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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영은 그 소식을 듣고 머리가 멍했다.

그렇게 중전께서 돌아가셨네.”

중전마마…….”

망나니놈들이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모르네. 나도 운이 나빴다면 죽었지 않겠는가. 홍계훈대감께서도 돌아가셨으니.”

진정 충신이 돌아가셨구나.”

선영의 눈에 홍계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는 왕실에 누구보다 충성스러웠으며 왕이 의지할만한 무관이었다.

자네와 친하게 지내던 수랏간 나인이었던가, 신지소지도 죽었네. 도망치는 중에 마마의 가채를 쓰고 대신 죽음을 청한 듯하네.”

사람의 죽음이란 허무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 전의 얼굴이었으나 지내던 추억이 맴돌아 쓰라렸다. 궐 안에는 또 몇 구의 시체들이 있을까.

궁 안에는 다시 친일파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곧 밝혀질 걸세. 일본군의 짓이라고 말이야. 그러나 이제 중전께서 계시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한단 말이냐.”

어떻게 해야하냐니.”

조선이 나아갈 방향은 어때야할 것같니. 엄가. 자네의 생각을 묻는 거라네.”

내 조선의 상태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엄선영은 무뚝뚝하게 내려간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하였다. 바깥세상에서는 듣지 못했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미친 세상이었다. 선영은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란 것들은 양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정의도 전혀 없구나! 어찌 한 나라의 국모를 난도질을 해 살해한단 말인가! 또 어느 나라가 국왕과 왕세자의 옷을 잡아뜯고 총을 쏘아 협박한단 말인가!’

그 똑똑하던 엄가가 왜 이러누.”

똑똑하긴. 그 영민하시던 중전께서도 무도함에는 지셨네.”

자네 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소?”

엄선영은 눈에 불이 이는 듯했다. 궁으로 다시 돌아오라. 몇 년 만의 궁인가. 10년 째 쫓겨나있던 처지였다. 선영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을만큼 그 일이 믿기지 않았다.

궁으로?”

주상께서 자네를 부르실지도 모르네. 아마 조만간 연락이 갈거야.”

나를? 나를!”

그 것은 뜻밖이었다. 왕에 대한 엄선영의 감정은 충성과 함께 애와 증이 섞여 있었다.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하자 선영의 마음 속에 증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왜였을까. 그렇게 오래동안 자신을 버리고 신경쓰지 않았던 임금이 필요로 인해 다급히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섭섭해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선영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고 숙양에게 물었다.

주상전하께서는…… 어찌 살고 계시나.”

죽지 못해 살고 계시지. 대감들은 궁중에 속해 있다는 모든 표식을 찢어버리고 있다네. 혹시 궁궐 안의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하지. 서양 공사관에는 도망쳐온 사람들로 가득하고 말이야. 조선의 궁 안에 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틀 뒤,

외국 공사관들은 공포에 질린 왕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일본의 음모를 파헤쳤다. 왕비가 시해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자 흥선대원군은 자책하여 물러나기로 하였다. 왕은 자신도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궁궐 안에서의 무참한 살인. 그 것을 보거나 전해들은 궁궐 안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날달걀과 자신이 보는 앞에서 딴 연유통조림만을 먹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안타깝게 여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그 음식통은 열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임금의 부탁으로 미국의 선교사들은 두 사람씩 조를 짜서 밤마다 임금을 지켰다. 임금은 그 것을 편안히 여기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있다면 일본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닷새 뒤,

엄선영은 임금을 알현했다. 궁궐에서 버림받은지 10. 다시 돌아올 것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맡겨진 직책은 지밀상궁이었다. 늘 국왕의 옆에 있어야만하는 직책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래 전 그 때도 언제나 고민하던 국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고민을 넘어선 피폐함과 우울함으로 가득차 희망이 모두 꺽인 듯한 모습이었다.

전하, 그 동안 옥체보중하셨나이까.”

그래. 내 살아있으니 되었네. 자네는 건강하였는가.”

전하……. , 저는 황공하옵게도 그리 지냈사옵니다.”

선영은 자신의 묻는 말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 이 여윈 주상의 몸이 그 동안의 사태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병들어 있었다. 몸도, 마음도. 사소한 일에도 놀라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경쇠약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선영이 몸가짐을 잘못하여 자세를 잠시 고쳐도 그 안에서 비수라도 나오는 양, 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늙은 상궁들을 찾아 자네의 행방을 찾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더군. 자네의 인덕일세.”

늙은 상궁이라 하면, 최상궁 마마님이실까. 선영은 10년만의 궁궐이 낯설면서 들어선 지금도 그리웠다.

찾으신 이유, 아옵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옵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허허허.”

전하, 포기하지 마옵소서.

내 옆을 지켜주게.”

어찌 이렇게 변하셨단 말인가. 엄선영은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이제 믿을 사람이 없네. 언제고 있었겠냐만, 그래도 얼마 전까지 중전이 있었지. 나에게는 믿을만한 자가 없네.”

참으로 지독한 자들이옵니다.”

국왕과 엄선영은 치를 떨었다. 비록 자신을 내쫓았던 중전이었으나 엄선영은 이 사태에 치를 떨고 중전 민씨의 살해에 대해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9. 국왕을 구출하라

 

조정에서는 일본에게 점거당한 궁궐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이들이 계략을 짜고 있었다. 왕은 여러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을 구출하라 하였다. 그 밀명을 들은 대신들은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미공사관에 가고자 하였다. 중전이 살아있을 때 친러파였던 이완용은 그녀가 죽자 어느새 친미파가 되어 있었다. 윤치호도 피신성 유학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와 있었다. 윤치호와 이완용, 이범진 등은 일부 서양인들과 결탁하여 국왕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궁궐을 지키는 선교사를 늘리고 미국공사관에 피신시키는 계획에 협력하고 있었다.

알렌은 미국공사관에 피신시키는 것을 거절하였다 하지 않았습니까?”

엄선영이 선교사들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그대로 일을 진행시켰다. 현재 왕의 호위병들은 무장한 군사들이 아닌, 일본이 건드리지 못하는 외국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궁궐에 군사를 데려오기 위한 명분을 세웠다. 일본이 새로 왕후로 맞아들이려는 안동 김씨의 규수집으로 가서 그녀를 호위하여 데려온다는 명분이었다. 호위를 가장하여 그들은 무장하였고 임금을 빼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그 것은 드러났다. 그들이 춘생문으로 가는 동안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총소리는 궁궐 안까지 울려퍼져 궁을 소란스럽게 했다.

모의는 실패했다. 총격소리가 들리자 왕은 울부짖었다.

선교사! 선교사들을 불러라! 빨리 과인의 침소에 그들을 부르도록 하라!”

선교사들이 호위병들을 제치고 들어와 왕의 손을 잡아주었다. 왕은 어린아이같이 떨고 있었다. 거사 관련자 33명은 체포되었다.

일본은 그들을 체포해두고 한편으로 김홍집에게 왕비 시해의 하수인을 꾸며내도록 강요했다.

김홍집은 사람을 잡아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변란에 가담했으나 왕비를 시해하지는 않았던 이주희와 왕비의 시신을 훼손했던 박선과 윤석우가 왕비시해를 주도했다는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처벌받았다. 내려진 형벌은 사형이었다. 그 것은 일본인들이 왕후를 죽이지 않았다는 일본의 책임회피와 같은 형벌이었다.

그들의 처형이 결정된 날, 엄선영은 황급히 김홍집을 찾았다.

대감. 저들은 이번에 주상을 도왔습니다. 그들도 저들 죄를 알아 이번에 주상께서 피신하실 수 있도록 도운 게 아닐까요.”

엄선영은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더욱 무뚝뚝해져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죄책과 싸우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사람들이 전하께서 중궁이 살해된지 닷새밖지 되지 않았는데 여인을 부른 것을 보고 무어라 하는지 아시오?”

김홍집이 엄선영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엄선영을 상냥하게 대하기에는 그의 마음이 쫓기고 있었다.

무어라 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저잣거리의 소문이란 1의 진실과 9의 거짓이지요. 그러나 그 처벌이 너무 혹독하지 않나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어가 혹독하오? 조국의 왕실을 외국과 결탁하여 어지럽히고 국모를 처참히 능멸한 죄 처형하여 마땅하오!”

김홍집의 말은 역정과 같았다.

대감께서는 시해계획을 아셨습니까?”

김홍집은 마음이 얼어붙는 듯하였다. 선영의 말이 비수와 같이 박혔다.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은 방관했다. 알고도 방관한 것이다. 그들과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하는 것은 실상, 자신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홍집은 엄선영을 노려보다가 눈빛을 거두고 그대로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눈빛을 본 엄선영도 얼어붙는 듯하였다. ‘역시 대감은 알고 있었어.’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김홍집이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엄선영은 김홍집의 가담을 확신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감마저 가담하였어..’

일본은 조선의 조정에 큰 상처를 입히고 조선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춘생문 사건은 실패하였으나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엄선영은 느끼고 있었다. 사라지는 김홍집에게 엄선영은 말하였다.

폐하가 여기에 이 이상 계속 계시다면 온전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선영의 말에 김홍집은 멈추었다.

온전하지 못하다니?”

대감께서도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황실을 위한 길을 생각해주소서.”

선영의 말은 뒤통수에 닿았다. 김홍집은 보지 않고 걸었다. 걸으며 임금을 생각했다. 임금에게는 조선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던 젊은 청년의 풍모가 모두 사라져 있었으며 오히려 당장이라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연약함만이 남아있었다. ‘난 죄인이다.’ 김홍집은 중전시해를 묵과했던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자신이 없어지면 일본이 조종하는 친일파만이 이 조정에 남을 것도 두려웠다.

 

일본은 조선에서 친러파를 축출하고 친일파를 중심으로 새로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하였으며 연호를 건양으로 바꾸었다.

이 번의 개혁은 특히 더 일대 반발에 부딪히고 있었다. 단발령때문이었다. 기존의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부모가 주신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큰 불효에 속해있었는데 그들이 가위를 들고 나선 것이었다.

1986년의 새해가 밝자 그들은 맨 먼저 임금의 머리카락을 자르고자 하였다.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임금의 머리카락을, 내부대신 유길준이 왕태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왕은 허허로와 했으나 머리를 자르는데 그다지 불만은 없는 듯하였다.

편치 않사옵니까?”

선영이 허한 표정의 왕에게 묻자 왕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허하긴 하나 세상의 힘있는 자들이 머리를 자르는 판 아닌가.”

그러나 태연한 왕에 비하여 전국의 유생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생을 유학에 매진한 학자들이었으며 그 학문에 대입하자면 머리를 자르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불효요 불충이었다. 사람들은 붙잡혀서 강제로 머리를 잘리며 울거나 절규했다. 왕비를 살해한 이들이 시행하는 것이라 그 분노는 더했다.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쓰게 웃었다. 왕은 아무렇지 않은데 백성만 분노하는 단발령에 대한 유머같은 해프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은 조선의 왕이었으나 조선의 백성들은 나약한 왕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쓰렸다.

일본은 감히 대궐 안에 들어와 왕족을 천대하고 멸시한 자들이다. 심지어 청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일은 있지 않았거늘 왕 자신도 그 죽음들과 옷이 찢긴 멸시를 도저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조선땅에 개화를 시킨다고 말하고 있었고 개화에 찬성하던 왕은 일본의 개화가 자신이 원하는 개화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개화는 해야한다고 자신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려는 자신을 일본은 언제나 성가셔하고 있었고 개화를 하려는 자신을 백성들은 언제나 미워하고 있었다.

…… 나의 행방은 어디인가?

그는 고민하였다. 그래도 험악함이 닥칠 때마다 중전 민씨와 의논하였고 나라를 위하면서 개화를 하고자했던 그 마음이 그녀와 자신은 일치하였었다. 지금은…….

불안하다.”

왕은 엄선영에게 말했다. 엄선영은 선교사에게 둘러싸인 왕을 보았다. 일국의 왕이 외국 선교사들에게 둘러쌓여 보호를 받고 있는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일국의 통한을 느끼게 하였다.

불안하구나.”

자신의 백성도, 가족도, 조정의 신하도, 그 누구도 왕을 보는 눈은 따스하지 않다.

엄상궁. 자네도 오늘은 가지말라. 불안하구나.”

알았사옵니다. 그러니 우선 식사를 하옵소서.”

왕은 자물쇠를 열어 외국공사관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먹었다. 왕의 식사라는 기품은 전혀 없었다. 왕은 걸신들린 듯이 먹었다.

이래서는 아니된다. 이래서는 아니돼.’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왕을 보며 엄선영은 이 상황을 반드시 타개해야할 것이라 생각했다. 춘생문 사건이 끝난 이후로 왕은 더욱 스스로에게 실패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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