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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찾아

 

                                                        강복주

 

 

 

너 요즘 바쁘더라.”

 

정각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첫 마디를 떼어냈다. 나는 정각의 집 근처에 와서 정각과 함께 커피숍에 들어와 있었다. 바쁘긴 무슨. 하면서 웃고 싶었지만 나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웃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요새 확실히 바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런 행동으로 인해 무슨 성과를 본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일도 요새 없는가보던데.”

 

그런 말은 기분 나쁘게 들릴 법도 했지만 정각이 그런 말을 한다면 기분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각은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수입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만났다. 나는 나무탁자의 맞은 편에서 커피 안에든 얼음을 달그락거렸다. 정각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는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먹고 있었다.

 

말할 만한 일이 아니야.”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야?”

 

나름대로 단호한 대답에 정각은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 말투는 재촉하는 것 같지도 않고 서운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감정기복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감정기복이 심하지도 않았다.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서 그래.”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나는 모태솔로잖아. 연애를 해보고 싶어서.”

 

너 아무나 만나는 것은 아니지?”

 

정각은 걱정스레 물었다.

 

나름대로 대화는 나누어 보고 있어.”

 

찔리는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리고 더 추궁하기 전에 고해하듯이 뱉어버린다.

 

소개팅 앱이야.”

 

…….”

 

정각은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괜찮은 소개팅 앱이야. 서로 대화도 나눠볼 수 있고 신중하게 결정하려고 하고 있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변명이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을 믿을 수 있어? 어떤 사람이 나올지 알고. 불안하지 않아?”

 

하지만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걸. 네 친구를 소개시켜달라고 해도 너는 소개시켜주지 않았잖아.”

 

내 주변에는 마땅한 놈이 없어. 애인 있는 녀석을 소개시켜줄 순 없잖아?”

 

그러니까 내 나름대로 만나는 거야. 나도 한 번쯤은…….”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한 번쯤은 연애를 할 수 있잖아.”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된 거야?”

 

내일 J시로 갈거야.”

 

정각은 탁,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가 나를 노려보는 것같다.

 

?”

 

만나기로 했어. J시에 사는 사람이라서 내가 내려가기로 한 거야.”

 

뭘 믿고 만나는 거야. 대체!”

 

만나는 걸 전제로 대화하는 거잖아. 어차피 처음 보는 사람은 인터넷이든 실생활이든 같다고. 만나봐야 아닌지 맞는지도 알 거 아니야.”

 

위험하다는 건 알고 그러는 거지?”

 

뭐가 위험한지 잘 모르겠어. 솔직히.”

 

안되겠어. 내일은…… 따라갈게.”

 

만나는데에 따라오겠다고?”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못미더워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니스칠이 되어 반질반질한 나무탁자만 계속해서 매만졌다.

 

네가 가지 말란다고 안 갈 애가 아닌 건 아니까. 참견하겠다는 건 아니야. 근처에 안 보이는 곳에 있을게.”

 

만나는 데에 끼어드는 것만 아니면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이 뭔가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우리에게야 소꿉친구로 확실한 포지션이 정해진 상태였지만 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그는 단정지어서 말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보면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게 걱정이 돼. 너는 남자잖아.”

 

나는 내 의견을 최대한 피력한다. ‘안 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요즘 세상에 이성인 친구를 인정하지 않는 남자라면 그 것도 문제니까, 그건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너희들 사이에 끼어든다는 얘기가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뭔가 대처할 수 있어야할 것 아니야. 어차피 난 아직 학생이어서 시간을 내자면 낼 수 있어.”

 

그의 말에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내일 그와 함께 J시로 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적막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와서 일기장을 꺼내들고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무슨 말을 적어야할지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정각의 걱정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불편했다.

 

정각에게는 고등학교 쯤인가, 고백했던 적도 있었다. 그냥 이 사람과 평생 함께라면 괜찮겠지 싶었고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연애라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어쩌면 철없는 내 행동에 대해서 그는 배려해준 것일 수도 있었다. 나도 그저 던져본 말이었고 진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없던 일로 하자 우리는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뭔가가 필요하면 찾아가거나 스스로 시도하는 편이었다. 나에게는 사랑과 연애가 필요했다.

 

기차역에는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러고보니 어머니는 요즘 건강 괜찮으시니?”

 

하루는 금새 흘렀고 아침에 기차역에 가자 정각이 편한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서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머니에 관한 안부도 물어보았다. 소개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그냥 그와 함께 여행을 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병원이랑 집을 왔다갔다 하셔.”

 

얼른 괜찮아지셔야할텐데.”

 

낫는 병은 아니니까. 그래도 유지되는 게 다행이지. 너희 어머니는 잘 계셔?”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내게는 어머니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어머니의 탓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사랑을 흠뻑 받아본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같았다. 낯설었다. 하지만 끝없이 그리웠다. 태어나기 전에는 그 것을 누렸던 것처럼, 원래 있었던 것을 빼앗긴 것처럼 나는 갈구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재능이 없었다. 인맥이 넓지도 않았고 성격이 좋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한 손가락에도 겨우 꼽힐 정도의 친구였다. 자주 만나는 것은 정각 뿐이었다.

 

우리 엄마는 건강하시지. 잔소리 좀 덜했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 오늘의 일정에 대해 알렸다.

 

오전에 그 사람 만나서 커피만 한 잔 할 건데.”

 

그럼 마치고도 시간 좀 있겠네. 만나고 나서 좀 놀다 갈래? 그냥 오기 섭섭한데.”

 

그러자. 뭐 있나 검색 좀 해볼까?”

 

그런 말을 나누자, 정말로 그냥 놀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심은 긴장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놀자는 정각의 말도 부담스러웠다. 무례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편하다. 하지만 정각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더 불편할 것이다.

 

기차역에 내려서 우리는 곧장 헤어졌다. 커피숍 가는 길에 같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에 정각은 그러도록 하라고 했다. 가는 길에 태양이 쨍쨍하다. 커피숍에 앉자 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통유리로 되어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거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안의 익숙한 얼굴이 어떤 각도에선 괜찮게 보이다가 어떤 각도에선 참 못생겼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들어왔다. 조금 예민한 인상에 생긴 것이 깔끔하다. 피부가 곱고 잘생겼지만 잘 웃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거리감이 다소 있는 인상이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표정변화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걷고 있다. 구역이 다른 커피숍을 향해 가고 있다. 가는 길에 손을 흔드는 남자가 보인다. 정각이다. 나는 손목에 잠겨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까 커피숍에서 첫 만남을 가진 이후로 세시간이 지나있었다.

 

빨리 마쳤네?”

 

커피만 먹고 헤어진다니까.”

 

어땠어?”

 

자꾸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하던데…….”

 

그는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에 대해 두 시간 반 동안 구구절절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그 구구절절하게 쏟아내는 시간 동안 나는 저 사람이 내가 구구절절하게 싫어서 저러는 것인가를 고민해야했다.

 

뭐야. 그게.”

 

정각은 픽 웃는다.

 

어쨌든 쫑이야. . 맘껏 놀아도 되겠어.”

 

나는 한숨을 쉰다.

 

내가 와서 다행이지?”

 

정각의 표정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개구졌다. 나는 쓰게 웃었다. 논다고 해도 낯선 도시에서 생맥주 한 잔이 고작이다. 우리는 차 시간을 살피면서 오늘 소개팅에 대해서 이런저런 비난을 해댔다.

 

 

 

돌아와서는 바로 다른 사람을 물색했다. 소개팅 앱에는 많은 사진들이 떠있었다. 나는 자기소개들을 유심히 살폈다. 외모보다 마음이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고 있는 중에 내게도 쪽지가 계속 왔다.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것을 접는 와중에 실수로 ‘;’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더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결국 답장을 해주다가 며칠씩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는 소개팅하는 사람들이 하는 카페에서 내 이야기를 올렸다고 말해왔다. 먼저 사귀고 그 다음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지만 그는 이미 사람들이 모두 보는 곳에서 사귀기로 한 여정을 쓰고 있었다. 그를 지지하는 팬층도 제법 많아보여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정각에게 하자 그는 정색을 했다. 이번에는 따라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어딘데? 너 왜 이상한 놈들을 만나고 그래.”

 

이번엔 S시야.”

 

넌 왜 멀리 있는 사람을 찾냐?”

 

어쩌다보니 멀리있는 거지 멀리 있는 사람을 찾은 건 아니야.”

 

, 답답하다. 답답해.”

 

S시로 갔을 때, 나는 남자 두 명이 정류장까지 나를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정각을 모른 체했다. 둘 다 위협감이 느껴지는 체격이었다.

 

오늘부터 사귀시죠.”

 

그는 순 협박조였다.

 

너무 이른 거 아닐까요?”

 

그럼 같이 사진 한 장 찍으시죠.”

 

나는 점심을 먹고 무사히 헤어졌다. 정각은 별 일 없냐고 다그쳤지만 별 일은 없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그가 둘이 찍은 사진을 올리고 자신의 애인이라고 나를 공표해버린 것이다. 그의 온라인 말투는 직접 봤을 때와 달리 부드러웠다. 나는 달리 알릴 사람이 없어 정각에게 이런 일이 있다고 말했다.

 

미친 거 아니야?”

 

그의 반응이었다.

 

헤어지자고 했는데 알겠다는데 글은 안 내려. 그냥 잠수 타야하나? 이게 무슨 경우지?”

 

별 일 없길 다행이다. 잠수 타.”

 

그러나 다음 날, 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욕설문자가 한 바가지 와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대응하면 일이 더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참아냈다.

 

잘했어. 상대해봐야 똥물만 더 뒤집어쓴다.”

 

그 일을 정각에게 말했더니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소개팅 사이트에서 나에 대한 악성소문을 퍼트릴까봐 걱정이었다. 이미 내가 점심식사를 얻어먹은 김치녀니, 기분 나쁜 짓을 했느니 하는 일들이 올라와 있었다.

 

증거 잡아서 고소하면 되니까……. 하지만 안 퍼지는 게 좋은데. 답답하네. 왜 그런 사람을 만난 거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 사람을 만난 내 책임도 일정부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준다고 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됐던 거였다.

 

나는 한 동안 안 만나겠다고 맹세했다. 정각은 그런 내 맹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같았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6개월 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요즘은 좀 잠잠하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였다. 정각은 턱을 괴고 나를 보았다. 나는 씩 웃었다.

 

이제 슬슬 만나보려고.”

 

?”

 

이번에는 정각이 기겁을 한다.

 

이 번엔 진짜 괜찮은 사람 같았어.”

 

이 번에도 떠나겠지?”

 

. A시야!”

 

미치겠다. 진짜. , 저번같은 일도 있고 못살겠다. 따라가야겠네.”

 

정각은 가슴팍을 쾅쾅 쳤다. 나는 전의 일로 약간 기가 죽기도 했지만 체념한 것에서 오는 특유의 밝은 기운으로 고고씽을 외쳤다. 이번에 제대로 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정말로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A시로 향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기차역이 낡았지만 친근했다. 따뜻한 색의 벽돌이 켜켜히 쌓여있는 이 곳에서야 말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같았다. 정각은 알아서 사라져주지도 않고 함께 벽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처럼 중간에서 만나자.”

 

저 번에 그런 일도 있고 너 혼자 못 보내겠다. 커피숍 안에 다른 자리에 앉아있을게.”

 

정각은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끼고 나를 가만히 보았다.

 

알았어.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 네 말 들을게.”

 

우리는 그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 먼저 들어가 앉아있기로 했다. 정각은 6칸이나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제발 멀리 가라고 애원한 탓이다. 그렇게 약속시간까지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시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났다. 그렇게 이상한 것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연락도 두절된 상태였다. 20분이 지났다. 조금 이상했다. 30분이 지났다. 이건,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초조하게 탁자를 두드리자 털썩 내 앞에 앉는 사람이 있었다. 정각이다.

 

연락 안 되고 첫 만남이고 이건 바람 맞은 거야.”

 

대화가 분명 잘 되었는데.”

 

네 착각이었겠지.”

 

그럴 리가.”

 

가자.”

 

정각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30분만 더 있어볼래.”

 

한 시간 기다려도 똑같아.”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내 고집을 꺾긴 어렵다고 보았는지 한숨을 쉬며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그의 말대로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만나지 않아. 이젠 정말 나를 아낄 거야.”

 

좋은 선택이다.”

 

기차역에서 혼잣말을 하는 나를 정각은 무뚝뚝한 말로 달랬다.

 

본가에 도착했다. 정각은 모처럼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실패가 마치 몸에 각인되는 것같았다. ‘너는 매력이 없다.’ 내지는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이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느끼는 거 없냐?”

 

앞으로 이렇게는 안 만나려고.”

 

진짜로? 또 그럴 것같은데.”

 

진짜야.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너는 나한테 고백한 것도 이렇게 가벼운 시도였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미안해.”

 

나는 뜨끔했다.

 

앞으로 차차 진정성 있어질 생각은?”

 

?”

 

그런 데서 사람 만나지 마. 열불터지니까. 무겁게 서로 조금씩 알아가 보라구. 그게 누구든.”

 

그럴 사람이 있었으면 내가 이러겠어?”

 

나한테 거절당했다고 끝일 마음이야? 너는 진짜 성급해.”

 

?”

 

정각은 흥, 하고 돌아선다. 더 이상 말하고 싶은 것은 없는 듯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 동안 그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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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동쪽 마녀를 찾아 

      

                                                                    강복주

 

신탁? 나한테 말도 하지 않고 신탁을 받았단 말이야?”

 

론은 경건한 신전을 거닐다가 하마터면 칼을 빼낼 뻔했다. 굵다란 신전기둥에 비딱하게 서서 나를 보는 어릴 적 친구인 저 타마스놈 때문이다. 그는 비딱한 자세와 어울리지 않게 금테가 둘린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신탁이라는 것을 한 번 받게 되면 신의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무조건 실행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을 하지 않았을 때 잘못된 것을 몽땅 덤터기쓰기 마련이다.

 

너희 할아버지를 치료해야 하잖아. 내가 봤을 때 할아버지 몸상태가 좋지 않은 건 저주가 내려진 거야. 풀려면 성수가 필요해. 그런데 네가 그냥 성수 구하러 가라면 가냐?”

 

미친놈아! 거긴! 죽으러 가라는 거잖아!”

 

괴성에 론의 발밑의 풀꽃들이 흔들렸다.

 

아니 미친 놈이!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데!”

 

돌아가실 나이가 됐어!”

 

미친 놈이! 패륜자식같으니!”

 

너 내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소중해?”

 

너희 할아버지는 내게 아버지같은 분이야.”

 

역시 저 놈은 나보다 할아버지가 더 중요하군. 론은 그에게 들리지 않게 투덜거렸다. 할아버지도 건강하실 적에 자신보다도 타마스를 더 걱정하고 챙겼다. 자신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뵈러 가면 누워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항상 타마스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신탁은…… 네가 동쪽의 성수를 떠오라는 것으로 나왔다.”

 

동쪽에는 용이 있잖아!”

 

용도 있고 몬스터들도 짭짤하게 있지.”

 

타마스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론의 태도가 마땅찮기 때문일까, 계속 비딱했다.

 

너는 살아돌아올 거다. .”

 

신탁에 그 것도 나오던?”

 

론은 흥, 코를 풀었다.

 

너는 이 도시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단장이고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나 타마스도 길을 나설 것이니까.”

 

너도 간다고?”

 

저주는 끈질길 거야. 저주의 원한을 뿌리뽑을 수는 없지만 이미 퍼진 병은 이 도시의 신관으로서 책임지고 치료하겠다고 대신관님께 맹세하고 나오는 참이다.”

 

으으.”

 

이렇게 되면 론으로서는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꼼짝없이 용과 싸우러 동쪽으로 떠나야한다. 무려 100년만에 탄생한 천재라는 타마스가 모험을 하신다는데 말이다.

 

너랑 가느니 혼자 가는 게 속편한데!”

 

론은 진심이었다. 죽더라도 혼자 죽는 게 마음이 편하다. 마을의 덕자인 타마스와 함께 길을 나서는 것보다는 혼자 떠나고 싶다. 그러나 타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 혼자서는 살아돌아오기 힘들 거야. 그리고 정 가기 싫어하는 것같아서 하는 말인데 용이 사는 곳에 동쪽의 현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는데 네가 모르는 검술을 잔뜩 알고 있다고 한다.”

 

순간 론은 눈을 반짝였다.

 

오래 체류해도 되는 건가?”

 

그건 안되지만 귀한 책자 정도는 받아올 수 있겠지.”

 

뭐 그렇다면…….”

 

론은 번지는 미소를 억누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보는 것도 좋을 것같군.”

 

불효자식.”

 

.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너만 예뻐했다구. 친손자가 나인지 너인지도 모르게!”

 

네 검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생각해봐. 그리고 그 검술을 손에 넣었을 때 네가 그 분께 어떻게 했는지도 다시 생각해봐.”

 

론은 가는 길 동안 몸의 고단함도 고단함이지만 이런 잔소리를 내내 들어야한다는 것에 스트레스가 적잖게 쌓이는 것을 느꼈다.

 

타마스가 워낙 잘나서 그렇지 자신도 도시 내에서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최연소로 기사단장이 되었고(첫 번째는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시민들의 평판은 모자라도 기사단 내에서는 어리지만 쌓인 것을 잘 풀어주는 기사단장이었다.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이제 어리지 않으니 잔소리를 들을 시기는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타마스와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론이 가족들에게 떠난다고 말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은커녕 기뻐했다. 론은 툴툴거리고 싶었지만 기뻐하는 가족들을 보자 체면상 도저히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화려한 계단 너머 윗 층에 석 달째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신탁을 받아 떠납니다.”

 

네가? . 틀림없이 알아서 떠나는 것은 아닐게다.”

 

이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다니! 론은 욱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맞습니다. 타마스가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사주하셨죠!”

 

이 놈이! 말뽄새보게!”

 

할아버지 역시 욱해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몸에 반점들이 그의 힘을 빼어내는 듯이 그는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낫게 해드릴게요. 대신 잔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저 놈! 저런! 나으면 네 검을 부러뜨려 버릴 테다!”

 

다 나으시더라도 제발 아직 한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셔야할텐데!”

 

문 밖에 나와서도 론은 분통을 터뜨렸다. 문 안에서 무어라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론은 고개를 흔들며 밑으로 내려갔다.

 

 

다음 날, 마을사람들이 성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성 안의 스타인 타마스와 론의 모험을 응원하러 찾아온 사람들이다. 저주는 마을 안에서도 영향력 있는 위인들을 위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저주가 찾아오면 온 몸에 반점이 생기고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신탁에 의하면 그 저주는 성수를 한 모금만 삼키면 다시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론의 집 앞에는 중년의 남성이 두 명 서있었다. 기사단장인 론을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찾아온 사람들이다. 론은 그들과 말을 타며 함께 성문까지 천천히 달려갔다.

 

괜찮아. 어차피 성수를 떠오는 것이니까 인원이 많아질수록 위험해질 뿐이야. 저주도 성수도 모두 동쪽에서부터 왔다고 하니까 동쪽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혼자 가는 게 편해.”

 

론은 천천히 걷는 말 위에서 천천히 또박또박 설득했다. 말은 또각또각 걷다가 한 번씩 멈춰섰지만 꾸준히 앞으로 걷고 있었다.

 

하긴 저희 실력으로는 함께 가봤자 방해만 되겠지요.”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군. 혼자가 편해. 게다가 타마스까지 있으니까 말이다.”

 

론은 싱긋 웃었다.

 

성문 앞에 서자 타마스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론은 타마스를 보자 괜히 심통이 나서 뚱하게 말 위에 서있었다. 타마스는 론을 보자 빛의 구를 쏘아올렸다.

 

으악! 내 눈!”

 

론과 함께 말이 놀라 날뛰었다. 론이 낙마하자 타마스는 미소지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군.”

 

, 이 놈!”

 

론은 악마!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수많은 타마스의 팬들 앞에서 악마!라고 외쳐보라. 틀림없이 삶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부조리하다. 이 부조리! 론은 통탄하며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론을 찾아온 기사단원들도 이 상황에서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타마스는 론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걸어서 가야한다. 산세가 험하거든.”

 

이 놈! 내 눈!”

 

되도록 험한 말은 삼가게. 친구.”

 

타마스는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었다. 이 놈. 진심으로 기쁜 거다. 론은 머리끝까지 약이 올랐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 타마스님과 론님은 사이가 좋으셔.”

 

론은 어느 아줌마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고 자루에 끈을 달아놓은 배낭을 매었다. 타마스의 형편없는 체력을 생각하자면 자신은 혼자 갈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짐을 지어야한다. 부조리! 론은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하루에 걸을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타마스는 신전에서 몇 시간씩 책만 보는 샌님이었다. 체력단련을 했다고는 했지만 검술만 하는 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타마스는 금새 지쳐있었다. 론은 내심 답답해져서 제안했다.

 

엎고 갈까?”

 

싫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겠는데. 나 참. 제일 처음 나오는 괴물은 뭐냐?”

 

계획서 첫 장에 나오는데 안 읽어봤어?”

 

네가 있는데 뭐. 굳이 읽어볼 필요가 있겠어.”

 

타마스는 기가 막혔다. 체력적으로 자신이 부족하고, 그러므로 죽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자신이다. 내가 죽으면 저 녀석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타마스는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단련을 한 보람은 있어서 산의 초입까지는 저녁까지 어떻게든 다다를 수 있었다.

 

이 산을 넘어가면 들판에 두눈박이 사자가 나온다.”

 

타마스가 말했다.

 

두눈박이 사자? 사자는 원래 두눈박이 아니야?”

 

맞아. 그냥 사자야.”

 

날 바보로 아냐?”

 

의심해봤지.”

 

론은 모닥불에 장작을 넣다가 이 장작으로 타마스를 후드려 팰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타마스의 팬들도 없는 상황. 그러나 팅팅 불어있는 타마스의 발을 보자 그런 생각이 가셔서 약초 두 잎을 펼쳐 타마스의 발등 위에 턱 올려놓았다.

 

붓기는 좀 가라앉을 거다.”

 

론으로서는 뜻밖에도 그 약초가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로는 타마스의 잔소리가 매우 뜸해졌다. 타마스가 지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빛의 결계를 만들어놓은 이후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론도 타마스와 불이 맞닿지 않게 자세를 고쳐준 후, 담요를 덮었다. 갈 길이 멀었다.

 

그 다음 날도 타마스와 론은 하염없이 걸었다. 산에는 가끔씩 오크들이 나무몽둥이를 들고 튀어나왔다. 몽둥이와 함께 론의 일격에 잘려져나가는 이들이었지만 그 놈들이 등장한 이후로 앞으로 걷는 속도는 더 느려졌다.

 

이번에 론 앞으로 뛰어든 오크 녀석 하나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크를 절단내고 다닌 이들에게 원한이 쌓인 모양이다. 크르르거리고 있었다. 돼지 코고는 목소리로 우리 일족을 해치웠으니 곱게 안보내겠느니 뭐니 하는 말을 해댔지만 무슨 말인지 자세하게 들어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론은

 

!”

 

기합소리를 내더니 검기를 모아 순식간에 나무며 오크를 쓸어버렸다.

 

나무꾼으로 대성공하겠군.”

 

뒤에서 오크의 명복을 빌어주던 타마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들이 있던 풀숲을 헤치고 걸어 나가자 산능선에서 아래의 전경이 보였다.

 

밀림이다.”

 

타마스 말에 대꾸하지 않고 론은 먼 곳을 보았다. 들판이 이어져있었다.

 

사자가 있는 곳이야.”

 

나는 걱정 없는데, 네가 문제로군.”

 

...”

 

타마스는 푸르른 입사귀를 걷어내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산을 내려와 들을 걷기 시작하자 사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개체 수가 많지 않았고 단독행동을 하기 때문에 공격을 막을 곳을 보기도 쉬웠다. 물소떼나 말떼가 더 위협적이다. 그들은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거닐면 됐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가끔씩 사냥하러 나온 사자는 있는 법. 타마스의 뒤를 습격하는 사자를 론은 순식간에 막아섰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다. 사자의 일격을 막아낸 후 어느새 사자 옆에 선 론의 검은 정확하게 사자의 목을 쳤다. 얼굴과 몸이 두동강이 난 사자를 보며 타마스는 기겁을 했다. 론은 입맛을 다시며, 사자의 머릿가죽을 떼어낼 생각을 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론의 옆에 커다란 주먹이 꽃혔다. 사자머리에 정신이 팔려 곁에 온 줄도 몰랐지만 론은 간신히 피해냈다. 무거운 주먹은 다시 위로 천천히 들렸다.

 

! 가죽 못 쓰게 됐잖아!”

 

론은 소리지르며 위를 보았다.

 

골렘?’

 

샌드골렘이다! 아무리 쳐도 회복할 거야. 피해!”

 

!”

 

론은 뒤로 굴렀다. 주먹이 다시 뻗어오자 검을 맞부딪혔지만 점점 밀렸고 그 나마도 점점 모래에 파묻히고 있었다. 론은 주먹 위로 올라타서 검을 간신히 빼내었다.

 

시간을 벌어!”

 

타마스는 고함치고 나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신관복의 금색 테두리가 점점 빛나기 시작한다. 골렘의 주먹은 다시 위로 올라간다. 그 주먹을 타고 론은 골렘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검기를 담아 골렘의 가운데에 붙어있는 수정구슬을 쳤다. 그러나 힘에서 밀려서 다시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조금은 수정구슬에 균열이 일어난 것같다.

 

어택!”

 

론은 검기를 다시 한 번 쏘아올려붙였다.

 

수정구슬이 흔들거리면서 점점 금이 간다. 그 것이 깨질 찰나에 타마스의 신성력이 여기까지 훅 퍼졌다. 론은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골렘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골렘은 사람이 불러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몬스터잖아?”

 

론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이 머리를 잡았다.

 

. 동쪽마녀의 짓인 것같다.”

 

이 번에 저주를 퍼부은 것도 동쪽 마녀의 짓이지?”

 

.”

 

골렘은 수정구슬이 깨지면 어떻게 되지?”

 

소환자에게 타격이 가지.”

 

신성력을 쓰면?”

 

타격이 안가.”

 

왜 신성력을 쓴 거야! 조금만 더 놔두면 수정구슬을 부술 수 있었는데!”

 

론이 아쉬워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타마스는 앞으로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이 앞의 마을이 동쪽마녀의 마을이야.”

 

폐허가 된 마을 말인가? 너도 그 곳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동쪽마녀를 아는 것 아니야?”

 

타마스는 한 동안 말이 없다가 론에게 물었다.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니 가보겠나?”

 

가봐야지. 성수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니.”

 

론은 타마스가 걷는 쪽으로 내달렸다.

 

마을의 모습은 처참했다. 나무로 된 건물과 창고가 거미줄이 쳐진 채로 삐걱거리고 있었고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타마스는 예전의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생은 신성력이든 마법력이든 뛰어났다. 타마스는 동쪽 마녀의 짓이라고 했을 때부터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이 일을 저지른 것은 아마도 자신의 친동생일 것이라고. 왜냐하면 이 근방에 마법력이 강한 핏줄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타마스의 예전 집은 문 한 짝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나 건물 안의 공간은 멀쩡했다. 타마스는 여동생을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곳 저 곳을 뒤졌다. 서랍 안에 일기장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그 서랍 안에는.

 

뭐야?”

 

마른 장미꽃이야.”

 

무슨 의미야?”

 

내가 준 건데. 아직 여기 있군.”

 

옛 애인이라도 되냐? 동쪽마녀가?”

 

말해도 될까. 아니다. 위험하다. 타마스는 그렇게 판단내리고 피식 웃었다.

 

진짜인가보네?”

 

아니다.”

 

정말?”

 

그래. 어쨌든 이게 다인 것 같아. 다시 가보자. 동쪽산으로.”

 

그거야 쉽지. 이제 일주일만 더 걸으면 성수가 있는 곳이야.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지.”

 

론은 체력을 챙기는 데에 열심히였다.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타마스쪽으로 보였다. 론이 자리를 깔자마자 타마스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일주일 후였다. 산의 중턱에서 타마스와 론은 지도를 보며 상의했다. 타마스가 말했다.

 

성수가 있는 근처에는 용이 살아.”

 

안 들키고 떠올 수는 없어?”

 

안 들키면 제일 좋지.”

 

타마스가 대답했다. 론은 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바로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타마스가 붙잡아 끌었지만 론의 힘은 타마스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일단 가보고 생각하자!”

 

생각하고 가야지!”

 

운 좋으면 뜨는 거고 운 나쁘면 붙는 거지! 달리 방법이 있어?”

 

방법이 없긴 하지만! !”

 

들키면 내가 용의 시선을 끌테니까 그 사이에 성수를 떠.”

 

드래곤을 상대하는 게…… 쉽진 않을 거다.”

 

맡겨둬.”

 

론은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타마스는 자신이 다리가 허락하는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성수를 뜨기 위해서였다. 론은 타마스의 주위를 호위하듯 달려나갔다. 이윽고 무사히 성수 앞에 도착했다.

 

성수 앞의 연못이 일렁였다. 물 위에 반사되는 그림자가 여자의 얼굴 같아 보인다. 타마스는 흠칫 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고 수통에 물을 담았다.

 

흑룡의 수호를 받는 마녀. 나는 이 물을 뜨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위쪽이었다. 흑마법으로 어둠의 화살이 쏟아졌다. 타마스는 급히 결계를 쳤다. 성수는 성수였다. 검은 화살들은 성수에는 닿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져 나갔다.

 

너는!”

 

물은 못 떠가!”

 

그녀가 고함쳤다. 타마스는 그 생김이 어딘가 익숙해서 외칠 수 밖에 없었다.

 

테메르 아니냐!”

 

여자는 움찔했다. 그 것이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저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의 남자는……. 타마스는 중얼거렸다.

 

어릴 때 헤어졌던 내 동생…….”

 

뭐라고? 이상한 말따위에 넘어갈 것같아? 어둠의 기운이여!”

 

그 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물 속으로 첨벙 떨어졌다. 론이었다. 뒤에서 뛰어들어 머리를 친 것이다.

 

여자지만 마녀는 용서할 수 없다. 이걸로 물리친 거지? 핫핫핫! 성수를 떠가자고!”

 

타마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론의 일격으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풀 숲에 엉망으로 젖은 여자아이를 뉘이고 론과 타마스는 둘러앉았다. 타마스가 힐링을 하자 여자아이는 곧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아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장난이었어.”

 

동쪽 마녀의 말이었다.

 

죽지도 않고 그냥 골골거리는 게 끝이라고.”

 

그래? 아주 좋은 저주였어. 할아버지가 꼼짝도 못하는 건 처음 봤거든!”

 

론은 테메르의 이야기를 듣자, 언제 뒤통수를 때렸냐는 듯이 친근하게 맞장구를 쳤다.

 

왜 그런 장난을 친 거지?”

 

타마스가 물었다.

 

우리 마을 사람이 다 죽은 일 기억해? 그걸 내가 했다고 말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그 마을 출신으로 고아가 됐지만 마법학교까지 졸업했다고. 하지만 마녀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내 마을을 불태웠다는 소리를 들으니 견딜 수 없었어. 소문을 낸 곳에 작은 복수를 한 것 뿐이야.”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소문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론은 자신의 두 팔로 팔짱을 꼈다. 타마스는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해는 풀면 돼. 네가 그러지 않았어. 마을 사람들에게 네가 우리를 도와줬다고 말하지. 함께 마을로 가자.”

 

당신이 내 오빠야?”

 

그래.”

 

어릴 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어. 나는 다섯 살 무렵이었으니까. 너를 잃어버려서 미안해.”

 

타마스가 내민 손을 테메르가 잡았다.

 

좋아! 그럼 마을로 돌아가자.”

 

론은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서 가려구?”

 

테메르가 말했다. 론이 응? 하는 사이에 셋의 몸은 떠올랐다.

 

날아가면 돼.”

 

마법으로? 용은?”

 

유희를 떠났어. 인간으로 변장하고. 샘물을 지키는 건 나 혼자였어. 이렇게 가도 괜찮아. 마나는 충분해.”

 

좋은 마법사가 되었군.”

 

타마스가 기특해하고 있는 사이 셋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성 안에서는 축하파티가 열렸다. 개선장군의 역은 론이 맡았다. 할아버지는 깨끗하게 건강해져서 일어난 후, 맨 먼저 론의 머리를 때렸다. 론은 그제야 할아버지를 이길 필살 검술기법을 배워오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

 

네 놈은 멀었어!”

 

으윽! 다른 곳의 검술을 배워오고 말겠어!”

 

파티에서 갑자기 손을 불끈 쥐고 새로운 검술이 필요해!”를 외치는 론을 기사단원들도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테메르가 타마스에게서 할아버지와 론사이의 일을 전해듣고 론에게 어떤 책을 내밀었다.

 

여성용 책이지만.”

 

이건!”

 

동양의 호신술 책이야. 검법도 있어.”

 

그래! 이거야! 좋아! 이걸 배워서 쓰러뜨린다!”

 

론은 감정에 북받쳐서 눈물이 흘러나올 것같았다. 타도! 할아버지!

 

아 맞아. 그럼 나도 답례품을 줄게. 옛날 네 서랍에서 나온 거야.”

 

론은 테메르에게 마르고 검어진 장미꽃을 한 송이 내밀었다. 테메르는 싱긋 웃었다.

 

오늘 밤. 테메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모두 오해를 풀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좋은 쪽으로 오해를 시작했다고 말해야하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실력 좋은 마법사를 매도한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나은 것을 기념해서 술통을 꺼내들고 밤새도록 퍼마셨다. 마을의 저녁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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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습작입니다. 소설도 안 쓴지 1년은 되어가는 듯한데요..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지만 읽어주실 분이 있을까 싶어 올렸습니다. 앞으로 더 쓰지는 못하더라도 써놨던 몇 편은 올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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