다. 동아리연합에서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나에게 물을 뿌린 아이들이 괴롭힌 아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폭위가 열렸는데 거의 표적수사였다. ‘이정진이 시켜서 그랬다.’라는 증언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다온은 동아리 회장을 찾아다니며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다. 약간은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처럼 보기도 하는 것같았다.

 

다온은 일이 번지기 전에 이정진을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종이 울렸지만 다온은 반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정진의 반 앞에서만 서 있었다.

 

이 녀석아. 들어가.”

 

선생님의 그 말에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혜은이를 찾았다. 그녀라면 납득해줄 것도 같다. 어제 일을 말한다면. 그러나 그 때 혜은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증언도 나왔고 이정진도 붙잡혔음. 보려면 과학실에 와. 자기도 인정한 듯.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이 좀 차갑다. 과학실에 비틀거리며 달려가자 정진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제가 다온이를 괴롭히려고 그랬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예요!”

다온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저를 괴롭힌 적 없어요! 시킨 적도 없을 거라구요!”

정진은 조금 놀란 표정이 스쳤다.

아닙니다. 다온이가 너무 착하네요.”

진짜 아닐 거예요. 정진이는 그런 애가 아니예요.”

어느 쪽이 진짜야? 어느 쪽이든 징계 먹을 각오 단단히 해!”

 

정진은 표정이 약간 굳었다.

정진은 말했다.

 

증거가 있습니다.”

 

그는 검은 상자를 열었다.

검은 상자 안에서 검은 카드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검은 먼지도 풀풀 날렸다.

 

다온이 타로카드인데, 제가 불태운 거예요. 괴롭힌 증거죠……. 반성합니다.”

저 타로카드는 우리학교에서 다온이 밖에 안 써요.”

 

혜은이 말했다.

 

 

 

밤 늦은 시간, 도저히 정진의 집에는 찾아가지 못하고 정진과 있었던 놀이터에 앉았다. 용기를 내어 찾아왔는데, 그 이상의 용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을 혼자 삐그덕 거리며 그네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그네가 부웅 하고 떴다. 뒤에서 누가 밀었다. 다온은 당황해서 비명소리를 냈는데, 다음에는 그네를 잡아주었다. 든든한 손이다. 뒤를 돌아보자 정진이 씨익 웃었다.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다.

 

이렇게 숨어있으면 못 보겠는데.”

 

!”

 

미안보다는 훨씬 낫다.”

 

…… 나쁜 놈.”

 

괜찮아.”

 

난 안 괜찮아. 네가 태운 거 아니잖아.”

 

하지만 한 쪽은 징계라고 하니까.”

 

나는 이 죄책감 안고 어떻게 살아?”

 

, 뭐 난 어차피 이사가고, 별 타격 없는 일이니까 신경쓰지 마.”

 

미안.”

 

내 마음이 아직 궁금하니?”

 

모르겠어.”

 

그럼, 좋은 일 한 번 했으니까 나쁜 일도 한 번 해도 될까?”

 

정진은 천천히 다가왔다. 다온은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차가운 입술이 입술에 닿았다. 차갑고 축축하고, 그리고, 더 다가오는 바람에 다온은 뒤로 자빠졌다. 다행히 다온은 벌떡 일어서서 흙투성이 옷을 털어냈다. 그 모습은 정진은 지켜보고만 있었다.

 

비밀을 알려고 하지 마.”

 

정진은 짖궂게 웃었다.

 

다온의 책상 위엔 타버리고 간신히 남은 the love가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불빛에 일렁이고 있었다.

 


 

10대의 연애와 현대식 로미오와 줄리엣(우리는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전쟁이다)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잘 되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타로에는 흥미가 있는데, 소설처럼 지나치게 믿으면 해로울 것같습니다ㅎㅎ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라는 것으로 해주세요ㅎㅎ 이 소설도 1년 전에 썼던 소설입니다. 

문체나 문장이 좋은 것같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나중에 올릴 두 편도 쓴 지는 1년 정도 묵혔는데요... 용기가 날락말락하지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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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는 마녀

                                                                     강복주

 

 

마녀는 고양이를 기른다. 마녀전서 1쪽에 기록되어있는 법규였다. 주디는 성적에 한해서만큼은 모범적인 마녀지망생이었지만…….

 

겨울이었다. 성에가 허옇게 낀 창문을 주디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주걱을 들었다. 큰 냄비에 용액이 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걱으로 찬찬히 사람 몸통만한 냄비 안을 저었다. 황토색의 용액은 끈적끈적했다. 개구리 눈알로 만든, 꽥꽥거리게 되는 마법약은 순조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녀시험이 일주일 가량 남아있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주디는 마녀치고는 너무 잘 웃는다는 꾸중을 몇 번이고 들었지만 성실한 학생이었다. 가끔씩은 심술을 부리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은 주디의 실수에 함께 웃었고 그럴 때면 마녀협회에 불려가서 혼나고는 했다. 마녀의 위엄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주디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리온.”

 

혀를 길게 내밀고 헥헥거리는 저 개의 이름은 토르. 주디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개는 마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마녀들은 대부분 검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개를 기르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마녀시험에서 떨어질 지도 몰랐다. 주디는 마녀시험에 통과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비밀로 해서 버틸 작정이었다. 마녀시험에서 통과하기만 하면 으슥한 곳에서 숨어서 혼자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고비는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 저녁 마녀 친구들이 시험공부를 겸해서 주디에게 특강을 받기 위해 주디의 집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오늘은 개구리 고기를 잔뜩 줄테니 숨어있으렴. 토르.”

 

주디는 토르의 턱을 쓰다듬었다. 토르는 가만히 앉아서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오늘만 넘기면 되니까.”

 

주디는 토르와 눈을 마주치고는 싱긋 웃었다. 선생님에게 매번 혼났던 그 웃음이었다.

 

 

 

사랑하는 주디!”

 

구불구불한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한 마녀가 뾰족한 검은 모자를 벗고 주디를 껴안았다. 옆에는 인상이 어두운 흑발마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까닥하고 고개를 까닥여서 인사했다. 주디는 반가운 얼굴로 둘을 맞이했다. 금발마녀의 이름은 에디야, 흑발마녀의 이름은 카르텔이었다.

 

소야는 어디에 있어? 안 보이네!”

 

모르겠어. 걘 항상 늦으니까.”

 

카르텔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하긴 그래. 변명도 항상 똑같았지. 오늘도 분명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할 거야.”

 

소야의 할머니는 몇 백번을 부활하시는지.”

 

카르텔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끼리 먼저 수업하자구.”

 

에디야가 주디의 팔을 잡고 끌고 들어갔다. 그 때였다. 벽장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

 

?”

 

에디야가 깜짝 놀라 주디를 보았다. 에디야보다 더 놀란 것은 주디였다. 주디는 목언저리로 식은땀이 배였다. 벽장을 보자 벽장의 문 틈으로 토르의 동그란 눈이 보였다. 주디는 재빨리 입에 검지를 대었다가 손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에디야를 보며 밝게 웃었다.

 

약의 기포가 빠질 때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 요즘 이 약, 저 약 실험해보고 있거든. 어떤 건 두꺼비 소리도 나.”

 

토르는 짖는 것을 멈추었다. 에디야는 주디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역시 주디는 아는 약도 많아.”

 

둘 다 부엌으로 와! 실험해야지.”

 

주디는 토르에게서 멀리 떨어진 부엌으로 에디야와 카르텔을 안내했다. 카르텔은 평소와 같이 말 수가 없었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카르텔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르텔이 말하자 주디는 화들짝 놀랐다. 카르텔은 가만히 주디를 보고 있었다.

 

?”

 

화장실이 어디지?”

 

, 부엌 옆에 있어. 따라와!”

 

주디는 카르텔을 화장실까지 안내하고 뛰다시피 에디야에게로 돌아왔다. 다행히 에디야는 다른 곳을 보지 않고 끓는 냄비를 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갔던 카르텔은 곧 돌아왔다.

 

셋은 한 자리에 모여 준비물인 뱀, 개구리 눈알, 두꺼비 껍질을 꺼냈다. 주디는 그 것에 더해 마법의 가루를 스윽 재료에 뿌렸다. 은색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가루였다.

 

이 가루를 뿌려야 약이 더 잘 돼. 알이 굵은 진주를 갈아서 고운 모래랑 섞은 거야.”

 

역시 훌륭해! 주디! 좋은 팁이야.”

 

에디야는 열심히 메모 중이었고 카르텔은 공부에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웠다. 계속 주변을 살피는 카르텔 덕분에 주디는 수시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딜 그렇게 봐? 카르텔?”

 

에디야가 카르텔에게 물었다.

 

카르텔은 말없이 시선을 토르가 있는 서랍에 고정했다. 주디는 카르텔의 앞을 허둥대며 막아섰다. 카르텔은 이번에는 멀뚱히 주디의 얼굴을 보았다. 주디는 물었다.

 

왜 그래? 카르텔?”

 

소야가 오는 소리가 들려.”

 

똑똑.

 

그 말대로 곧 입구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디가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왈왈왈왈왈왈!

 

서랍 안에서 토르가 세차게 울었다. 주디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문을 열었다. 소야가 마법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마법복도 몇 개의 단추가 풀려있다. 소야가 주디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에디야가 주디에게 물었다.

 

기포가 너무 심하게 터지는 거 아냐?”

 

아냐! 아냐! 괜찮아! 왔니? 소야?”

 

소야는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너희 집 고양이는 개처럼 짖는군.”

 

아니야. 아니야. 고양이 소리가 아니라 약품소리야.”

 

흐음, 오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늦었어. 먼저 시작했겠군.”

 

입가에 파스타소스가 묻어있어.”

 

크흠, 데이트한다고 늦은 거 절대 아니야. 오해말라구.”

 

새로운 남자? 잘 생겼어?”

 

에디야가 물었다.

 

잘생겼어. 매너도 좋구. 들어가자.”

 

소야는 주디의 등을 토닥였다. 주디는 서랍을 힐끗 보았지만 토르는 더 이상 짖지는 않았다. 순한 눈을 이리저리 굴렸을 뿐이다. 제발. 주디는 속으로 외쳤다.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었다. 주디는 정신없이 셋 사이를 이리저리 다녔다. 그래야만 불안한 마음이 조금 안정될 것같아서였다. 이윽고 그들은 현관 앞에 신발을 신고 서있었다. 갈 시간이었다. 시험 준비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더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디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잘배웠어. 주디. 사랑해!”

 

에디야가 손끝으로 키스를 날렸다. 카르텔은 침묵했고, 소야는 툴툴거렸다.

 

주디. 다음에는 간식 더 줘. 배고파.”

 

알았어. 알았어. 다들 잘 가! 우리 모두 마녀 시험에서 합격하자!”

 

그래!”

 

그들은 손을 흔들고 떠났다. 문을 닫고 나서야 주디는 다리가 풀렸다.

 

주디는 서랍을 열었다. 토르는 말없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한 표정이다.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잘 끝났어.”

 

주디는 이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토르가 주디의 뺨을 핥았다. 주디는 토르를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빗자루 8대가 주디의 집으로 돌진했다. 마녀들의 모자에는 눈알만한 사이렌이 붙어있었다. 번쩍이는 사이렌 속에서 그들은 음성증폭 마법으로 대화했다.

 

학생 주디의 집이 나타났다. 포위하라.”

 

학생 주디. 당장 나오시오.”

 

주디는 잠에서 막 깨어 정신이 없었지만 곧 마녀협회에서 사찰이 나온 것을 눈치챘다. 몸이 굳었다. 그들이 이렇게 집을 포위할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주디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검은 옷을 겨우 갖춰입고 뾰족모자도 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씻지도 못해서 얼굴은 꾀죄죄하고 부스스했다.

 

학생 주디. 마녀가 개를 기른다는 소식을 들었네. 나오게. 집 안을 조사해보겠네.”

 

? 아니에요!”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져있었다. 주디는 황급히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마녀경찰들은 주디를 막아섰다.

 

마녀전서 18! 마녀는 고양이를 기르며 개를 기르지 아니한다!”

 

주디는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정말로 개를 기르고 있다면 마녀시험에서 불이익을 받을 각오를 해야할 걸세!"

 

마녀경찰은 위압적으로 주디를 다그쳤다.

 

“1구역, 없습니다!”

 

“2구역, 없습니다!”

 

“3구역!”

 

토르는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주디는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 끝이었다.

 

없습니다!”

 

없어? 헛소문인가?”

 

헛소문, 딸꾹, 이라구요!”

 

주디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외쳤다.

 

마녀는 울지 않는다! 뚝 그치지 못하겠나!”

 

경찰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허위신고인가! 심술궂은 게 모범생의 짓이군. 주디도 이런 행동을 본받도록. 그럼 다시 되돌아가자!”

 

별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마녀경찰들은 다시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렸다. 주디는 딸꾹질을 하며 계속 울었다. 발견하지 못했다니, 토르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 때였다. 주디의 바로 앞에서 투명마법을 풀고 누군가가 토르의 목끈을 잡고 나타났다. 카르텔이었다. 마녀경찰도 속여버릴 정도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그녀는 말을 고르는 듯이 한참을 생각하고 있다가 말했다.

 

개는 기르지 않는 게 좋겠어.”

 

에디야와 소야는?”

 

여기 없어.”

 

불러줘.”

 

카르텔은 주디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그 둘에게 텔레파시 마법을 보냈다.

 

불렀어.”

 

네가 신고했어?”

 

……말해줄 수 없어.”

 

누구의 짓일까. 마녀로서는 모범생인 카르텔은 개를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주디도 모르게 개를 숨겨놓았다. 카르텔이 주디의 규칙위반에 본때를 보여주려고 신고한 것일까. 어제 맨 처음 집에 도착한 에디야일까? 소야가 들어왔을 때 개가 짖는 소리는 가장 크게 났고 소야는 심지어 개가 짖는 소리냐고 구체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분명히 셋 중에 하나였다. 개를 신고한 것은.

 

무슨 일이야? 카르텔.”

 

소야가 어쩐 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주디의 집으로 빗자루를 타고 달려왔다. 10여 분쯤 지나고 나서 에디야도 도착했다.

 

주디는 불신의 눈으로 세 명을 보았다. 셋 중에 누구일까.

 

하지만 미리 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디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모아두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개를 기르고 있어.”

 

소야와 에디야는 깜짝 놀랐다. 그 태도를 보면 그들은 몰랐던 것같다.

 

경찰이 왔었어. 나는 마녀시험을 합격하고 나서 계속 토르와 함께 할 거야. 마녀로서 아름답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토르와 함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했고 서로 의지하고 있어. 너희들에게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너희들에게 나는 모든 걸 다 말했어. 모든 걸 말한 이유는…… 너희 중 한 명 이상이 신고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말하게 되면 이젠 달라. 나는 내가 스스로 말한 거야. 너희를 원망하고 싶지 않아.”

 

주디, 개는 빗자루에 태우지 못한다고!”

 

소야가 말했다.

 

개라니.”

 

카르텔이 중얼거린다.

 

그래도 너희들이 친구인 것처럼 토르도 친구니까!”

 

주디가 외쳤다.

 

그 때였다.

 

에디야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왜 울어?”

 

주디가 에디야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 미안해. 주디. 내가 신고했어.”

 

에디야!”

 

네가 개를 기르지 않았으면 했어.”

 

주디는 에디야를 껴안았다.

 

다른 마녀들과 다른 삶이지만 이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에디야. 이해해줄 수 없겠지만.”

 

아니야! 사실 나는 네가 성적이 잘 나오는 게 싫었어! 미안해! 주디.”

 

짝짝짝, 그 때 박수소리가 들렸다. 카르텔의 박수였다. 카르텔은 진주반지를 들고 있었다. 에디야의 진주반지였다.

 

개가 이걸 물고 있었어. 에디야가 고백해줘서 다행이야.”

 

주디는 며칠 후 마녀시험에서 당당하게 합격했다. 모두가 합격했지만 외진 곳에서 혼자 사는 건 주디뿐이다.

 

괜찮겠어?”

 

종종 너희가 사는 곳으로도 놀러올게.”

 

소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의자에 앉아있던 에디야는 며칠을 계속 울었는지 얼굴이 부어있었다. 카르텔은 졸업식때 태도우수상을 받았다. 주디는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마녀자격증도 땄으니 이사준비를 할 셈이었다. 집 안에서는 토르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주디를 맞이했다. 주디는 토르에게 속삭였다.

 

우수한 마녀가 될 수는 없지만 좋은 마녀가 될 거야!”

 


누렁이와 함께 브릿G에서 무술년 단편 이벤트로 응모했었던 소설입니다. 

예전소설이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장르소설인 만큼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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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렁이

 

                                                                     강복주 

 

 

이제 1년만 지나면 사람이 된다. 그 것은 이 집에 사는 개들의 희망이었다.

 

누렁이는 덩치 큰 개였다. 그는 사람 키만한 낮은 담장에 작게 뚫린 개구멍으로 낑낑거리며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개구멍은 도시에서 내려온 말티즈나 빠져나가라고 만들어놓은 것처럼 누렁이의 체구에는 영 걸맞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탈출하려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어디 가냐?”

 

누렁이의 뒤에서 누렁이와 비슷한 체구의 점박이가 쯧쯧 혀를 차며 누렁이에게 물었다. 개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놀랍게도 그 것은 사람의 말이었다.

 

개구멍은 왜 이렇게 좁은 거야!”

 

점박이에 이어 누렁이가 외쳤다.

 

쯧쯧, 묵언수행하라고 신신당부받았는데. 넌 걸리면 죽었다.”

 

네가 먼저 말했잖아!”

 

그러니까 어디 가냐구.”

 

점박이는 누렁이의 꼬리를 물고 잡아당겼다. 누렁이는 버둥거렸다.

 

이거 놔! 난 가야겠어!”

 

누렁이의 사투는 결국 개구멍에 얼굴이 낑겨 오도가도 못하는 것으로 끝났다. 난 갈거야!를 울부짖는 누렁이는 점박이가 질질 끌고 나왔다.

 

그러니까 천천히- 말해봐. 진정하고. 친구야.”

 

점박이는 친절하게도 수돗물이 나오는 구석으로 가서 물도 한 바가지 떠왔다. 누렁이는 거진 앓아누워있었다.

 

할아버지에게 걸리지 않게…… 주인아저씨를 보러 가야 해.”

 

또 그 소리냐? 그 주인아저씨라는 게 너 어릴 때 실종됐을 때 구해줬다던 사람 말이지? 그 사람은 이제 행방도 모를텐데 잊어!”

 

주인아저씨가 내 꿈에 나왔어. 찾아가 봐야해.”

 

꿈 깨. 우리 할아버지는 절대 허락해주시지 않을테니까. 너는 그냥 개가 아니야. 개신의 자손인 개족의 후손이란 말이야. 정신차려.”

 

점박이가 말하는 개신이란 무엇인가? 그 것은 고조선부터 이어온 개신령의 핏줄이었다. 웅녀는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포기를 했지만 그 와중에 개신령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개신령은 도저히 쑥과 마늘을 먹을 수가 없어서 육십갑자가 되기까지 개의 몸으로 수련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손이 누렁이와 점박이였다.

 

점박이는 시골의 가문에서 평온하게 60갑자의 세월을 거진 나고 있었지만 누렁이는 40갑자를 좀 넘어섰을 때 가문의 주인인 할아버지 -흔히 개신령님이라고 불렸다-과 다투고 가출을 했다. 그 때, 누렁이는 집을 나선지 얼마되지 않아 개장수에게 잡혀갔다. 그 때 개장수가 몽둥이로 누렁이를 때리는 장면을 본 어떤 아저씨가 개장수와 말다툼을 하다가 누렁이를 사갔다. 누렁이는 그 집에 1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개신령이 누렁이를 다시 되찾아 오면서 그 아저씨와는 이별을 했다. 그 아저씨는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점박이가 누렁이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인간이 되어서 세상 밖에 나갈 수 있잖아. 조금만 참아.”

 

점박이는 누렁이를 달랬다.

 

그땐 늦어. 아저씨가 내 꿈에 나왔단 말이야. 위험한 상황이었어. 집에 험상궂은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우리가 영기가 센 건 너도 알잖아? 이건 분명히 급한 일이야.”

 

, 좋아.”

 

점박이는 앞다리를 누렁이의 어깨에 올렸다.

 

네 덩치에 개구멍으로 들낙거리는 건 무리야. 그건 네가 아주 어릴 때 가출했던 개구멍이잖아? 내가 비상상황을 알리는 짖는 소리를 낼테니 그 동안 도망치거라.”

 

……. 혼날텐데…….”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점박이는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달빛이 거무스름히 비치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 속의 집은 구름이 끼여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 때 늑대의 음성이라기엔 부족한 개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아우우!……아우우!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 대궐같은 집은 그 개소리에 소란이 일었다. 수십마리의 개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집합했다.

 

무슨 비상사태냐!”

 

그 중 하나만이 사람이었다. 현대식에 맞게 짧은 머리였지만 푸른 한복을 입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눈매를 가진 할아버지였다. 겁 없이 소리를 질러댄 점박이였지만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저기 그게…….”

 

이 울음소리는 우리 일족의 생명이 위험할 때만 알리는 것이다! 장난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걸린다. 점박이는 예감했다. 할아버지를 속일 수는 없었다. 누렁이는 어디까지 갔지?

 

에라 모르겠다. 걸리면 내가 죽는다.

 

누렁이가 없어졌습니다!”

 

점박이는 고함을 쳤다.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엉엉 우는 시늉도 했다.

 

“10년 간은 조용히 머물러 있더니!”

 

개신령은 노하여 소리쳤다.

 

그 놈은 덜 되어먹었어! 점박이는 그 놈을 잡아오너라!”

 

? 저요?”

 

당장 가거라! 멀리 가진 않았을 게다!”

 

점박이는 당황했지만 호령에 눌려 냅다 알겠습니다!를 뱉어내었다. 그러나 누렁이는 그 새 점박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나간 듯했다. 어둠이 물든 산을 밤새도록 뒤졌으나 누렁이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점박이는 결국 쫓겨나다시피 보자기를 목에다 둘러매고 길을 나섰다. 누렁이를 찾아야만 했다. 점박이는 푹 한숨을 쉬었다.

 

동이 터올 때쯤에 누렁이는 네온사인 불빛을 등에 얹고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집과는 달랐다. 매연에 숨이 막힐 것같았다. 누렁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나온 도시는 낯설었다. 많이 변했지만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누렁이는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도 복잡해서 알 수 없었다. 꿈에 나왔던 장소가 어디였지?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그 때 골목에서 껄렁한 사람하나가 번쩍이는 양복을 입고 골목에서 건들건들 나왔다. 꿈에서 보았던 사람이었다. 누렁이는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통화중이었다.

 

, 형님. 잘 되어갑니다. 이제 그 노망난 할배도 죽었답니다.”

 

그는 허름한 집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누렁이는 발소리를 죽이며 그를 뒤따라갔다. 그는 문을 열었다.

 

이제 아가씨 혼자 빚은 못갚죠. 몸뚱아리라도 내어놓아야지요. 안 그래요?”

 

녹이 슬어있는 대문을 열자 깨진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약올리듯이 말꼬리를 올렸다.

 

어이쿠 아가씨가 대답을 안하네.”

 

누렁이는 동그란 눈에 입을 앙다문 여자를 보았다. 단발머리에 턱선이 얇았지만 역시 주인아저씨와 닮아있다. 누렁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건들거리는 남자에게 돌진했다. 그는 번개같이 달려드는 누렁이를 팔로 막았지만 누렁이는 팔도 와앙 물어뜯었다.

 

둘 다 놀란 틈을 타서 누렁이는 건달의 뱃살도 와앙 물어주었다. 은밀한 곳을 물린 건달은 더듬더듬 뒤로 물러났고 누렁이가 다시 한 번 이를 드러내자 대문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 너는…….”

 

누렁이는 움찔하다가 이내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누구니?”

 

여자는 가만히 누렁이를 보다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 답례로 먹을 걸 줄게.”

 

누렁이는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 먹이로는 닭가슴살을 찢은 게 나왔다. 마침 가출도 한 터라 누렁이는 몹시 배가 고팠다. 누렁이가 먹이를 먹기 시작하자 여자가 중얼거렸다.

 

또 올텐데…… 그 사람……. 그래도 할아버지 장례식은 잘 치러야 되는데.”

 

누렁이는 먹다말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냐. 계속 먹어.”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혼잣말을 했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돈을 쓸 데가 많았거든. 그래도 사채만은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돈 나올 데가 아무 데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그러고 보니까 할아버지가 예전에 개를 키우셨다는데 너만큼 큰 개였대. 그런데 그 개도 도망갔대. 할아버지 인생은 항상 그랬어. 복도 없으시지.”

 

누렁이는 먹는 게 얹힐 것같았다. 하지만 계속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무엇일까? 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꿈에 나온 거구나.

 

개가 음식을 남기는 건 처음 보는데. 배가 안 고파?”

 

누렁이가 멀뚱히 있자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창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누렁이는 저녁까지 계속 여자의 옆에 있었다. 여자는 종종 누렁이에게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보는 몇 가지로 정리되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여자를 돕는 가족이나 친척은 없었다. 찾아오는 것은 사채업자다. 빚은 300만원이 있다.

 

누렁이는 여자가 잠든 새에 편지를 쓰고 자신의 목에 둘렀다. 적힌 말은,

 

저를 파세요. 저는 품종이 진돗개이며 가격이 300만원입니다?”

 

다음날 그 것을 본 여자는 기함을 했다.

 

어느 못된 놈이 이런 장난을!”

 

장난이 아니야!’

 

누렁이는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낑낑거릴 뿐이었다. 여자는 그런 누렁이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꼭 껴안아주었다.

 

누렁이는 다음 날, 밤새 뒤척였다. 이대로는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말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람 사이의 일은 사람이 되어 해결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일이지만 60갑자를 나기 전에 사람이 되어버리면 평생 반은 개요, 반은 사람으로 살아야한다. 문제견으로 60갑자를 살아왔다. 그 것도 이제 거의 다 되었다. 1년만 더 기다리면 무사히 사람이 된다. 하지만 개신령님이 언제 자신을 잡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또 의미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라지기는 싫었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누렁이는 결심했다.

 

누렁아~ 누렁아?”

 

어느새 자신을 누렁이로 부르기 시작한 여자-이름은 연지라고 했다-는 작은 마당으로 나왔다가 한 청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샛노란 색으로 염색한 청년은 그 머리색에 짓눌리지 않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선의 얼굴로 웃음 짓고 있었다.

 

누렁이의 주인입니다. 그 쪽지 보셨나요?”

 

당신이 그 파렴치한인가요!”

 

개를 파는 게 왜 파렴치한인가요? 게다가 제 개인데요. 팔아서 빚을 갚으세요.”

 

당신에게 제 사정을 말한 적도 없는데,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요!”

 

제가 돕고 싶습니다.”

 

당당한 누렁이의 말에 연지는 할 말을 잃었다. 때마침 그저께 배를 물었던 남자가 건들거리며 대문 앞을 꽝꽝 차댔다. 누렁이는 호기롭게 대문을 열었다.

 

넌 또 누구야?”

 

진돗개를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갚은 걸로 하죠.”

 

개는 취급 안 해! 현금을 내놔.”

 

예상 밖이었다. 누렁이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 걸로 갚은 걸로 해!”

 

이게!”

 

건달의 주먹이 누렁이로 향한 참이었다. 그의 뱃살을 날쌔게 무는 한 개가 있었다.

 

아악!”

 

건달은 비명을 질렀다. 그 정체는 점박이였다. 점박이가 누렁이를 보며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그러다 착지를 하자 정신을 차린 듯이 누렁이에게로 내달려갔다. 건달은,

 

개새끼들! 두고보자!”

 

를 외치며 퇴각했다.

 

너 왜 인간이 된 거야?”

 

점박이는 물었다.

 

넌 어떻게 날 쫓아온 거야? 역시 다 일러바쳤지!”

 

야야, 나도 맞았어. 눈에 멍든 거 안 보이냐?”

 

원래 눈에 있는 점이잖아!”

 

, 나도 살아야 하잖아……. 그나저나 아저씨는?”

 

이미 돌아가셨어. 아 참!”

 

누렁이는 황급히 연지 쪽을 보았다. 연지는 털썩 주저 앉아있었다.

 

개가 말을 하다니!”

 

으으…….”

 

결국 점박이와 누렁이는 꿇어앉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연지는 의외로 쉽게 납득을 했다. 이미 두 눈으로 본 터라 설명이 길지 않아도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그럼 널 팔려고 했던 거잖아. 팔려 가면 어쩌려고 했어?”

 

연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려구.”

 

누렁이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태연하게 대답했다. 점박이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누렁아. 이제 어떡할거야? 나는 노잣돈도 얼마 없고 어떻게 돈 갚을 건데? 개는 안 받는다잖아. 그리고 넌 돌아가면 반 죽음이야.”

 

나한테 생각이 있어.”

 

연지가 말했다. 누렁이와 점박이의 얼굴이 동시에 연지에게로 돌아갔다.

 

누렁이가 팔려간댔지? 그건 내 소유를 거쳐간다는 얘기지? 돕는 김에 내 꺼해.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면 돈은 한 달 안에 다 갚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인간으로 변했으니까 돌아가지 말고 버텨보자. 아르바이트만 우리 둘이 뛰어도 갚을 수 있어. 혼자 아르바이트하면 빚이 계속 불어나서 문제였지. 집에 와서 자꾸 깽판 놓고.”

 

그럼 나 여기서 살아도 돼?”

 

같이 산다고? 안 돼! 누렁이는 그래도 인간에 속하는데다가 수컷이고 안 돼!”

 

점박이가 울부짖었다.

 

그거라면 괜찮아. 난 누렁이가 꽤 마음에 드니까.”

 

연지가 씨익 웃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누렁이가 말했다. 연지와 누렁이는 만족한 듯이 서로를 보았지만 점박이는 경악했다. 이대로 개신령님에게 돌아간다면 혼나는 것은 틀림없이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지와 누렁이는 이미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연지는 누렁이의 등에 기대어 웃었고 누렁이는 얼굴을 붉힌 채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브릿G에 올렸었던 단편입니다. 뒤에 올릴 개를 기르는 마녀도 함께 올렸었는데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장르소설로 쓴 만큼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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