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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바닥을 보았다. 손 언덕에 작게 지져진 흔적이 있었다. 나는 선우의 흔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꼭 감아쥐었다.

 

“블루헤드 우주선으로 갈 건데, 같이 갈 건가? 히어로들.”

 

카모스가 물었다.

 

“가서 어쩌려고?”

 

“길티모어를 포로로 잡아서 인질로 주고 지구와 무역을 하려고 한다. 난 지구의 음식이 마음에 들었어. 파괴하고 싶지 않군.”

 

“넌 누군데?”

 

수선화가 물었다.

 

“카모스.”

 

“네가 바로……!”

 

수선화도 놀란 표정이다.

 

“우리 팀을 일단 부르겠어.”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불러라. 나 혼자라도 상관없으니까. 크하하핫!”

 

우리는 카모스의 뒤를 바로 따라붙었다. 카모스는 칼을 꺼내 들었다. 카모스의 모습을 보자 블루헤드의 우주선으로 향하는 동안 비켜서는 블루헤드가 대부분이었다.

 

용감하게 카모스를 막아서는 블루헤드가 있었다. 몬스터 대장 겔무가 채찍을 들고 카모스를 막아섰다. 우주선의 입구였다.

 

“멈추십시오. 카모스님!”

 

“비켜라. 사령관, 길티모어를 보겠다.”

 

“히어로들과 함께라니요!”

 

“그럼 나 혼자 들어가겠다.”

 

겔무의 뒤로 거대한 해골 갑옷을 입은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저 사람이 바로 길티모어인가?

 

“길티모어. 왜 나를 죽이려고 했지?”

 

카모스가 물었다.

 

“힘을 회복하셨습니까?”

 

“인정하는 바이냐?”

 

“지구침공에 맡은 바 책무를 다했을 뿐, 태자님께서 철이 없으셔서.”

 

나는 길티모어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선우의 레이저를 쏘아버렸다. 기습공격에 길티모어는 가슴을 잡고 꿇어앉았다. 그 틈을 타 수선화는 칼로 우주선 천장을 살짝 가르더니 아예 찢어버렸다. 카모스는 훗, 웃었다.

 

“우주선을 추락시키면 안 되는데 말이지.”

 

그러나 기우뚱 우주선이 기울고 있었다. 우리는 추락하는 우주선에서 빠져나왔다. 우주선은 서서히 가라앉다가 점점 빠르게 논밭에 떨어져 부서졌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잔해에 서 있었다. 카모스는 길티모어를 끄집어냈다. 환상대장 겔티가 짧은 다리로 무릎을 꿇었다.

 

“제 동생 겔무는 제발 살려주십시오. 카모스님.”

 

“그렇게 할 작정이다. 길티모어에게 환상빔이나 좀 쬐어주어라.”

 

환상대장은 봉을 휘둘러 길티모어에게 음파모양의 빔을 쏘았다. 우리는 멍하니 지평선 너머를 보고 있었다. 산들로 가로막혀 있지만 저 멀리서 트럭 몇 대가 부리나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트럭보다 먼저 선우와 이찬이 날아왔다.

 

“카모스!”

 

선우는 바로 카모스를 알아보았다.

 

“협회장을 불러오겠나? 정전을 청하고 싶군. 우리는 퇴각한다.”

 

“왜지?”

 

“……지구의 음식이 좋아서.”

 

“그게 아닐 텐데?”

 

선우는 바닥에 서서 카모스의 이마를 노려보았다.

 

“역시, 각인인가?”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라. 그래도 내 미래 아내의 땅이 될 곳이니 존중해야겠지.”

 

“그녀는 네 아내가 될 생각이 없어!”

 

“훗.”

 

카모스는 웃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곧 협회장도 소환이 되었고 카모스는 메스컴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대통령과 만찬까지 열었다.

 

특수 감옥을 제작하여 길티모어가 인질로 잡혔고 그 대가로 우주선은 식자재를 가득 실었다. 수선화가 메인 우주선을 찢어버렸는데, 그 건 선우가 복구했다. 선우의 능력은 신기했다. 우주선을 붙잡고 ‘시간여행’을 시전하자 우주선이 옛날 모양으로 돌아왔다.

 

이찬 오빠는 외계인에게 선물로 줄 거대한 우주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악감정도 많았지만 어쨌든 수십 년의 긴 전쟁 끝에 화해를 청하게 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나는 가끔 기운이 빠져 힘이 없었지만 쓰러질 그것 같은 일은 잦지 않았다. 내 문제는 뿔의 영향력도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여전히 해영 아줌마와 만나고 계셨고 우리는 가끔 집에 오갔지만 돌아오라는 말은 없으셨다. 가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셨다. 뽀삐는 이제 내가 낯선지 가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유명인이 되었다. 정서리 선배가 칼럼을 쓴 게 대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카모스의 뿔에 당한 히어로가 정전의 이유가 되었다’라는 글이었다.

 

뿔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주목을 받을 일은 많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히어로들은 모두 정렬해서 카모스를 배웅했다. 카모스는 이내, 훗, 하는 웃음과 함께 우주선에 탑승했다. 나도 정렬해 있었다.

 

우주선이 출발하자 온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뒤꽁무니에 빛나는 붉은 빛이 인상적인 거대 우주선은 소음도 없이 산뜻하게 떠서 출발했다.

 

어쩐지 허탈감도 밀려온다. 정말 끝인가?

 

태어날 때부터 전쟁은 시작되어 있었는데.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이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거였단 말인가?

 

행사가 끝나고 선우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보고 싶어.”

 

“나도 일렉트로닉 걸은 항상 보고 싶다. 몸은 괜찮아?”

 

“3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묻네.”

 

“네 마음 돌보는 게 먼저니까.”

 

“카모스는 다시 올까?”

 

“다시 오겠지. 너를 보러.”

 

“나를 보러? 왜?”

 

“블루헤드 일족은 자신이 처음 입술을 맞댄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한대.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고 하더라.”

 

“…….”

 

나는 경직되었다.

 

“그런데 그건 그쪽 생각이고.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거든.”

 

나는 말문이 막혔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시간여행을 해서 카모스가 우리 엄마를 해쳤는지 알고 싶어.”

 

“갈 필요 없어. 무리가 많이 되는 능력이고, 카모스가 맞아.”

 

“뭐?”

 

“……내가 가봤어. 일렉트로닉 걸은 미친 카모스의 손에 돌아가셨어.”

 

“그럼, 내가…… 엄마의 원수랑.”

 

나는 골이 띵했다.

 

“일렉트로닉 걸은 지금 상황을 장하다고 하실 거야. 너는 어쨌든 그런 우호적인 감정으로 전쟁을 막은 거야.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너는 분명, 히어로의 딸이야.”

 

“날 왜 그렇게 히어로로 만들고 싶어 한 거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힘든 일이지만, 일렉트로닉 걸도 그러길 바라셨어.”

 

“그래.”

 

“카모스의 일은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카모스는 사라졌지만 이 집에서 살아.”

 

선우는 가끔 나를 당황시킨다. 하지만 나도 싫지 않아서 대답했다.

 

“응.”

 

“그래.”

 

“근데 왜 2층에 안 올라오는 거야?”

 

“……사고 칠까 봐.”

 

“뭐?”

 

“아 됐어. 됐고, 정서리 선배가 계속 수선화가 누구 좋아하냐고 묻는데 넌 아는 거 없어?”

 

“그러게. 누굴까? 후보는 있는데.”

 

아무래도 정서리 선배에게 전달하는 것이니 되도록 확실했으면 좋겠다. 말 안 해주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학교에 가자마자 수선화에게 물어보았다.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야?”

 

“일렉트로닉 걸.”

 

“농담하지 말고.”

 

“진짠데. 그래서 너도 아저씨도 싫은 거야. 우리 일렉트로닉 걸 고생시켜서.”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농담이야. 믿었냐? 거짓말은 아니긴 하지만.”

 

농담을 이렇게 살 떨리게 해도 되는 건가. 역시 수선화다.

 

“좋아하는 사람? 있긴 하지만 아직 그냥 인간적인 호기심일 뿐일걸. 이찬오빠는 네게 호의적이니까. 그래도 중요한 건 히어로로서 일하는 거지. 사랑은 됐어. 이번엔 네 몸을 던져 카모스를 쫓아 보냈으니 인정해줄게.”

 

“고맙다.”

 

“아, 서리 선배한테 말하지 마.”

 

나는 뜨끔했다. 비밀을 지켜야겠다.

 

“알았어.”

 

서리 선배도 무서웠는데 지금은 편해져서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된다.

그래도 하나는 안 것 같다. 나는 나만 생각했었는데, 도움을 주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

히어로학과 1학년, 이소라. 오늘은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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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너무 큰 일이 되어버렸지만.”

 

아마 선우가 있어서 그런 제안도 들어왔을 것 같지만 커다란 일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교수님도 오셨겠지. 아무리 선우가 뒤에 버티고 있다고 해도 잘할 수 있을지는 걱정이 된다. 나는 말 없이 먹었다. 이렇게 큰일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도 연어가 싱싱해서 그런지 맛있었다.

 

“출범식은 일주일 뒤야.”

 

“그렇구나.”

 

“괜찮겠어?”

 

“해보는 거지 뭐.”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마음이 씩씩하지 않아도 씩씩해야만 할 것 같다.

 

“선우도 있는데, 뭐.”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우리는 활동정지 명령을 받았으니까 별다르게 할 일도 없었다. 모처럼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다. 2층에는 빔 프로젝트가 있어 마음껏 영화를 보았다. 어느새 내 집처럼 선우에게 오라고 초대도 하였지만 선우는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튼 냉정한 녀석이다.

 

이윽고 일주일이 넘게 지나 월요일. 선우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아홉 시까지 강당으로 가야 해!”

 

나는 비몽사몽으로 일어나 준비를 했다. 준비랄 것도 없긴 했지만 처음으로 정장을 입었다. 행사는 처음이었다. 어떤 행사일까?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우리는 히어로카에 탔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 차들이 몹시 많았다. 그 중에는 방송국 차량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우리 차가 등장하자마자 플래쉬세례가 터졌다. 나는 그 불빛을 마주하는 순간, 조금 숨이 막혔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음주 변신에도 여론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불이 번진 것을 막았기 때문에 치기 어린 정의감 정도로 보고 있는 듯했다. 환호성을 보면 그랬다.

 

나는 카메라가 모여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밑에는 네모난 빨간 카펫이 깔려있었고 그 자리에는 이미 수선화와 이찬 오빠가 와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처음 본 히어로 협회장과 교수님도 있었다. 선우가 팔을 밀어 자리를 잡아주었다.

 

“네, 음, 이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정의감이 넘치는 학생 4명을 뽑아 선봉대로 삼으려고 합니다. 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음주 비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수님은, 음, 음만 반복하고 계셨다. 나는 숨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버텨야 한다. 이렇게 큰 무대에서 쓰러지면 안 된다.

 

“도둑이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데 저 멀리서 정서리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당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카모스의 얼굴도 보이는 듯하다. 나는 괴로웠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심장이 찢기는 듯해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플래시는 자비 없이 터지고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그 화려한 불빛 속에서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눈을 뜨자 차가운 하얀색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뭔가 소란스럽다.

 

“안됩니다!”

 

“자네는 이 일을 숨겼나? 처벌을 면치 못할 걸세!”

 

“이렇게 될 것을 알고도 어떻게 숨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건 생체실험 아닙니까!”

 

선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선우가 이렇게 목소리가 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협회장과 같이 있던 국가정보처 사람들이 선우의 양손을 잡고 있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지? 이 애도 히어로야! 이 정도 희생도 못 하고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치료를 목적으로 해주십시오!”

 

“뿔의 힘은, 블루헤드를 없애는 데에 유용할 걸세. 그녀도 긍지를 가질 걸세.”

 

나는 어수선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들켰구나, 뿔. 그냥 죽어갈 줄 알았는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찬오빠도 수선화도 오지 못하게 사람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저 멀리서 초조해 보이는 사람들의 눈빛이 여기까지 다가온다. 다들 걱정해주고 있다.

 

-키키키키

 

그때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환상대장 겔티.

 

“감히! 협회장 앞에서!”

 

그는 분노로 수염을 떨었다.

 

“변신하게. 나도 변신할 테니.”

 

나는 어느새 슈트도 없다. 히어로시계가 없었다. 수선화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병실을 많이 부숴놔. 네가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나 슈트가 없어.”

 

“……그렇군. 걱정 마. 우리가 있잖아.”

 

곧 환상대장의 일루젼이 펼쳐졌다. 그 일루젼을 틈타 수선화는 여기저기 많이도 부숴놓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내려앉았다.

 

이찬 오빠는 선우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듣더니 튼튼한 끈을 만들었다.

 

일루젼은 곧 멈추었다. 환상대장은 어느새 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선우가 단단히 끈을 묶어놓고 있었다.

 

“놔라! 놔!”

 

“드디어 간부 한 명 잡았군……. 영리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선우가 중얼거렸다.

 

“수고했네.”

 

협회장이 말했다.

 

“그러나 뿔의 성분분석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네. 받아주게.”

 

“병실이 다 부서져서 이 병원은 무리인 것 같네요.”

 

수선화가 말했다.

 

“병원은 많아.”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병원에는 나뿐인 듯했다. 그리고 도심에서 꽤 떨어진 병원이었다. 요즘 같은 아픈 사람이 넘치는 시대에 이런 병원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들은 또 다른 병원을 찾아 데려갔다. 폐병원과 일반병원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시설이다. 스산했다.

 

환상대장은 버둥거리지도 않고 묶여 있었다. 그들은 환상대장을 옮기기 위해 서울로 떠났고 나는 혼자 남았다.

 

선우가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선우도 데려갔다.

 

“곧, 다시 올게.”

 

선우는 그렇게 말하고 내려갔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의료진과 내가 남았다.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기한 것은 사람들의 말로 인한 충격보다는 덜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은 다른 것 같다.

 

밤이 되자 나는 나풀거리는 커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전혀 졸리지 않았다.

 

밖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달빛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키가 큰 괴한이 훌쩍 뛰어올라 침대 곁에 섰다.

 

“이렇게 됐는데도 싫으냐?”

 

나는 그림자를 보고도 짐작은 했지만,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카모스였다.

 

“싫어.”

 

나는 확신이 채 들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카모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는 거절한 거다. 이건 나의 선택이다. 피해자여.”

 

카모스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검은 아우라가 카모스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키키키키

 

기절할 것 같았을 때, 환상대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붙잡혔을 텐데, 어떻게! 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부여잡고 카모스의 손을 잡았다.

 

“지구에 쳐들어올 작정이야?”

 

“그보다는…… 내 부하를 벌할 작정인데.”

 

특유의 미치광이 같은 미소가 번뜩였다. 카모스는 훌쩍 창밖에 뛰어내렸다. 나는 급히 카모스의 뒤를 쫓았다. 비틀거렸지만 창문 정도는 아직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수선화와 환상대장이다.

 

-키키키키, 일루젼!

 

우리 앞의 세상은 깨끗하고 똑같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를 일루젼한 거지?”

 

“병실을 네가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어제 본 환상 대장은 이미저리로 구현된 가짜였다.”

 

“수선화는?”

 

나는 수선화를 보았다.

 

“나는 그냥 원래부터 여기 있었어. 접때 봤던 외국부대 아저씨? 감모손이랬던가. 아니야?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어쨌든 난 이거 주려고 기다렸어. 받아.”

 

히어로 시계였다. 별다른 능력은 없었지만 반가웠다. 지직거리며 뜨는 능력 목록에 새로운 게 있었다.

 

레이저 위력 A 속성:화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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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스는 대답이 없었다. 치이익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를 알고 있어?”

 

역시 대답이 없다.

 

블루헤드가 쳐들어왔을 때, 히어로도 처음 만들어졌으니까 분명 카모스는 우리 엄마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싸웠을 수도 있다.

 

카모스는 대답이 없다가 한참 후에 돼지 목살 스테이크를 내어놓았다.

 

“먹고 가라.”

 

아침부터 스테이크라니.

 

“이런 거로 나를 설득시키려고 할 생각하지 마.”

 

“네 엄마가 누군데?”

 

역시 듣고 있기는 듣고 있었나 보다.

 

“일렉트로닉 걸.”

 

“흠, 누구지?”

 

“활동사진도 있어.”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의 사진은 따로 폴더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힐끗 보던 카모스는 다시 부엌에 들어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길한 직감이 스쳤다. 카모스는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말해줘. 엄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카모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엌 쪽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너는 나에게 뽀뽀해야만 할 거야.”

 

“그러지 않겠어. 나도 히어로야.”

 

“일단, 많이 먹어라.”

 

나는 접시를 눈앞에 놓고 턱을 괴었다. 음식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이야기도 할 만큼 했으니 슬슬 일어서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유리문에 똑똑, 두드리는 진동이 울렸다. 나는 앞을 보고서는 화들짝 놀랐다. 카메라 렌즈가 들이대져 있었다. 그 밑으로 사람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이소라!”

 

“……서리 선배?”

 

그 얼굴은 정서리 선배였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탁자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맛있겠네!”

 

“……드셔도 돼요.”

 

“그래? 새벽부터 대기조라 배고팠는데. 여기서 아침식사 하는 거야?”

 

“설마요.”

 

“뭐야. 뭐야.”

 

서리 선배는 흘끔 주방 쪽을 보았다. 카모스는 키가 커서 여기서도 뭘 행동하는지 훤히 보였다. 서리 선배는 손으로 입의 측면을 가리고 속삭였다.

 

“이색 외계인 식당?”

 

“그런 셈이죠.”

 

“그래. 조사결과는 어떻게 됐냐?”

 

“조사결과?”

 

“어허. 수선화 말이야. 역시 황금주먹을 좋아하는 거지?”

 

“아니래요.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대요.”

 

“누구?”

 

“그건 말 안 해주던데요.”

 

서리 선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캐봐야겠군.”

 

“……선배는 혹시 우리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요?”

 

“아, 일렉트로닉 걸?”

 

서리 선배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놓인 포크와 칼을 가져가서 썰기 시작했다. 몇 개는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별 기대 없이 서리 선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실 미안하긴 한데, 수선화 걔 때문에 너희 팀을 좀 파봤거든. 일렉트로닉 걸은 영웅이었어. 아마, 블루헤드와 싸우다가 사망했을 거야.”

 

나는 힐끗 카모스쪽을 보았다. 주방을 열심히 닦고 있다. 물어도 될까 싶었지만 확실히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모스도 그때 있었나요?”

 

“찾아볼게. 아마 그 시기에는 카모스가 꽤 자주 나왔을 텐데. 아, 아무튼 네 엄마는 놀랍지만, 알고 있던 사실이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

 

“뭔데요?”

 

“이찬 씨 어머니, 옛날에 활동했던 유명배우더라.”

 

“아…….”

 

왠지 아름다운 용모였다. 이찬오빠랑은 많이 닮지 않았지만.

 

“시집을 간 후엔 미디어에서 사라졌어. 흥미로워서 더 찾아봤는데 그 후에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했나 보더라고. 지금은 꽃집도 하고 안정을 좀 찾은 듯한데 며칠 전에 불이 나서. 그때 너희도 있었다며. 나도 따라붙는 건데. 기사를 막지는 못했겠지만. 활약했는데 안됐더라.”

 

“괜찮아요. 불이 번지는 건 막았으니까.”

 

“그렇구나. 어쨌든 앞으로 도울 수 있으면 도울게.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 말 정확하긴 정확한 거지?”

 

“수선화요? 네. 거짓말할 애는 아니니까요.”

 

“고마워~! 그리고 잘 먹었다!”

 

어느새 서리 선배는 목살 스테이크를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에너지가 대단하다.

 

나도 일어섰다. 카모스는 더 막아서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밖으로 나섰다. 외면하려야, 뿔을 지닌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죽으면, 뿔은 소멸할까?

 

집에 돌아가자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교수님이 집에 와 계셨다. 나는 움찔하고 돌아나가려고 했지만 돌아 나오는 교수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앞으로 고생하겠구나.”

 

그는 툭툭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의아했지만, 그의 뒷모습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선우가 다가왔다.

 

“어디 갔었어?”

 

“산책…….”

 

“조심해서 다녀. 히어로라지만 히어로니까 더더욱.”

 

“응. 교수님은 무슨 일이셔?”

 

“이번 음주 변신 건으로 우리 팀이 세간의 화제가 되어서. 들어와서 얘기하자. 밥은 먹었어?”

 

“아니. 안 먹었어. 아 참, 어제 연어 사뒀는데.”

 

카모스가 준 스테이크는 서리 선배에게 줬고 나는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 들어가서 프라이팬에 불을 올렸다. 선우는 뒤따라 들어와서 서성거리다가 냉장고를 열고 양상추를 꺼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나는 물었다.

 

“밥상부터 차리고 얘기하자. 샐러드 이렇게 만들면 되지?”

 

“응. 거기 아보카도도 있어.”

 

“이건……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기다려 봐봐~.”

 

선우가 귀여워서 한동안 보다가 나는 문득 다시 카모스에 관한 생각이 들었다. 선우에게 괜히 계속 미안하다. 카모스가 원하는 것은 일단 선택지에서 지우자. 그리고 생각도 지우자. 카모스의 말에 휘둘릴 수는 없다. 나는 열심히 굽고 썰었다. 그러나 생각이 복잡했던 탓인지 칼이 살짝 미끄러졌다.

 

“앗.”

 

“괜찮아?”

 

“괜찮아. 손톱이 살짝 잘렸어. 씻어낼게.”

 

“안 다쳤다니 다행이다.”

 

“응.”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연어 스테이크와 샐러드가 한 접시 나왔다. 연어는 꽤 많이 남아있었다.

 

“교수님이 왜 집에 오신 거야?”

 

그제야 질문이 튀어나왔다. 선우는 연어를 큼지막하게 잘라 입안으로 가져갔다.

 

“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우리 팀을 블루헤드와 대항하는 선봉장으로 삼겠대. 걱정은 되지만 히어로가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최선을 다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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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어?”

 

“응.”

 

“걸어갈까? 버스 말고.”

 

올 때도 학교까지 걸어왔다. 버스는 아무래도 선우에게는 지금 상황에서 무리일 것 같다.

 

“응. 가자.”

 

선우는 후아암, 하품을 했다. 나는 청소 5시간 쯤 했다고 등허리가 다 뻐근했다.

 

“실망하지는 않았어?”

 

선우가 묻는다. 나는 의아하게 선우를 보았다.

 

“뭘?”

 

“내가 후계자인 줄 알았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기지개를 켜다가 선우를 보며 물었다.

 

“너야말로 그래서 친절한 거야? 나한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흥…….”

 

선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기분 상한 거야?”

 

“됐네. 친절한 선우씨.”

 

“…….”

 

“나는 맨날 착각하고 있어. 바보가 된 기분이야.”

 

“뭘 착각했는데?”

 

“의무적으로 잘해주지 마.”

 

“아닌데, 그런 거.”

 

“아니면 뭔데? 네가 좀 싸가지는 없지만 착하니까 그런 거잖아.”

 

“양립할 수 있는 거냐? 그거.”

 

“양립할 수 있지! 불가능한 게 어딨어.”

 

“아니야.”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말을 꺼내지 말 걸 싶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쏘아붙이고 싶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예쁘니까 잘해주고 싶은 거지.”

 

“뭐?”

 

“네가 예쁘니까. 맞춰주기 까다로운데 맞추고 있잖아.”

 

선우도 조금 화난 것 같다.

 

“…….”

 

나는 말문을 잃었다. 사실 예쁘다는 말은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저히 농담으로 보이는 표정은 아니다. 우리는 말 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세상이 산란 되고 있고 넓은 빛 속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난 두려워.”

 

선우가 말했다.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을까. 이 말도 내게는 처음이다.

 

“내가 아버지처럼 될까 봐. 그래서 시간을 갖고 싶은 거야.”

 

“아버지가 어땠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은 무언가를 깨부수고 있는 모습이야. 폭력적이었고 기가 질릴 정도로 기가 세셨어.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접시를 깨고 소리를 지르고 그 접시를 일부러 밟아 피가 난다거나. 겁에 질려서 상대할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어린 나이에 힘들었겠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아버지의 모습보다도,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하잖아.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아. 내 꿈은 사실 히어로가 아니었어.”

 

히어로가 아닌 선우. 상상되지 않는다.

 

“네 꿈이 뭐였는데?”

 

“좋은 아빠가 되는 거.”

 

우리는 계속 걸었다. 나는 선우를 보았다. 어느 때보다도 눈의 그늘이 깊이 드리워져 있다.

 

“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조금 바뀌고 있어.”

 

“그래? 뭘로 바뀌었는지 궁금하지만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괜찮아.”

 

애써 생각한 말이 이게 전부였다. 나는 선우의 안색을 살폈다. 선우는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제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는 동안 세상은 점점 어두워졌고 나는 멍하니 걷다가 헉,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이 길로 걸으면 카모스가 일하는 커피숍이 나온다. 그러나 인제 와서 어쩔 수 없었다.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 흘러나오는 카페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카모스는 무려 바깥에 나와 있다. 향신료를 들고서.

 

“…….”

 

선우는 앞만 보고 가고 있었고, 계속해서 침묵이 흘렀다. 카모스는 아는 체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카모스는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한참 지나서야 나는 숨을 뱉었다.

 

“안 좋아?”

 

선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미안해.”

 

“뭐가?”

 

“성질내서.”

 

“너무 참는 것도 안 좋아. 까다롭다고는 했지만 괜찮아.”

 

“미안해.”

 

“대체 뭐가?”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모스에 관해서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이 미안하다. 그러나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신고도 못 한다고 했고.

 

우리는 들어가서 각자의 방에 올라갔다. 지치기도 했고 비밀을 들킬까 봐 부엌에서 대화하는 것은 좀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방에 올라가 블루헤드의 기운을 느꼈다. 몸속에 들어온 뿔 때문인지 가끔 식은땀이 날 때가 있었다. 그게 정신적인 문제인지, 뿔 때문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카모스는 블루헤드의 기운을 견디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

 

생각이 깊어지면 괴롭다. 나는 2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씻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야겠다.

 

활동정지 명령을 받아 운동장도 쓸 수 없게 되었고 선우의 헬스장을 이용하는 것도 일단 금지라 나는 아침에 조깅을 했다. 오늘은 주말이라 청소도 쉬는 날이다. 1층은 조용했다. 선우에게는 모처럼의 완벽한 쉬는 날이겠지.

 

가는 길에 오랜만에 집에 들러서 잠이 덜 깬 아빠와 뽀삐에게 인사도 했다. 다행히 집 안은 그럭저럭 정돈되어 있다.

 

가는 길에 카모스의 카페도 지나쳐가게 되었는데 나는 그냥 뛰었다.

 

그러나 앞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망토가 펄럭이며 가로막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아침부터 내가 보고 싶었나?”

 

“……네 녀석!”

 

“보고 싶었던 게 틀림없군. 커피나 한잔하고 가라.”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카모스는 현란한 스텝으로 막아섰다.

 

나는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선우에게 말을 못 하는 것도 억울한데, 카모스는 집요하다.

 

“우냐?”

 

“안 울어!”

 

카모스는 나를 집어 들었다. 내 후드를 집어 들자 나는 공중에 발이 살짝 떴다. 대롱대롱 매달렸지만,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카모스를 보았다.

 

“커피숍 안으로 안내해주지.”

 

카모스는 훗, 웃었다.

 

나는 결국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기왕 들어왔으니 물을 건 물어야겠다. 카모스는 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가려면 나갈 수 있었지만, 기왕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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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면서?”

 

“대피 못 한 사람들을 찾으면 될 것 같아.”

 

“알았어.”

 

나는 황급히 구석구석을 찾았다. 길을 잃은 아이는 가끔 있어서 줄지어 가는 어른들에게 같이 가주시길 부탁했지만 성인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3층까지 가서야 책상 밑에 앉아있는 여자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숨겨져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공포에 질린 듯이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계셨다. 이찬 오빠의 엄마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조심스레 업었다. 그분은 그러는 와중에도 거의 공황상태였다.

 

히어로 슈트 안에서 무선으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 감지는 3층에 한 분뿐이야. 빨리 나와.

 

불이 확 번지고 있었다. 꽃이 타고 있다. 입구 쪽에서도 나무가 확 쓰러져서 나가기가 여의치 않아 보였다.

 

나는 애써 창문을 열다가 급하게 깨뜨리고 뛰어내렸다. 비행은 심각한 문제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비틀거리며 비행하다가 착지했다. 선우가 뛰어왔다. 그리고 이찬오빠와 수선화도 있었다.

 

채찍 소리가 들렸다.

 

몬스터 대장 겔무!

 

우리는 그쪽을 노려보았다.

 

“화염몬스터 디스타! 어떠냐? 핫핫핫!”

 

그는 채찍을 연신 내려치며 웃었다. 하필 이럴 때.

 

프레쉬워터맨이 몬스터를 향해 물폭탄을 쏘았다. 나도 받은 능력으로 몬스터에게 물폭탄을 쏘았다. 소방대원들도 도착해 호스로 물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몬스터는 더욱더 타오르고 있었다. 연기만이 더 심하게 풀풀 날렸다.

 

수선화가 내 옆의 이찬오빠에게 말했다.

 

“문을 그려. 저 몬스터 옆으로 갈 수 있는 문.”

 

이찬오빠는 우리가 물을 뿌리는 사이에 급하게 문을 그렸다. 연습을 많이 했는지 급한 상황인데도 직선이 거의 구부러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 수선화는 채 튀어나오지 않은 문을 열고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 크게 찢기는 소리가 났다.

 

화염몬스터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수선화는 바로 겔무에게 달려들었다.

 

겔무는 채찍을 내려쳤다. 수선화의 손이 묶였다.

 

“레이저!”

 

밑에서 선우가 빛을 쏘았다. 겔무가 황급히 피하자 이찬오빠가 그새 그린 미사일을 구현해 겔무에게 쏘았다.

 

펑! 소리와 함께 겔무는 사라졌다.

 

슈트 안에서 삐삐 소리가 들렸다. 블루헤드 경계음인데,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도망친 거 같아.”

 

선우가 말했다. 이찬오빠는 내가 내려놓은 여성에게 다가갔다. 앉아서 이 모습을 보고 계셨다.

 

“엄마.”

 

그는 꿇어앉아 무언가 속닥거렸다. 나는 선우에게 다가갔다. 선우가 휴우, 소리를 내며 헬멧을 벗었다.

 

“들키기 전에 도망가는 게 좋지만…….”

 

프레쉬워터맨이 달려오고 있었다.

 

“고맙다! 스텔라맨도 와줬구나!”

 

그리고 경찰관도 달려오고 있었다. 들키는 거 아닐까, 했는데 오자마자 열 감지가 지나치다며 정중한 인사와 함께 음주측정을 부탁한다. ……큰일이 현실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음주 비행, 용납될 수 있는가?

 

신문의 1면은 아니었지만 2면에 큰 사진으로 선우의 헬멧 벗은 얼굴이 찍혀 있다. 우리는 봉사시간 40시간을 명령받았다. 선우는 비행까지는 하지 않아 벌점으로 끝났지만 신문에는 마치 선우가 나서서 한 것처럼 얼굴이 다 드러났다. 그리고 징계 위원회도 열렸는데, 우리 팀은 당분간 활동정지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학교 갈 곳곳을 쓸고 있었고 선우는 그 옆 정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 선우에게 이찬 오빠는 검을 겨누듯 빗자루를 겨누었다.

 

“넌 안 돕냐?”

 

“교수님이 돕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쳇.”

 

이찬오빠는 생각보다 밝았다. 몬스터가 나오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고 엄마가 무사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학교는 생각보다 넓었다. 게다가 껌이 붙은 것은 일일이 긁개로 긁어내야 했다.

 

선우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녀석 너무한 거 아니냐.”

 

이찬 오빠는 툴툴거렸다. 그러나 곧 선우는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나타났다.

 

“뭐야?”

 

우리가 묻자 선우가 봉지 안에서 캔을 꺼냈다.

 

“음료수. 먹고 하라고.”

 

“고마워.”

 

“역시…….”

 

이찬오빠는 눈을 빛낸다. 약간 비운의 주인공처럼 감동이 흐르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넌 팀장이었어!”

 

“일어서시죠.”

 

선우가 담담히 이찬오빠를 보았다.

 

“미안하다.”

 

“됐습니다.”

 

우리는 잠깐 정자에 앉았다. 앉으면 자동으로 타이머가 멈춘다. 뭔가 슈트가 감시받는 느낌도 든다는 말이지. 우리는 홀짝이며 잠깐의 침묵을 즐겼다.

 

“둘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수선화가 물었다.

 

“나도 궁금해.”

 

이찬오빠가 맞장구쳤다. 선우와 나, 두 사람의 이야기다. 선우는 속눈썹을 짙게 드리우다가 말문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뭐야……. 심각한 거야?”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었죠. 저는 GB그룹 후계자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유명해지니까 GB그룹에서 저를 이용하는 것뿐이죠.”

 

“어……네가 포기한 것 아니었어?”

 

“처음부터 포기할 것도 없었죠. 저는 초등학교 때 내쫓겼고 무일푼이었어요. 그때 히어로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시고 따뜻한 집에서 밥도 차려주시고 굶지 않게 보살펴주신 게 소라의 어머니신 일렉트로닉 걸이었습니다. 눈물 섞인 밥을 많이 먹었죠. 엄마는 이혼하고 새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 빚이 많았었고 여러 가지로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협회에 매일 찾아가서 조르고 졸라 히어로 테스트에 합격했고 좀 유명해지고 사는 것도 괜찮게 됐죠. 회사가 연락이 온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때도 아버지의 개인적인 연락은 없었어요.”

 

우리는 말을 잃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는 과외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선우에 대해서 대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알고 지냈으니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하나도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몇 년간 소라네 집에 더부살이한 거죠.”

 

“난 몰랐어.”

 

나는 중얼거렸다.

 

“일렉트로닉 걸은 배려심이 많으셨으니까.”

 

엄마에게서도, 아빠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룹의 후계자라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만 유명해지면서부터는 그 배경도 알려졌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보고 싶은 엄마.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선우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은인의 가족인 걸까?

 

나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가 갑자기 짐작될 듯하면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일렉트로닉 걸이 돌아가셨을 때 울었던 사람이 많았지.”

 

수선화가 말했다.

 

“형 어머니도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어어? 아냐. 평범한 꽃집 아줌마야.”

 

“되게 젊고 아름다워 보이셨어요.”

 

내가 말했다. 그렇게 마른 편까지는 아니었지만 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다시 쓸자!”

 

이찬오빠가 벌떡 일어섰다. 우리도 불만 없이 비닐봉지에 빈 캔을 넣고 일어섰다. 선우는 앉아서 멀거니 이쪽을 보았다.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선우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찬오빠와 수선화가 먼저 다른 방향으로 가고 나는 선우와 함께 가겠다며 다시 정자로 돌아왔다. 신문지를 얼굴 위에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나는 어떻게 깨워야 하나 망설였다. 조심스레 두드리자 아주 섬세하게 눈꺼풀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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