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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영은 임금에게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임금의 입 안에 혀처럼 구는 엄선영을 보며 또한 수근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않았다. 임금이 테라스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동안 엄선영도 그 옆에 있었다. 그 때 익숙한 얼굴의 늙은 환관이 다가와 엄선영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김홍집과 스승의 인연을 트게 도와준 이로 계속 궁궐생활을 함께 하고 있어 낯이 익은 내시였다. 내시가 무언가 말하려는 낌새가 있자 임금이 나서서 말을 건넸다.

잠시 바람을 쐴테니, 나눌 말이 있거든 나누고 오시게.”

황공하옵니다.”

아닐세. 어찌 늘 내 곁에만 있겠는가.”

임금은 눈짓을 건네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엄선영은 그의 눈짓이 이상하다 생각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환관의 늙은 얼굴은 고집스럽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의 속은 아마 왕가에 대한 충성밖에 없을 듯 싶었다.

불러내서 미안하오. 허나 이 말을 꼭 해야할 것 같았소.”

아니옵니다. 용건이 어찌되시는지요.”

엄상궁은 아라사에 대해 어찌 생각하오?”

아라사라 함은 러시아. 현재의 상황에 대해 폭넓게 묻는 질문에 엄선영은 어찌 대답해야할까 싶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궁궐 생활이 수십년이었으며 그런만큼 구석구석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이로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말을 잘못했다가 내명부의 평판을 잃을 수 있었다.

현재에 폐하께서 이리 편안해하시고 좋아하시니 저 역시 한시름 놓았사옵니다.”

자네가 그리 아둔한 이가 아닌 것을 내 아는데, 그런 대답이오?”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아라사에 들어오며 역관들이며 대감들의 횡포가 말이 아니오. 모든 게 죄다 러시아쪽으로 돌아가니 다시 반발이 튀어나오고 있소.”

엄선영 역시 소식은 들었었다. 임금이 아관으로 파천하면서 러시아 역관들이 매우 중요해졌고 필요해졌는데 그 수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서서히 오만해져갔다.

이번에 이범진 대감과 친해졌다면서.”

환관의 말에 엄선영은 잊고 있던 그를 생각해냈다. 아관파천이 성사되며 가장 높게 부상된 것이 이범진대감과 자신이었다. 아관으로 옮겨오며 그는 사법권이며 안보권을 손에 쥐게 되어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망명자의 신분에서 단번에 권력자의 신분으로 변모하도록 도와준 엄선영에게는 호감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저 얼굴을 알고 존경할 뿐입니다.”

그 밑의 식솔들의 횡포도 잘 생각해보아. 친러파들이 난 이제 왜 저러나싶네. 김홍륙도 그렇고 중인들이었던 자들이 러시아어 하나 잘한다고 하여 양반이 되니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졌어요. 폐하께서 여기 있는 것도 수치이거니와 시간이 길어질수록 러시아와 좀 친하다 싶은 자들의 횡포가 심해져요!”

조금만 참으시오소서. 곧 환궁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이 곳을 지나치게 편안해하시네.”

그의 그 말은 질책이었다.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면 타국의 공사관에서 빨리 벗어나야하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궁궐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죽은 사람의 흔적이 유령처럼 남아있었다. 또한 왕은 지혜로웠으나 강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공사관에서 궁을 옮기라는 요청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특히 각국의 공사들은 그가 이 곳에 있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언제고 빠른 시일 내에 옮기기는 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많았다. 왕이 내키지 않아한다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폐하의 마음을 빨리 돌리게. 그건 자네밖에 할 사람이 없네. 이래서는 너무 괴이하오.”

환관은 그렇게 말을 하였고 엄선영은 알았노라하였지만, 겉으로는 옮겨야한다 하였고 그렇게 생각도 하였지만, 속 깊은 곳에서는 이 곳에서의 시간을 갈망하고 있었다. 엄선영. 늙고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가 능력이 있다고 치켜세웠으나 그 것은 금방 잊혀질 것에 불과하다. 엄선영은 러시아의 문양을 한 동안 보고 있었다.

일본은 왕후를 죽인 후 외척으로서 오래동안 권력을 행사해왔던 안동 김씨의 세력을 찾아가 왕후로 간택해놓았다. 궁 안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왕후로 행세할지도 모른다. 춘생문 사건의 주모자들이 안동 김씨의 그녀를 데리고 간다고 둘러댄 후에 왕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기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역모에 휘둘린 터였으나 구출이 실패했을 때에도 일본은 그녀가 왕후가 되도록 그녀의 뒤를 지원하고 있었고, 구출이 성공한 지금에 와서는 더욱 이미 지난 일이 되어 꺼리낄 것이 없을 것이었다.

스스로의 나이 43. 이 곳을 떠나면 왕이 옆에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요새 신경이 곤두서신 듯하옵니다. 마마님.”

음식을 하다가 소화가 기름을 넣자 엄선영이 벌컥 화를 내는 것을 받아낸 소화가 불만스럽게 읊조렸다.

거기에 기름을 넣은 것이 잘한 것이더냔 말이냐! 그 요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요리는 제가 잘못한 것이오나 요새 과민하시어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마마님께서 평소 지내시던 모습과 다르옵니다.”

소화는 간곡히 말했다.

요새 과로하시니 진맥을 받아보소서.”

저에게 한 소리 했다고 내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냐.’

엄선영은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옆에 선 소화의 표정은 진지했다.

화내시지 마시고 진지하게 들어주옵소서. 정말 최근의 마마님께서는 과로하십니다.”

나는 건강하다.”

마마님께서 스스로 절대 진맥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옵니다. 여시의를 부를테니 꼭 진맥을 받으소서. 이러다 쓰러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다녀오겠사옵니다.”

엄선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소화는 당당히 엄선영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렸다. 소화를 너무 오냐오냐하였는가? 궁궐의 예법으로 제가 클 적에는 감히 상궁에게 저러는 이가 없었는데 소화의 저런 행동이 자신에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돌아온 소화의 행동에 엄선영은 더욱 괘씸하였다. 여시의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선영에게,

요즘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니 진맥을 하겠사옵니다.”

하며 진지하게 진맥을 청하는 것이 자신을 병석에 앉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같아 열이 올랐다. 안그래도 요새 나이며 자신의 능력에 회의가 드는 참에 이러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피로하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마마님께서 요즘 과로하시니 정기적으로 점검받으셔야 하옵니다. 진료에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옵니다.”

! 이 놈!”

엄선영은 큰 소리를 내려 하였으나 가까운 곳에 대감이며 외국공사들이 있는 것을 의식하고 꾹 참았다. 눈을 감고 있자 의녀가 다가와 맥을 짚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엄선영의 맥을 짚고나서 곧장 소화를 보았다. 그 놀란 눈초리에 소화는 함께 놀라 손짓을 하였다.

마마님께오서는…….”

다 되었소? 싱거운 소리를 할 것이면 가게.”

엄선영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 잘 짚은 것이 맞다면, 마마님.”

여시의의 말에 엄선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껏 궁궐에 온 지금, 정말로 병석에 앉는 것인가하는 두려움이 물밀 듯 엄습한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아보였던가? 그리고 실제로도 자신의 상태가 그 정도까지 갔단 말인가. 궁궐에 온 지 고작 1. 이래서는 안되었다.

병이오?”

엄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회임하셨사옵니다.”

무어라 하였소?”

엄선영이 몸을 벌떡 일으켜 의녀를 보았다.

회임하셨사옵니다. 마마님!”

그 순간 소화가 이상한 소리와 함께 엄선영의 몸에 매달려왔다.

왜 이러느냐! 예법을 모르느냐.”

소화의 느닷없는 행동에 엄선영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입가에는 서서히 웃음기가 감돌아 번지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엄선영은 제 뺨을 꼬집어보았다. 꿈이 아닌가 하였다. 요새 음식이 어째 들어가지 않고 신경이 곤두선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 것이 회임의 이유였던가.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두 궁녀의 소란에 밖에 있던 내시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무슨 일이우?’ 하고 물으며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엄선영은 허허 웃었다. 군이든 옹주이든, 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자신의 위치는 후궁으로 올라서는 것. 임금도 제 아이를 낳은 여인을 버리지는 못하리라. 그가 자신을 버려도 자신의 이름은 남으리라.

43세의 회임. 늦은 나이라 차마 기대하지 못했던 아이였다. 엄선영은 배를 매만졌다.

그러나, 다음부터 절대 그러지 마라. 박가 소화.”

. 사실은 마마님께서 눈치를 못 채시나 입덧을 하시는 것같기도 하고, 회임으로 짐작이 가서, 아기씨가 계시면 조심하여야 하지 않사옵니까.”

기분이 풀리니 밝게 말하는 소화가 귀여웠다.

그러나 다음부터 이렇게 하면 매를 들리라.”

엄선영은 뿌루퉁하게 말했다. 소화는 환히 웃었다. 아이. 아이.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이 늦은 나이에 회임이되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궁녀로서의 삶에서 충성 외에 가족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아이. 내 아이.

확실한 것이냐?”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사옵니다만 십중팔구는 확실하옵니다. 아기씨를 회임하신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확답을 듣고서도 엄선영은 믿기지 않았다.

새 삶.’

그러나 곧 뿌듯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새 삶의 시작이구나.’

 

왕은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최근 왕은 커피에 취미를 붙여 엄선영과 아침에 커피를 한 잔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사이 왕은 많이 회복되어 왕실의 대령숙주나 믿을만한 상궁이 한 음식도 조금씩 입을 대기 시작했다. 그가 커피를 다 마셨을 즈음, 생선프라이가 나왔다. 최근에 러시아통역관인 김홍륙이 데려온 숙수가 서양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솜씨가 좋았다. 생선프라이는 요새 그가 즐기는 음식이었다.

선영은 왕의 식사를 도우며 자신의 임신에 대해 말했다. 왕은 엄선영이 임신한 것에 있어 뜻밖으로 몹시 기뻐했다.

내 아이인가? 허허, 임자가 더 이상 나를 떠날 일은 없겠군.”

쫓아낸 것은 그였노라고 엄선영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엄선영은 커피의 어두운 색을 바라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종종 자신의 속을 알 수 없다 하였으나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제 환궁하시어야하지 않겠사옵니까.”

환궁이라, 경복궁으로 말인가?”

그의 눈이 쓸쓸했다. 그 참상이 또 떠오르는 듯 하였다.

꼭 그 곳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궁궐이면 되지 않겠사오리까.”

자네는 지금 몸조리를 잘해야하는데, 무리하면 안되지 않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었다. 그의 아이를 지닌 지금에는 아무리 일이 많고 몸이 힘들어 질 것이라고 한들 환궁이 두렵지는 않았다. 묘하게도 그랬다. 지금은 오히려 궁궐에 가서 조선의 것들을 뱃속에 있는 아이가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또한 궁궐의 사람들에게서 축복을 받고 싶었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궁궐 중 한 곳은 안전하니 그 곳이라면 안심일 것이옵니다.”

나도 궁궐을 생각해보았는데 동시에 한 번 말해보겠소?”

임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외국공사관의 생활이 결코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인 것은 임금의 호기심과 장난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임금과 엄선영은 동시에 말했다.

경운궁.”

경운궁은 외국공사관으로 둘러싸여있어 함부로 국제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는 곳이었으며 도움을 청하기에도 용이했다. 뜻이 같은 것에 임금은 소탈하게 웃었다.

역시 자네와는 마음이 통해.”

임금의 웃음 속에서, 고난이 많았던 탓일까. 살기가 묻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오래있긴 오래있었어. 거기로 옮기면 처치해야할 놈들도 몇 있고.”

누구오이까.”

거슬리는 자들이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들.”

엄선영은 커피의 잔을 다 비우고 컵의 밑바닥을 보았다.

난세일세! 난세.”

임금이 외쳤다. 이 낯선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대. 그러나 대다수의 민중들과 지식인들이 거꾸로 갈 수밖에 없는 시대. 대다수의 민중을 대다수의 지식인으로 바꾸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김홍집의 죽음 이후로 끊이지 않고 불현 듯 머리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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