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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황자의 탄생

 

220일 겨울, 경운궁으로 환궁이 이루어졌다. 가마를 탄 왕과 가마를 탄 엄선영은 백성들의 호기심어린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어쩔 수 없었던 선택. 왕과 선영만이 통하는 대화가 있었다.

일본이 천황이라 하는데, 일본에게 문물을 전했던 조선이 언제까지 대군주일 수는 없을 것일세.”

모처럼 조정의 단상에 오른 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관에 있는 동안 조선은 많은 이권들을 외국에게 넘겼다. 그 것은 힘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구차하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조선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키우고 있었지만 일본의 경복궁 침입 때 그들을 싸우지도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최신무기들은 다 버려지고 군인들도 없었다. 노력은 반복해서 물거품이 되었고 조선은 힘이 없었다. 조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야욕은 일본이 왕후를 죽이는 것으로 세상에 드러난 터. 그런 상황에서 자국을 지키는 방법은 이권을 강국에게 골고루 나누어 서로 견제토록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지만 신하들이며 백성들이며 모두 구차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공통된 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구차스럽게 보는 그 시선이 왕은 싫었다. 청나라와의 관계야 옛부터 그러했지만 자신의 궁궐까지 어지럽히고 왕후를 죽였던 일본에게까지 신하라고 칭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폐하 다음으로 왕전하로 내려가는 현재의 체계에서 그 중간인 대군주는 역시 황제보다 아래였다. 청나라가 위세등등할 때는 공포였으나 지금은 청나라의 힘도 약화되어 있었다.

대군주의 그 말을 신하들은 눈치빠르게 알아챘다. 그 날 이후로 그에게 황제의 위에 오르기를 청하는 상소가 줄지어 올라왔다.

심순택이 대신들을 이끌고 황제가 되도록 청하길 아홉 번. 왕은 드디어 승낙하고 제단을 쌓을 곳을 정했다. 남별궁에 원구단을 쌓기 시작할 즈음에는 엄선영의 배는 남산만큼 불러와 있었다. 몸이 그런데도 일을 쉬지 않는 엄선영을 보며 사람들은 다들 독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조선의 국정은 그 나라가 약한 만큼 살아남기 위해 매우 복잡하게 고민해야만 했고 그 통에 일이 너무 많아 왕비의 시호를 정한 것도 그 해 1월이었다. 명성왕후의 제사가 다가오자 엄선영은 더욱 분주했다. 임금은 황제의 위에 오르는 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명성왕후에 대한 건은 전적으로 엄선영에게 맡겨져 있었다. 아직 시신도 거두지 못한 그녀였다. 국장도 치르지 못한 그녀의 첫 제사. 그 첫제사를 중전 민씨에 의해 쫓겨났던 엄선영이 치른다.

선영에게 있어 명성왕후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처음은 동경, 능력에 대한 존경, 사람을 혹독하게 대하는 데에 있어 원망과 미움, 연민, 동정…….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고 나서 가장 큰 감정은 동정이었다.

아이를 임신한 지금에서야 더욱 크게 느끼는 것이지만 이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졸도해버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끔찍한 것이리라. 그 것을 이 여자는 다섯 번이나 겪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세자도 병약함과 싸우고 있다. 게다가 그 오만하고 기품있었던 자의 마지막 최후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엄선영은 수랏간에 가서 제사음식 준비를 꼼꼼하게 살피고 음식을 나르는 것을 스스로 했다.

가장 크게 지내야한다. 원혼을 위로한다고 생각하고 지내자꾸나.”

엄선영은 내전에서 가장 큰 존재로 부상해 있었다. 어린 나인들은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할 정도로 그녀가 쥐고 있는 권력은 컸다. 그런 권력을 가지고 가장 일을 열심히 하는 그녀를 보며 다들 부담스러워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 존재감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엄선영이 임신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것은 단순히 동정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유없는 공포감이 선영에게 엄습하고 있었다. 왕의 자식은 많이 죽어왔다. 아름다웠던 왕자 완화군 선도 이른 나이에 죽었으며 명성왕후의 많은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아이가 죽는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무당에게 집착했던 명성왕후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세상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 알 수 없는 일에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원혼이 내 아이를 해한다면.’

엄선영에게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왕후의 살기가 소름끼치게 닿아왔다. 그 살기가 내 아이를 죽인다면.

이유없는 공포였다.

엄선영은 명성왕후에게 집착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화가 났거나 하더라도 그 것을 풀라고. 그녀는 그 제사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제사를 보살피고 명성왕후의 얼굴을 보며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 대군주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겠소. 연호도 건양에서 바꾸도록 하고.”

내실없는 황제였으나 황제라는 말은 근사했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의식한 황제라는 칭호였다. 그 일본을 의식하게 만든 사건은 을미사변, 명성왕후가 죽은 사건이다. 황제도 명성왕후의 제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임한 몸이신데 쉬소서.”

나인들이 엄선영을 걱정하였으나 엄선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일을 돌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

마마님!”

엄선영이 쓰러지자 모든 이들이 놀라 달려들었다. 엄선영은 머리가 하얗게 되는 듯 했다. 경험이 많은 나이든 상궁이 꿇어앉아 선영을 보며 외쳤다.

산통이옵니다!”

빨리, 빨리 뫼셔라!”

방으로 옮기는 소동이 있는 동안 일하던 나인들도 질린 눈으로 엄선영을 보았다.

저 지경이 되도록 일하다니 미친 사람아닌가.”

, 경을 치려고 그래.”

독하다, 독해.”

엄선영을 경계하던 그 또래의 여인일수록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밭가는 여인들은 저럴 수 있었지만 궁중의 여인 중에 어느 누가 저럴까.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방 안에 흰 줄을 잡고 누워서 엄선영은 신음했다.

마마님!”

소화가 다급하게 말하며 옆에 있었다.

아이는 건강하겠소?”

엄선영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의녀와 나이 든 상궁을 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엄선영의 긴 비명과 함께 피에 둘러쌓인 아이가 세상의 공기를 삼켰다. 그들은 탯줄을 잘랐다. 아이는 세상에 신고식을 하듯 커다랗게 울어댔다. 귀가 먹먹하게 울어대는 그 음성이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였다. 선영은 우렁찬 그 울음소리가 반가웠다.

으애애앵! 으애애앵!”

감축드리옵니다. 황자님이옵니다.”

아이의 탄생. 그런데다가 황자라니, 하늘이 축복하신 것이다. 엄선영은 하늘에게 감사하며 자신이 빌었던 모든 것에 감사했다. 아이의 탄생만으로도 한 여자로서 한 어머니로서 기뻤지만 그가 태어난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이제 자신은 단순히 못생겼는데 총애를 받는 이해되지 않는 여자에서 황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의 탄생은 이제 자신에게 도전할 세력이 없는 것을 뜻했다.

얼굴을 뵙고 싶네. 어찌, 건강하신가?”

물론이옵니다. 아주 잘생긴 황자님이옵니다.”

엄선영은 쪼글쪼글한 황자의 얼굴을 보았다. 갓 태어나 붉고, 울고 있었다. 그녀는 황자를 끌어안았다. 핏물이 얼굴에 묻었지만 궁인들은 감히 엄선영을 말리지는 않았다.

 

하루가 지나자 황제가 방을 찾았다. 황제는 간만에 싱글벙글이었다. 아이를 보자 더욱 다정하게 눈을 휘었다.

건강하군.”

그의 따뜻한 눈길과 그 말은 그 동안 많은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본 아비의 마음이 들어있었다. 그는 많은 자식을 낳았고 자식을 사랑했으나 지금까지 2명의 자식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훗날의 순종인 왕세자 이척과 의화군 이강이었다. 그러나 이강은 회임했을 때부터 명성왕후가 쫓아내어 외가에서 큰 터라 자신의 자식으로는 잘 생각되지 않았고 성품도 방탕하여 자신과는 대립되는 면이 있었다. 그랬기에 황제로 등극하고도 이강은 신경쓰지 않아 왕의 칭호를 내리지 않고 의화군으로 놓아두고 있었다.

순종의 아들뻘되는 건강한 아이. 그 것만으로도 황제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순종은 늘 병약하여 언제 대가 끊길지 알 수 없었는데 든든한 여자로부터 태어난 든든한 자식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선물을 내릴테니. 수고하였소.”

황제는 누운 엄선영의 손을 꼭 잡았다.

황제의 약속은 바로 이튿날부터 실행되었다. 각종 선물은 물론이오, 칙명이 바로 떨어진 것이다.

귀인으로 봉하노라!”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귀인의 품계는 종 1. 그리고 엄선영의 현재 신분은 지밀상궁, 5. 품계가 한 번에 7단계나 올라간 것이다. 엄선영은 누운 몸을 일으켜 벌떡 일어나 칙명을 전한 이를 보았다. 옆의 박소화와 모처럼 찾아온 숙양도 깜짝 놀랐으며 그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호는 무엇인지요?”

소화가 당돌하게 물었다. 후궁에게 내려지는 당호가 아직 칙명을 전하는 상궁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곧 내려진 당호에 엄선영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경선당. 경사 경에 좋은 선을 써서 경선당이니 그 당호에 임금이 얼마나 엄선영을 아끼는지, 지금의 심정이 얼마나 기쁜지 드러나 있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임금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했다.

 

귀인마마, 폐하께서 드시옵나이다.”

엄선영은 며칠을 누워있었다. 어느 날, 새로 올라온 지밀상궁이 흰 끈을 두르고 누워있는 엄선영에게 고했다. 임금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불안해하는 걸 알지만 불안해할 것 하나 없네. 우리 황자가 크면 자네의 직급은 더 올라갈 것이고 짐이 마음 같아서는 더 올리고 싶었으나 신하들의 반발이 두려워 차마 올리지 못했네. 마음 같아서는 더 높은 직급을 주고자했던 것이 내 마음인 것을 알아주게.”

그는 진심으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건강한 아이로구나. 참으로 건강해보이오.”

왕은 엄선영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정신없이 바라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엄선영은 자신을 지원해주었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지위에 대한 대응을 대신했다. 특히 박소화, 정숙양, 소정금, 신지소지는 기와집을 한 채씩 내려받았다. 궁궐은 금새 엄선영이 손이 크다는 소리를 주고 받으며 떠들썩 했다. 그러는 동안 왕은 아라사공관에 있는 동안 위세를 떨쳤던 통역관들을 처형했다.

통역관들은 러시아 근방에 살던 동포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민들이 들어와 조상들의 신분까지 양반으로 높이며 역관으로서 살았으니 선비들 눈에 그 것이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왕은 아관에 있는 동안 그런 통역관을 수십명을 뽑아 관직이 높여주고 사용했던 터였다. 그 중에서도 김홍륙의 위세가 가장 대단했으며 벼슬도 대단했다. 그러나 뼈대없는 가문에서 목에 힘을 주는 것을 유생들이 두고만 볼 리도 없었다. 또한 황제도 그들의 행태를 마땅찮아하지 않았다.

토사구팽. 그 속담이 알맞게 황제는 서울에 멀리 떨어져 있던 김홍륙에게 커피에 독을 탔다는 죄명을 씌웠다. 그 죄명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눈치빠른 이들은 알았다. 그러나 무성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재판받지 못한 채 그는 죽었다.

선영은 누운 채 그 소문을 모두 전해들었다. 잔인한 일이라 여겼던지, 왕은 엄선영의 앞에서 그 일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으나 선영은 먼저 왕에게 말을 하였다.

김홍륙 대감이 죽었다면서요.”

그 횡포가 심했소. 어차피 이제 러시아통역관도 그만큼은 필요가 없으니 그 처벌을 확실히 한 것이오.”

토사구팽.’

그의 죽음을 보며 엄선영은 그 사자성어를 계속 생각했다. 황제폐하는 온화하다는 평을 언제나 듣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사냥에 성공한 필요없는 사냥개를 죽이는 일도 빈번한 사내였다. 쫓겨난 모든 상궁을 보아도 그랬다. 자신이 비록 종 1품 귀인이었으나 후궁 중 아무도 대우를 받는 이는 없었다.

뒤처지면 죽는다. 나는 뒤처지면 죽어.’

러시아 통역관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 것을 냉담하게 보고는 있었으나 선영은 이제야 이소용돌이 위에 선 자들의 본질이 보이는 듯 하였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후에 필요가 없어진다면 저를 버리실 것이오리까.”

자네는 왜 그리 불안해하는가. 자네를 특별히 여기는 내 마음이 보이지도 않는가.”

왕은 그런 선영을 섭섭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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