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엄선영은 쪽지를 받았다. 긴요한 일이 있으니 친정집으로 와달라는 쪽지였다. 그 쪽지에서 전달되오는 느낌이 묘했다. 이런 쪽지가 얼마만이던가. 10여 년 간 백성으로 살았으나 왕후의 옆에서 책략을 짜던 자신의 모습을 아는 자도 있으리라. 엄선영은 그 쪽지가 지시하는대로 서소문 안의 친정을 방문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는 미리 사람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반듯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마마님.”
“뉘요?”
“이범진 대감을 아시는지요?”
이범진대감이라 하면 출생은 서얼이나 정의감이 높고 영리하여 명성왕후가 아끼시던 인물. 명성왕후는 민씨일족을 불러 서얼인 이범진을 차별하지 않을 것을 척족들에게 명령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중인과 다를 것이 없는 신분인 서자로 태어났으나 번혁기 속에서 서자도 과거응시를 할 수 있게 만들었을 때 젊은 나이로 합격하여 유명해졌고 왕후의 측근에 있었던 자신도 물론 알고 있던 인물이다. 사람됨이 과격하고 기이하기로 유명하였으나 무술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도 높았고 유능하기도 하였다.
“요사이 조정에서 이범진 대감을 모르는 이도 있겠소. 이번에 춘생문사건을 벌이셨다는 소식은 들었네.”
“마마님께오선 춘생문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소년은 다급하게 물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있었다.
“주상전하를 위한 충심이 과연 이범진 대감이라 생각되었소. 춘생문사건도 그 충심으로 벌인 일 아니겠소.”
“예…….”
“헌데 나에겐 어쩐 일로?”
춘생문사건을 일으킨 이범진. 엄선영은 이 소년이 자신에게 온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범진은 위기에 빠져있었다. 그는 도망 중이었고 붙잡히는 날이면 처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개 궁녀인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선영은 담담히 소년을 보았다.
“이범진 대감께서는 엄선영 마마님의 획책이 늘 예사스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태를 타개할 수 있는 것도 마마님 뿐이라 하였습니다. 조정이 어지럽고 무뢰한들이 궁을 점령하고 있사옵니다. 주상전하를 구출해야하지 않겠사오리까?”
“생각해볼 일이오. 나 역시 그러한 일을 하면 이범진대감처럼 처형을 당할 것이오. 천하의 이범진대감께서 하지 못한 일을 어찌 하찮은 궁녀가 할 수 있겠소.”
엄선영은 짐짓 물러났다.
“이범진대감은 마마님만 믿고 있사옵니다. 또한 그저 협조해달라는 뜻은 아니옵니다.”
소년은 꾸러미를 풀었다. 헤아릴 수 없게 흐트러진 은자.
“성사되면 더 큰 재물을 마련해올리오리다.”
“죽고 나면 재물이 무슨 소용이오. 폐하를 구출하고자했던 춘생문사건이 고작 두 달 전일세. 잡히면 모조리 죽는 것이 분명하지.”
엄선영의 반응이 냉담하자 그는 다급하게 얼굴을 들어올렸다.
‘이범진 대감의 아들인가.’
선영은 그 다급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정체를 숨기느라 아버지를 대감이라 칭하는 듯하였다. 잡히면 바로 아버지가 죽는 상황. 대감의 집에서는 얼마라도 돈을 가져다 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사색이 된 도령의 앞에서 선영은 다시 말을 고쳤다.
“농담이오.”
“예?”
“나 역시 언젠가 주상전하를 구출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이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내가 이리 말하는 것은 그대도 죽음을 각오해야하고 신중해야한다고 말하는 게요. 자네는 나가서 내 소문을 안좋게 내도록 하게. 돈과 권력을 탐하고 주제를 모르는 여자라고 말이오. 그 소문을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이미 안 좋은 소문은 많으니 말이외다.”
엄선영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예?”
소년은 당황했으나 엄선영이 무어라 말하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옵니까?”
“작전의 일부요. 할 수 있겠소?”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만.”
“내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으로 소문내주시오.”
엄선영은 웃음을 흘렸다. 소년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작전이라면 무어든 못할 것은 없었다. 그는 각오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의 뜰은 얼어붙어있었다. 한 달만 더 지나도 봄일테지만 아직은 겨울에 가까운 날씨였다. 봄이 오기 전에 가장 추운 나날들이 궁궐 안팎 이 곳 저 곳에 묻어있었다. 궁궐에 들어와 선영은 정금과 숙양, 소화를 보았지만 최상궁은 보지 못했다. 을미년에 중전마마가 살해당할 적에 세자저하를 막아서다가 몸을 다쳐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궁녀는 필요가 없었다. 최상궁은 퇴궐을 명령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너무한 처사야. 내쫓다니 그 분께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정금은 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밖에서 뒹굴다 오니 꼭 뵙고 싶었는데 아쉽구려. 왕실의 종이니,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필요가 없는 것이 궁녀아니던가. 하사품은 받으셨던가?”
엄선영이 정금에게 대꾸했다.
“받으셨다면 내 이리 분하지는 않지.”
정금은 진정 분한 모양이었다.
“엄가! 자네가 권력을 잡거든 날 좀 퇴궐시켜주게. 명예롭게 나갈 방법을 연구해보세.”
“그런 말을 하는 궁녀는 자네밖에 없을 게야. 하지만 내가 어찌 자넬 놔주겠는가.”
엄선영은 정금을 보며 허허 웃어버린다.
“웃지 말게. 바보같네. 그래도 이회에게 자네를 소개시켜준 일도 있지 않은가? 자네가 입궁하였을 때 모두 기뻐했지만 가장 섭섭하였던 이가 이회일 걸세. 나보고 어떻게 입궁시키지 않는 방법은 없겠냐고 하더군. 그 동안 정이 들긴 들었나보이.”
“원수로다.”
“그리 말하지 말게. 내 그의 성품을 믿어 자네에게 소개시킨 것인데, 헌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정금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길을 보았다. 가는 방향이 요상하다싶었다. 가마가 있는 창고가 아닌가. 왕실의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가마를 쓸 일은 없었다. 정금은 선영에게 눈짓했다. 이 곳은 왜 왔냐는 물음이었다. 선영은 허리를 두드렸다.
“어유, 요새 허리가 아파서 다닐 수가 있어야지!”
“설마.”
정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이 가마를 선영이 쓰겠다는 그런 무엄한 생각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선영은 태연하게 다가가 가마를 살피며, 어느 것이 좋을까. 얌체같이 고르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정금이라도 기겁할 노릇이었다.
“자네, 자네! 나오게! 미쳤는가!”
“왜 이러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금 자네인데 이해해줄 수 있잖은가?”
안에 들어가보기도 하는 선영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던 정금이 마침내 피식 웃었다.
숙양도 궁궐 안에서 벌어진 그 일을 전해들었다. 정식 나인이 된 소화가 달려와 궁궐 안의 소문을 전하였는데, 숙양은 머리를 붙잡았다. 친구라 하는 정금이나 선영이나 둘 다 평범한 궁녀들은 아니었으나 정금은 잔잔한 사고는 있어도 큰 일은 없는 것에 비해 선영은 갑자기 커다란 일을 터트리고는 하였다. 소화가 전하길 궁궐 안에 커다란 가마가 예법에 걸맞지 않게 휘젓고 다니고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정5품 지밀상궁인 엄선영이라는 것이었다. 그 보다 품계가 한참 높은 대감들도 걸어다니는 판이었다. 누가 봐도 그 것은 미친 짓이었다.
“마마님! 엄상궁마마님께서 미치셨나보옵니다!”
평소 엄선영을 따르던 박소화는 숙양을 향해 무릎꿇은 채, 존경했던 엄선영의 변모가 못내 안타까웠는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숙양은 소화를 달랬다. 그리고 숙양은 선영을 따지듯 나무랐으나 엄선영은 숙양에게도 아무 말하지 않고,
“내 발이 아파서 어쩔 수 없다네.”
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숙양에게 더 큰 배신은 그 다음 날이었다. 자신 앞에서 울던 소화가 떡하니 다른 작은 가마에 앉아 오가는 것이 아니던가. 궁궐 안에서 커다란 가마와 작은 가마 두 개가 바쁘게 오가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매일 연출되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이야!”
숙양은 분통을 터트렸다.
“마마님, 그래도 정가 항아님께는 알려야하는 게 아닌지요.”
소화는 엄선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마 안에서 오고 가는 동안 엄선영이 다른 뜻이 있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양은 감정을 숨기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단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숙양이 그러지 않으면 부자연스러워지니까……. 나중에 보답하면 된다.”
“하기야 친위대 대장의 부하들이 구석구석에 사람을 심어두었다고 하더이다. 정가 항아님께서 화를 내 주신다면 의심은 싹 거두어지겠군요.”
소화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선영을 보았다. 궁인들도 다 믿지 못하는 판이었다. 일본인들은 곳곳에 궁인을 심어놓은 터. 무심코 내뱉은 말이 독수가 되어 되돌아올지 몰랐다. 누가 매수되었는지 알 수 있을 도리가 없으니 조심해야만 했다.
“응. 화를 내주는 숙양의 역할도 이 일을 성사시키려거든 꼭 필요한 것이니. 그런데 소화 너도 나와 같이 욕을 먹어서 어찌하느냐.”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광스러운걸요!”
소화는 진심으로 즐거워보이는 듯하였다. 가마를 들출 때마다 얼굴이 환히 드러나보이는 판국에 그 가마의 정체를 안 자들은 하나같이 그 가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였다. 지엄한 왕실의 법도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전 민씨가 내전을 다스릴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일개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토록 거만하고 무례할 수는 없었다. 대궐의 가마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물건이었다. 대감들도 물론이거니와 상궁 따위가 사사로이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귀한 손님이 있는 날에나 쓸 수 있을까. 일상적인 도구로 쓰는 것이 아닌 법이다. 그러나 임금이 아무 말도 않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나 궁궐의 주인은 임금이었다.
‘저러다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두고봐라.’
‘나라가 정말 망해가는군. 못생긴 게 총애받는다고 하는 꼴이라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저주하였고 조정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그 우스꽝스러움을 비웃긴 하였으나 권세를 잡고 능수능란한 외교로 골머리를 썩혔던 민비보다는 훨씬 편리한 인물이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저 꼴을 보아하면 천박하게 사치를 일삼다가 저절로 무너질 인물이었다. 선영은 그런 눈초리들을 그대로 느끼며 만족했다. 왕을 미공사관을 탈출시키려고 했던 춘생문 사건 이후로 궁궐의 출입에는 삼엄한 감시가 뒤따랐으나 엄선영의 가마가 1주일간 오가자 경비원들은,
“저건 엄상궁의 가마야.”
라고 말하며 가마를 들추어보지도 않은 채 맞이했다. 엄상궁은 가마를 탈 때마다 엄청난 돈을 경비원들에게 쥐어준 터라 그 존재감은 더욱 확실했다.
“여편네, 손도 크지.”
“얼마나 뇌물을 받아쳐먹었으면 돈이 저렇게 많나 그래.”
“그따위 심성이니 저런 꼴로 다니겠지. 원, 돌아가신 중전마마가 훨씬 나으신 분이네. 출신성분부터가 다르니, 퉤!”
선영은 그들이 가마를 들추어보지 않고 돈만 받기 시작하자 슬슬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굳이 속을 들추지 않아도 누구보다 큰 존재감을 지니는 우스꽝스러운 큰 가마였다. 그들이 소홀히 하는 것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는 매수했던 가마꾼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돈을 받고 움직였던 가마꾼들이었으나 계획을 실행하는 날 임금을 태우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갈 것이라 말하자 그들은 그런 계략을 상상하지 못했던지 놀란 눈초리였다. 엄선영이 들키는 날이면 내 목숨은 물론 당신들의 목숨도 없으리라 말하였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으나 이리 된 판이면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오늘은 빈가마로 들어가 보세요.”
“네. 마님.”
명령을 받고 갔던 가마꾼들은 곧, 무엇을 잊어버렸네하는 변명을 하며 돌아왔다. 보초들은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았다. 가난한 수문병들로서는 많은 돈이 기꺼웠기에 가마의 출입은 늘 호의적이었다.
“뒤지지 않더이다.”
선영과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엄선영은 깊숙한 밤이 되자 왕의 침전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왕은 자지 않고 있었다.
“폐하, 엄상궁이옵니다.”
왕의 헛기침에 엄상궁은 들어서서 절을 올렸다.
“때가 되었사옵니다. 이 아귀굴에서 어서 벗어나셔야지요.”
“자네가 말한 계획대로 이 일이 되겠는가?”
“미리 한 차례 실험해보았사옵니다. 실험도 성공하였사옵니다.”
왕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 일을 아는 것은 현재까지 왕과 자신, 나이든 환관 한 명과 소화와 가마꾼밖에 없었다. 왕의 저번의 실패가 뼈저린지 얼굴이 몹시 굳어있었다. 늦은 밤 왕세자도 영문을 모른 채 환관에게 이끌려 나왔다. 올빼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면 출발할 것이옵니다. 그 전에 혹 들킬까 두렵사오니 가마에 머무소서.”
왕은 큰 가마에 앉고 왕세자는 작은 가마에 앉았다. 며칠 째 엄선영과 박소화가 다니던 그대로였다. 거기에 칸막이를 다시 하여 큰 가마 안에 엄선영과 왕이 나누어 앉고 왕세자와 박소화가 나누어 앉았다. 닭이 울자마자 가마는 출발했다. 수문병들은 잠이 덜 깬 듯 아침부터 서성거리는 가마꾼들을 보며, 꼭두새벽부터 마마님이 어쩐 일루. 라고 잠시 투덜거리는 듯하였으나 가마꾼들이 건네는 돈을 받고 하품을 하며 가마 두 대를 통과시켰다. 가마는 곧바로 웨베르 공사가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날이 밝자마자 일정을 챙기던 대신들은 기겁하였다.
“대군주 폐하께서 없어지셨사옵니다!”
“동궁께서도 보이질 않습니다!”
아침이 되자 조정이 아연한 속에서 궁인들도 궁궐에서 생활하던 엄선영과 박소화가 사라졌던 것을 알았다. 그제야 궁인들은 무릎을 쳤다. 대다수의 궁인들도 자신에게 칼과 총을 겨누고 머리채를 휘어잡혀 내동댕이쳐진 그 기억이 좋을 리는 없었다. 특히 며칠 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숙양이 가장 안도하여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모험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붙잡히지는 않을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정금은 ‘역시 엄가.’라며 웃었다.
왕의 행방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러시아공사관으로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평소 임금이 러시아공사관을 특히 아낀 터였다. 러시아의 황제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멕시코로 발령이 난 웨베르공사관을 더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까지 한 일이 있었다. 현재 일본과 맞서면서 조정에 친화적인 국가는 러시아가 대표적이었다.
조정대신들은 서로 모여 수근거렸다. 임금과 왕세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허울뿐인 임금이라도 법이 있는 한 모든 명령은 그의 결제를 받아야만 한다. 그를 협박해서라도 결제를 하게 하려면 어쨌든 임금은 수중에 있어야하는 인물이었다. 그게 안된다면 그를 폐위시켜 왕세자를 임금에 올려 꼭두각시로 삼아야하는데 그 후계자 역시 빼앗겨버린 것이다. 일본은 왕이 도피하려고 마음먹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공사는 작년 11월에 기밀전보를 보내어 왕의 도피가 우려되어 군사를 더욱 요청하고 있었으니 그게 석 달 전. 그러나 그들은 강력한 군사로 호위하고 왕을 위협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성공할 줄은 몰랐겠지.”
김홍집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는 비록 친일파였으나 언제나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런만큼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이는 없었으나 그는 일본의 태도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조정은 혼란에서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범인을 색출해낸 듯하였다. 엄상궁! 그 엄상궁이야! 궁궐은 대감들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오가며 시끌시끌하였다. 김홍집은 그들의 소란을 들으며 늘 무뚝뚝하고 열성적이었던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 멍한 얼굴은 마치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그 것이 오히려 함정이며 무기인 듯하였다. 그는 엄선영의 계략에 짐짓 웃었다.
‘생각 없는 자는 아니었군, 한 방 먹었어. 아냐. 진실로 정신나간 자일 수도 있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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