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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강복주

 

 

 

이젠 너무 오래되어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 저 멀리 어딘가에 살아있을 게 분명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희미해진 그림자는 색깔마저 원색은 없었다. 구름이 내려온 10시의 하늘 색깔이 생각나는 그 사람은 몇 번이고 되새긴 이름만이 화석처럼 남아있었다.

 

김이원.

 

그 이름은 잊어보려고 하지만 잊혀지지 않았다.

 

글자는 대개 검은색이다. 그래서 그의 색깔은 흰색, 하늘색, 검은색, 그리고…….

 

갈색벽돌로 쌓아올린 4층짜리 건물의 1층에는 때가 탄 흰 바탕에 검은색 글자로 한세상 부동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벗겨진 중개사가 무심히 바라보았다. 한적해 보였다.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개사는 몇 가지를 묻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금빛마을에서 오셨다고요? 그런 데도 있어요?”

 

. 구석진 곳이라 모르실 거예요.”

 

서래마을도 아니고, 특이하다.”

 

그게 거래하는 데 필요한가요?”

 

, 아뇨. 아뇨.”

 

그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에게서 스쳐 간 순간적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뭐 이리 까칠하지? 와 같은. 그러나 찰나의 표정이었다. 그는 프로답게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운 호인의 표정으로 지도를 툭툭 쳤다.

 

어디로 알아보고 오셨어요?”

 

대통령이 거주할 예정이라는 신도시, 아파트 한 채면 되겠어요. 20평 정도면 좋겠어요.”

 

네에. 나오면 연락드리죠.”

 

재희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그녀가 또각또각 사라지는 뒤로 복덕방 주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얼음공주네. 얼음공주야.”

 

재희가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복덕방 주인은 웅얼거렸다.

 

 

깨진 유리같은 공기였다. 재희는 삭막한 빌딩 숲이 새삼 숨이 막힌다. 지도를 보고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뱅뱅 돌아서야 도착한 곳은 은빛신문이었다. 멀거니 건물 위를 보았다. 층수를 육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켜켜이 쌓아진 건물에서는 때마침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오의 태양은 붉은 갈기의 말처럼 공기를 뚫고 달렸다.

 

재희야!”

 

그런 말을 탄 한 장수처럼 직선으로 뚫고 오는 음성이 있었다.

재희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강하게 발산되는 기운은 태양에 못지 않을 듯 싶었다. 그에게는 깨진 유리같은 공기조차 눈처럼 녹여버리지 않을까. 그의 기운은 때로 부러웠다.

재희는 싱긋 웃었다.

 

은빛신문의 기자로 일하고 있는 기도운이었다. 재희와는 대학을 같이 다녔는데, 알고 지낸 것은 초등학교쯤부터였다. 도운은 방학이면 할머니댁에 내려오는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도운은 키가 190이 넘었고 어깨도 딱 벌어져, 옛날로 치면 장군감이 틀림없었다.

 

밥 먹었어?”

아니.”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까?”

그래.”

그렇게 올라오라고 해도 안 올라오더니……. 금빛마을이 그렇게 좋아?”

.”

근데 올라온 걸 보면, 역시 유효했나?”

 

도운은 허허 웃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김이원이 행방의 단서를 찾았다고 하니까 바로 올라오네.”

…….”

나 좀 서운해?”

 

도운은 답지 않게 재희의 눈치를 살피다가, 재희가 말이 없자 일부러 크게 웃었다.

 

신경 쓰진 말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성미도 급하지.”

어디 있어?”

 

도운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찾았다며? 어디 있어?”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인지 재희의 말은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도운은 외면했다. 재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돈을 벌러 간 이원이었지만 소리소문이 없었으니 성공한 것은 아닐 터. 그러나 잘못되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찾았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도운은 얼버무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만에 산을 타다가 실족해버렸다는 소식이 들렸어. 그래서 지금은 한국에 있는데…….”

생명엔 지장 없어?”

하루이틀하고 있다. 병원을 소개해줄게. 나도 같이 가자. 금방 와야 하긴 하지만.”

 

재희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재희를 도운은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10분만 기다려줘.”

…….”

가자.”

 

재희는 애써 걸음걸이를 가지런히 했다. 앞이 검다.

도운은 택시를 잡았다.

 

도착한 곳은 동빛병원.

재희와 도운은 말없이 걸어 5층 중환자실로 향했다. 6사람 정도 누워있는 중환자실은 사람이 가득한 데도 가라앉은 숨소리로만 가득했다. 다들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재희의 눈에는 바로 박히는 글자가 있었다. 그동안 기억해왔던, 김이원이라는 검은 글자.

 

재희는 그에게 다가가 혈관이 튀어나온 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질환이 있었대.”

 

도운이 말했다.

 

그래도 난 놈이야. 저 꽃, 국무총리가 보낸 거다.”

 

?”

 

정치권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았나 보지. 권력은 없었어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해. 저 녀석, 돈과 명예가 있다고 하기는 힘드니까.”

 

돈 벌러 간다고 했는데.”

 

사업을 하기는 했었지. 그렇지만 발견된 건 트래킹과 등산 쪽이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다. 종교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같고. 몸담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재희의 눈에 김이원이라는 명찰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 명찰을 붙잡았다. 명찰은 처음부터 붙어있지 않았는지 가슴팍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쉽게 떼어졌다.

 

…….”

 

재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명찰을 바라보았다.

 

충격받았겠지만, 사는 게 이런 것 같다.”

 

애써 위로하는 도운을 올려다보며 재희는 작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그래라. 그래.”

 

재희는 직선으로 걸어 화장실까지 갔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직선이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 걸음이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바로 손을 씻었다. 사실은 명함의 글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 이름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되새겨지던 것은, 이것이었을까.

 

이름.

 

명함은 물에 씻겨서도 변함없었다. 번지지도 않고 투명한 플라스틱 그대로 있었다. 재희는 명함을 꼭 움켜쥐었다. 그대로 존재하던 이름은 그제야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흑백이다.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이 새는 걸까? 재희는 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새까만 하늘과 먹구름이 보였다.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재희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의 냄새가 훅 끼쳤다. 비에 젖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익숙하고 달큰한 냄새였다. 비닐처럼 매끈한 재질로 된 재킷이다. 고개를 들어 재킷을 씌운 사람을 바라보자 수줍은 듯 씨익 웃었다.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40줄의 주름이지만 40대치고는 동안으로 봐줄 만한 얼굴이다.

 

김이원.

 

재희는 그제야 눈물이 왈칵 났다.

 

안녕? 오랜만이다.”

김이원.”

그래, 이재희.”

꿈이지?”

그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지금은 이 병원이 없어.”

…….”

금빛마을로 갈까?”

 

다정한 목소리였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꿈같이 달콤한 목소리. 그래, 이건 꿈이야. 그렇다면.

 

그래. 가자.”

 

끝까지 괜찮겠지.

 

 

거리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도 않았다. 택시의 크기도 크고 무거워 보였다. 사진으로 보던 과거의 풍경처럼. 이원은 익숙한 듯 택시를 잡았다. 재희의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원은 재킷으로 대충 부볐다.

 

입고 있어.”

.”

미안하다. 남겨진 시간이 많이 없어서. 금빛마을로 가야겠어.”

 

그는 다소 조급해 보였다. 이렇게 오고 싶었다면, 그렇게 기다릴 때 와줬으면 좀 좋았을까. 재희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용케도 재희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추었다. 빙그레 웃는 얼굴. 재희는 볼멘소리했다.

 

바람둥이 같아.”

 

이원은 허허 웃었다.

 

나도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야.”

꿈이라서 그런지 듣고 싶은 소리만 해주네.”

계속 가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거야. 정말이야.”

 

택시기사는 그러는 그들이 마치 없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가끔 백미러를 통해 시선이 왔지만, 그리 고운 시선은 아니다. 그렇게 택시는 금빛마을로 내달리고 있었다. 가까워져 올수록 재희는 눈은 커졌다.

 

……낚시터가 없어.”

원래 금빛마을이야.”

 

이원은 덤덤하게 말했다.

 

호수는 없었다. 원래 낚싯대를 빌려주던 곳에 내리자 한적한 골짜기 아래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리고 폐교된 지 오래된 중학교에 멀쩡히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들판을 가로질러 둑 밑으로 걸었다. 여유가 배어있는 몸짓이지만 지금만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희는 이원을 쫓아갔다.

 

.”

 

그러다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온다. 하이힐이 접혀 그대로 고꾸라져 데굴데굴 굴렀다.

 

저기, 괜찮아요?”

 

익숙하지만 앳된 음성. 재희는 창피하다는 생각이 앞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 남자아이는 깜짝 놀랐다. 재희도 덩달아 놀랐다. 어느새 길가에까지 나뒹군 걸까. 축축한 머리에 들러붙은 나뭇잎 향기가 넓게 퍼졌다.

 

도운?”

절 아세요?”

 

도운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중학생이었다. 도운은 중학교 때부터 큰 편에 속했다.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에 이원이 내려왔다. 이원은 재희를 부축하고 도운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안녕, 꼬마야.”

절 아세요? , 익숙하긴 한데요.”

당연하지. 금빛마을 사람인데, 한 다리 건너면 다 알지.”

하긴 휴가철이니까. 저도 휴가 왔어요.”

친구는?”

재희랑 이원이랑 놀고 있었는데, 저는 잠깐 개구리 찍으러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도운의 손에는 작은 디지털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재희는 이원을 빤히 보았다. 꿈이라기에는 생생하지만 이미 생각하기를 멈춰버리고 이원이 하는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우리 이름도 재희, 이원이야.”

? 에이, 거짓말.”

같이 놀래?”

 

이원은 저렇게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사람이었을까. 재희는 이원을 바라보았지만, 이원은 여전히 웃고 있다.

 

친구들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따라가도 돼?”

? 마음대로 하세요.”

 

도운의 눈빛에 약간 불안이 서리더니 불만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상한데.”

이름이 같은 건 신기하잖아.”

 

도운은 투덜거리면서도 앞으로 걸었다. 재희와 이원은 뒤따라갔다. 이원은 슬쩍 재희의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재희는 이원은 째려보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못마땅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정작 만나니까 전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원은 그런 재희의 손을 잡았다. 꿈인데도 따뜻한 손. 재희는 금새 마음이 누그러졌다.

 

무슨 생각이야?”

 

재희는 물었다.

 

곧 말해줄게. 우리를 만나면.”

 

이원의 깔끔한 턱이 이질적이다. 병원에서는 어땠었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거칠거칠하지 않을까. 그래, 이건 꿈이다. 재희는 수십 번 되뇐 말을 또 한 번 되뇌었다.

 

 

소녀 재희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재희는 어린 재희를 소녀 재희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이원은 소년 이원이라고 부르자. 이걸 어떻게 협상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사이 도운이 손을 흔들었다. 소녀 재희는 쾌활하게 그네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도운에게 다가왔다. 소년 이원은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그네에 깜짝 놀라 피했다.

 

너희랑 이름이 같은 어른이래.”

우리 엄마랑 닮았네.”

우리 아빠랑 닮았는데.”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이 입을 모아 말했다.

 

친척이에요?”

 

도운이 물었다.

 

비밀로 해둘까.”

 

처음으로 이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재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양팔에 팔짱을 끼고 견고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재희는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에게 이해를 구할 생각은 없는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꿈이기 때문이다.

 

소녀 재희는 생각보다 쾌활했다. 두 사람이 있는데도 둑을 껑충 뛰어 올라가 걸었다. 둑은 점점 낮아져 어른의 허리 정도에 오는 낮은 높이였지만 그런 둑을 부닥치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원이 그 옆을 걸었고 도운은 계속 재희의 사진을 찍었다.

어린 도운을 눈을 보며 재희는 미안했다.

소녀 재희와 소년 이원을 만난 이후로 도운은 어른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이렇게 신랄하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때부터 무의식적으로는 알았던 것일까. 꿈속이라 해도 도운의 시선이 적나라하다.

 

아줌마는 지금부터 뭐 하고 놀 거예요?”

 

소년 이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

?”

 

소년 이원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재희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꿈이니까, 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예요. 해봤자 소용없는 건 없어요.”

넌 뭐할 건데?”

돈 벌 방법 연구 중? 금빛 마을에도 돈 되는 건 많을 거라고 믿으니까.”

돈 벌어서 뭐 하려고?”

비밀이에요.”

 

소년 이원은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재희는 귀를 내밀었다.

 

재희랑 결혼할 거예요.”

 

재희는 피식 웃음이 났다. 재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근심 어린 눈으로 이원이 소년 이원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원은 계속 소년 이원을 보고 있었다. 반 친구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노리는 소심한 아이처럼.

 

그때였다. 악 소리가 나서 재희는 둑을 보았다. 소녀 재희의 한 발이 둑 너머 강물에 빠졌다. 소녀 재희의 두 손이 둑을 꽉 잡았다.

 

재희는 수영을 못해.

 

재희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치자, 두 손목을 부리나케 낚아챘다. 그래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 때 물살이 가파른 물길 위로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김이원이었다. 큰 이원. 그는 금세 소녀 재희를 끄집어 올렸다.

 

.”

 

돌에 긁힌 자리를 바라보며 재희는 탄성을 질렀다. 히말라야에서 있었다더니 역시 남다르게 빠른 조치다.

 

감사합니다.”

 

소녀 재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소년 이원과 소년 도운이 사색이 되어 내달려왔다.

 

자신을 구했군.”

 

이원이 말했다. 농담조였다. 재희는 힐끗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실감 나게 나서고 말았다.

 

기억나? 너 물에 빠진 적이 있어.”

 

재희는 섬찟했다. 기억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는 분명,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가 왔어.”

 

재희는 그대로 굳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뭐하니?”

 

삼촌!”

 

소년 이원이 일어섰다. 까만 밍크코트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리고 뒤에 있는 체격이 왜소한 남자. 재희는 그를 기억해냈다. 훨씬 젊은 얼굴이지만 현재의 국무총리를 맡은 이. 정치계의 인사인 것은 확실했다.

 

?”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이원을 보고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닮아있었는데, 기묘한 것은 상반된 인상이었다. 이원이 하얗다면, 그는 검었다.

 

소년 이원이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이원을 유심히 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누구쇼?”

김이원입니다. 등산객이죠.”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생긴 게 우리 가족과구만요. 친척인가?”

. 오랜만에 왔죠. 먼 친척입니다.”

……아 진짜로요?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따져봐야겠구먼. 김에 이면, 나보다 항렬이 낮을 것 같은데. 금빛마을에는 웬일이오? 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

돈 냄새를 맡았구먼.”

금빛마을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는 소년 이원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타라. 당신도 탈 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원은 재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재희는 소녀 재희를 바라보았다. 섬뜩했다. 이날 이후로……. 재희는 이원을 보았다. 노려본다는 것에 가까운 경계심 어린 표정. 이원은 체념한 듯 웃으며 손을 놓았다. 재희는 이원을 따라 차 안에 들어갔다. 좁은 차 안에 소년 이원, 이원, 재희가 비좁게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그 자리에 머물러있던 소녀 재희와 소년 도운이 아른거리며 없어졌다.

 

그래, 이때부터였나. 재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원은 우리를 버렸다.

 

차는 어느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주차장이 있는 어느 집에 도착해서 삼촌이 내리자 이원과 재희도 따라 내렸다. 이원은 소년 이원에게 중얼거렸다.

 

이사 간다고 하면 싫다고 말해라.”

왜요?”

재희나 도운과 영영 이별일 거야.”

, 왜요?”

 

소년 이원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원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이원은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삼촌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특이하군. 이라는 소리. 그러게, 커플로 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이원은 왜 나를 데리고 온 것일까.

 

익어가는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저녁 먹고 가요. 그 이상은 바라지 말고. 우리 집도 어려우니까.”

 

검은 밍크코트를 입은 삼촌이 집 안에서도 옷을 벗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식탁에는 이원의 아버지도 주변을 서성였지만, 삼촌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재희는 반사적으로 이원의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마치, 중학교로 돌아간 것만 같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신지?”

먼 친척이랍니다. 소문도 빠르다니까. 의원님. 여기 앉으시죠.”

 

그동안 한마디 말도 없던 깡마른 남자가 상석에 앉았다. 콩이 섞인 잡곡밥이 올라왔다. 삼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형수! 내가 흰쌀밥으로 하라 했잖아요!”

건강에 좋아지라고 그랬지…….”

 

집안 전체가 삼촌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분위기였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삼촌은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괜찮네.”

 

그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원과 재희는 식탁의 말석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재희는 이원이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금빛마을에서 이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보상금은 서울 한복판에 땅을 사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따로 더 드릴 수도 있고.”

 

하지만 여기서 먹고 산 지 오래되어서 다른 곳에 갈 자신이 없군요. 거기 분들도 소식 듣고 오셨습니까?”

 

이장님은 이원의 아버지였는데, 삼촌의 기세에 비해서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 그러긴 했는데, 제가 중앙에서 듣기로는 돈 안 될 겁니다.”

 

이원의 말에 식탁에 앉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제 명함입니다.”

 

명함에는 은빛마을 전략기획팀이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적혀 있었다.

 

사기꾼이군.”

 

삼촌이 벌떡 일어섰다.

 

이런 팀은 없어! 그렇죠? 의원님!”

 

의원이라 불리는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타인의 말을 듣지 말고 우리 가족끼리 결정합시다. 이원이 네 생각은 어떠냐? 이사 가고 싶어? 이사하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다.”

 

어 그게.”

성공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

성공하고 싶어요…….”

들었지? 들었죠?”

 

이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괴로워했다. 재희는 그런 이원을 당혹스레 바라보았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이원과 재희는 소년 이원의 방에 들어왔다. 이원은 소년 이원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야겠다고 말했다. 소년 이원은 물었다.

 

제가 잘못한 거 있어요?”

됐다. 넌 후회할 테니까.”

 

이원을 따라 재희도 나왔다. 그는 터벅터벅 걸었다. 재희도 옆에서 걸으며,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구나 생각했다. 설명이 없는 걸음걸이. 자신에게 왜 이 모든 상황을 보여주어야만 했는가. 재희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지난 일일 뿐.

 

걷기만 했다. 그러자 어느새 택시가 내려주었던 거리에 섰다. 허름한 이 건물은 익숙했다. 자신이 훗날 매입한 건물이었으니까.

 

이원은 그곳에 서서 재희를 보았다.

 

이것만 있으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희의 손에 있던 플라스틱 명함이 이원의 손에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달려오며, 형이라 불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소년 이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원은 소년 이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사 가기 싫다고 말했어요.”

 

그의 뺨에 시퍼런 붉은 기가 있다. 삼촌에게 맞은 것일까.

 

다르게 성공할 방법이 있겠죠. 형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

삼촌의 길로 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잘 몰라도.”

 

이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재희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어붙은 심장에 누군가 작은 촛불을 갖다 댄 듯한 그런 느낌이. 부자연스럽게 그을리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아프게 녹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이제 가도 되겠다. 가자.”

어디로?”

이별하는, 곳으로.”

…….”

한 번 안아봐도 될까?”

 

이원은 재희를 덥석 안았다. 10여 초 그러고 있다가 재희는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꿈인가. 역시.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파란 물.

 

금빛마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을은 수몰되었고 위쪽의 낡은 낚시터엔 황량한 기운이 가득하다.

서울 간다더니?”

 

익숙한 엄마의 얼굴. 젊은 얼굴이 아니다.

 

엄마?”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도운이었다. 재희는 급하게 열고 귀에 대었다. 도운의 벽력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너 어디야! 화장실 간다더니.”

미안해. 무슨 일 있어?”

이렇게 마지막을 보내면 어떡하냐. 속상하다. 진짜.”

무슨 일이야?”

이원이 세상을 떠났어.”

미안해. 지금 금빛 마을이야.”

올라와. 아무리 이원이 우릴 버렸다 하더라도, 너무 하는 거 아니냐.”

미안해. 곧 갈게.”

 

전화를 끊고 호수를 보았다. 꿈일까, 꿈이 아닌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이원의 각종 노력에도 호수는 여전히 맑았다. 마을이 잠긴 것은, 소년 이원의 이사하기 싫다.’는 말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었으리라.

 

그는 금빛마을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버린 것이 아니라 버리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 땅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은 잊지 못해서였을까. 플라스틱 명함은 이름 석 자가 뚜렷하다. 재희는 호수에 명함을 던졌다.

 

그의 품의 비린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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