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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두려움을 위한 견제

 

그러나 두려움은 두려움일뿐, 조선땅에서 그녀는 왕의 총애를 받는 동시에 실무에 능한 권력자였다. 황자가 무럭무럭 커가는 그 시기가 엄선영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유길이라는 이름을 받아 지내던 황자는 1900년이 되어 만 세 살이 되었다. 이제는 정식칭호를 받을 나이였다. 그는 이름을 이은이라고 정하고 영친왕의 호칭을 받았다. 그가 그렇게 커갈 동안 엄선영은 걱정이 되는 인물이 한 명 생겼다.

이강.’

장상궁의 아들, 이 강. 황제는 강을 좋아하지 않았다. 엄선영이 불안해하자 그 근원이 강이라 여기고 더욱 박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미움받는 아들이었으며 외가에서 무예와 학문을 닦으며 궁궐 안의 생활을 모르고 자연인으로서 자란 이강이었지만 그래도 왕가의 핏줄이라는 그 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작년에 엄선영은 따로 이강을 만났다. 강은 부드럽고 소년같은 아버지와는 달리 기질이 격렬했고 인물도 아버지와 같이 부드러운 편이 아니었고, 이목구비가 강하고 훤칠했다. 자신감이 넘쳐 무례하기까지 한 그 태도는 어머니의 것인가 싶기도 하였고 할아버지인 흥선대원위를 보는 것같기도 하였다. 만일 이 청년이 흥선대원위를 닮은 것이라면 황제가 싫어하는 이유도 짐작이 갈 듯하였다.

그는 시원한 바람이 오두막의 탁자에 퍼질러 앉아 가마를 타고 온 손님을 박대하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요새와 같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박제가 된 짐승들이 군데군데 장식처럼 걸려있었다. 사슴의 뿔이 천장을 들이받을 듯이 높게 뻗어있다.

그 요새와 같은 집을 보면 그가 사냥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는 눈에 띄게 엄선영을 경계하고 있었다.

엄선영을 그 모습을 보며 흥선대원위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집스럽고 강했던 임금의 아버지. 마지막에는 청이며 일본에게 이용당했던 그의 아버지. 민후시해에 까지 관련되어 있던 아버지. 임금은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했었다.

흥선대원위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임금은 끝내 그의 임종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는 것은 크나큰 불효였으나 임금은 끝내 가는 것을 거부했다.

왜 왔소?”

어머니보다는 흥선대원위를 닮았는지도 모르겠군…….’

왜 왔냐고 묻지 않소.”

왕의 자손을 보고 싶었습니다.”

엄선영의 말에 강은 가가대소했다.

파하하하! 나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겠지요. 나를 어찌 죽일까한 것 아니오?”

그는 웃으면서 엄선영을 쏘아보았다. 강이 웃는 모습은 섬뜩했다.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 게 아니옵니다.”

아하! 그러면 말이오. 왜 황제즉위식에 난 부르지도 않고 아직 군이란 말이오? 당신이 내 대우를 해서 불렀다면 당연히 나는 왕으로 불려야하는 것이 아니겠소? ?”

그는 호탕했다. 호탕하였기에 백성들에게서는 임금보다 강의 인기가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러하였기에 엄선영은 더욱 그가 경계되었던 것이다. 임금의 인기도, 자신의 인기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유길이에 대한 지지도 민중들이 이강을 좋아하는 것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장차 유길의 앞날에 큰 장애였다.

위험한 인간.’

게다가 호위도 없이 여기에 오다니 호랑이굴에 머리를 들이민 것 아닌가? 임금이 사랑하고 자시고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 여자야.”

엄선영은 자신의 목을 보았다. . 칼빛이 섬뜩하다. 그는 엄선영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 까지 한 것이다. 그의 원한을 지독하게 잘 알 수 있었던 동시에 엄선영은 이강에 대한 판단을 확실히 했다.

무언가 배워보고 싶지 않소?”

뭐라고?”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서로 좋은 일 아니옵니까.”

뜬금없는 말에 강은 놀랐으나 순간 판단하기 위해 이강은 머리를 굴렸다. 틀림없이 이 나라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수작인 것이 눈에 보였지만 실상 이 나라에 있어서 위험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며, 공짜로 세상을 보고 여행을 갈 수 있는 것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칼을 거두었다.

잘생각하셨소. 그 것이 우리 둘 모두를 위한 길이오.”

, 여우같은 여자.”

이강은 비꼬며 이번에는 활을 빼어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시위를 당겨 화살을 창문너머의 허공에 쏘아올렸다.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목적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선영은 이강의 분노가 저 화살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강을 만나고 돌아온 엄선영은 그를 미국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왕들의 금전을 책임지는 이용익을 불렀다. 이용익은 임오군란 때의 인연이었다. 그의 남달리 빠른 발로 중전이 있는 곳과 한양을 오갔고 그 공을 인정받아 물장수였던 그가 벼슬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대신인 것도, 엄선영이 귀인인 것도 어쩌면 혼란스러운 때에 태어난 덕인지도 모른다.

의화군의 용돈을 삭감하거나 몰수하세요.”

?”

다분히 감정적인 처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엄선영은 제 목에 놓였던 그 칼날의 섬뜩함과 기분나쁨을 잊지 못했다.

어차피 외국에 가면 공사관을 찾아 돈을 달라 하실 겝니다. 그 분도 23세 청년이니 강하게 크셔도 되오.”

예상대로 의화군은 돈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가 요청한 곳은 한국공사관이 아닌 일본 공사관.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터에 일본공사관에 돈을 요청한 그는 민중의 비판과 아버지의 격노를 또 한 번 사게 되었는데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엄선영이었지만 궁궐은 이강이 엄선영의 미움을 산 것이 틀림없다며 발빠르게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그 것은 반갑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다. 엄선영은 성실하게 업무를 돌보며 유생들의 호감을 서서히 사고 있었고 그들이 이강을 배척하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

다행히 궁궐에서는 이강의 입지는 좋지 않은 터였다. 백성들에게는 그 호방한 성격이 인기가 있었지만 궁궐 내에서는 그가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방탕하다는 점에 있어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으며 사람이 깊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딱히 용돈을 끊지 않아도 미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노느라 돈을 너무 써서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닮아있기는 하였으나 그는 그의 할아버지보다 심중이 깊지는 않은 듯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도 파락호의 시절을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강을 미국으로 보내놓았지만 그의 성품이며 사회적인 입지며 엄선영은 이강을 생각하면 늘 무거웠다. 그의 격렬한 기질에 찬탈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3살이 된 영친왕 이은이 영친왕으로 임명받는데 그 형이 아무런 왕호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 놈에게 의친왕의 호칭을 내려야한다니!”

임금은 자신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엄선영보다 더욱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미 죽은 이강의 어머니 장상궁에게는 왕을 낳은 어미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직책이 주어지지 않았고 엄선영은 정 1품인 순빈으로 올랐다. 다분히 편애가 드러난 처사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것을 두고만 볼 리 없었다. 그러나 상소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이강을 낳은 장상궁은 상궁이었을 뿐 후궁이 되지 못했다. 조정의 사람들은 편파적인 정책에 불만이 쌓였다.

그 엄선영은 그 중에서 자신의 친구가 섞여 있으며 그 눈에서 자신이 떠난 것을 보고 마음이 싸했다.

소정금은 밤에 선영의 침실로 들어와 친구를 쏘아보았던 것이다.

자네 변했더군.”

밤늦게 어쩐 일이오.”

완화군을 완친왕으로 추존한 것을 대단하다고 해야하는가? 엄가.”

높은 직책이었던 자신을 높여주던 친구였으나 이번에는 무례하게도 반말에 비아냥이었다. 그 말인즉 엄선영이라면 완화군을 왕으로 높이지 않았을 것인데 그 당연한 예법을 수행하는 것이 큰 마음의 결심이었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엄선영은 그 말을 알아듣고 당황하였으며 또한 갑작스런 그녀의 적의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네는 숙원 이씨를 그리 대하면 아니되네. 엄가.”

소정금은 왕호를 변경하는 동안 죽은 완화군의 어머니 숙원 이씨를 꺼내어 엄선영에게 말했던 것이다. 숙원 이씨. 그녀야말로 불행한 여인이었다. 궁궐에서 눈에 띄는 미인이었으나 아이를 낳고 궁궐 밖으로 내쫓겨 살았다. 측은하게 여긴 왕이 끊임없이 쌀을 보내어 보살피기는 하였으나 그 삶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되었다. 12살 된 아들, 완화군이 홍역에 걸려 죽자 숙원 이씨는 실어증에 걸린 채 정신까지 약간 이상해진 상태였다. 그 것으로 그녀의 악운은 끝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였으나 영보당에 화재가 나서 그녀의 얼굴은 흉측하게 타버렸고 미모를 잃은 그녀를 더 이상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직첩을 높여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선영으로서는 정금의 그 말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자신을 질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상궁에 대한 직첩만이 문제로 불거진 터에 숙원 이씨를 꺼내는 것이 정금답기는 했다. 완친왕은 이미 죽었으니 그 어미도 예법으로서 대우하는 것일 뿐 정신이 멀쩡했다 하더라도 권력은 없었을 것이었다. 4품 숙원이라는 볼품없이 낮은 품계에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네는 왜 나를 공격하는가? 장상궁의 일만으로도 힘든 판국일세. 날 좀 내버려두어.”

이강의 위협 이후 선영은 이강에 대한 증오심을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게 위협받은 것을 어디에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증오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판국에 자신의 측근 중의 하나인 정금이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러는가.

장상궁마마님. 그래, 자네는 그 분께도 품계를 줄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자네가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일세. 엄선영이 고작 이랬는가!”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것으로 보이는가? 내 자네에게 신경쓴 것이 얼마인데!”

내게 하는 것만큼 왜 그 분들께 못하는가. 그 분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고작 그 명예를 주는 것이 그리 아까운가!”

정금의 말은 시종일관 질타였다.

정치적인 일이기 때문일세! 자네가 대체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아오? 모르면 가만히 있게.”

무엇을 아냐고? 모르는 사람들도 도리는 아는 것일세.”

내가 도리도 모른다는 말이냐!”

궁궐이 원래 그러한가! 참으로 인간성이 없다!”

무어라고? 네 무례를 견디는 것도 여기까지다!”

점점 감정이 고조된 찰나 엄선영이 벌떡 일어섰다.

나가게!”

못 나가네. 자네가 왜 그리 했는지 알아야겠네.”

당장 나가지 않으면 네 전재산을 몰수하겠다!”

, 내 전재산? 이제 엄선영이가 바닥을 보이는구나.”

정금은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비아냥대는 것같았다. 엄선영은 왈칵 서러워졌다. 정금의 시선은 끝까지 싸늘했다. 어저께도 정금에게 내린 선물이 있었다. 선영은 그 것이 더욱 괘씸했고 정금은 자신에게 이토록 잘하는 선영이 죽지 못해 사는 여자에게 가혹한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엄선영은 격분을 참지 못해 고함쳤다.

그래? 저 자의 전재산을 몰수하라! 거기 누구 없느냐!”

미닫이 문이 다시 열리고 보이는 것은 박소화였다. 소화는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숙빈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저 자를 잡아들여라! 궁중의 예법을 모르는구나! 매우 쳐라!”

고정하시옵소서.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정금이 사라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엄선영은 진정이 되어 씩씩거렸다. 그녀는 머리를 쥐며 신음했다. 흥분은 사고의 흐름을 막아서고 있었다.

몰수해라.”

마마, 아무리 그래도 그 것은 당장의 예법에 맞지 않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소서.”

박소화의 말이 맞았다. 무례 이외의 죄는 없었다. 그러나.

전재산은 두고 내가 준 것들을 몰수한다 일러라.”

마마.”

그리고 퇴궐시켜라.”

마마,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궁궐 안에서 소상궁의 공이 크옵니다.”

어허! 그대로 하라!”

진심이시옵니까?”

그대로 하라!”

박소화는 머리를 숙이며 다른 답을 기다렸지만 아직도 분노에 휩쌓여 어쩔 줄 모르는 엄선영에게는 더 이상의 답이 없었다. 그 소문도 궁궐을 떠돌았다. 소정금은 퇴궐명령을 지시받고도 엄선영을 더 이상 보러 오지 않았다. 선영의 마음 한 구석에는 소정금이 찾아와 화해를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소정금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선 듯 하였다. 정금은 받은 물건을 모두 돌려주고 떠났으나 앓아누운 것은 선영이었다.

무던한 줄 알았더니 불같은 성격이구먼.”

어휴, 보통 성격으로 저리 되겠어?”

가끔 선영이 지나가면 일부 궁인들은 선영이 들으란 듯 떠들고는 하였다. 참으로 우습게도 소정금이 바란 대로 명예로운 퇴궐이 된 듯하였다. 보란 듯이 떠드는 이들 중에서 아기나인시절부터 자신을 밉살스레 보다가 지금은 늙은 상궁이 된 최무희도 있었다. 그녀도 말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데 자신이 쫓아내고 만 것이 오른팔과도 같은 정금이라는 것이 한 편의 희극이었다.

가라. 그래, 가거라.’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한 편으로 속상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정금의 퇴궐 소식을 듣고 숙양도 놀라서 달려왔다.

본래 궐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던 자, 내보냈을 뿐일세.”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너무 하시오이다.”

숙양도 정금이 떠난 것이 속상한 듯 선영을 보는 눈초리가 원망스러웠다. 선영은 그 눈초리도 마음이 괴로웠기에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이강의 어머니인 죽은 장상궁에게 내려진 직첩은 종 4품 숙원이었다. 숙원 이씨와 마찬가지로 후궁 중에 가장 낮은 품계였다. 그 것은 혹여나 그들을 따르려고 하는 정치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욕설을 들어도 정치안정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품계를 높일 수는 없었다. 행사는 계속 되고 있었다. 왕호는 주었으나 귀국하겠노라하는 이강을 황제가 계속 거절하여 실상 왕호를 주는 공식행사는 어린 영친왕만을 위한 것이 되었다.

영친왕.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궁의 지배자와 다름없었다. 이제 엄선영의 시선은 늘 그 아들을 향해 있었다. 이리저리 마음을 다친 이후로 엄선영은 늘 기도를 올렸다. 명성왕후만큼은 아니었으나 이 속에 있자면 그런 알 수 없는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귀여운 황자가 이름을 얻었구나. 불안해하지 말게. 자네는 진실로 특별한데 왜 믿지 못하는가?”

믿고 있사옵니다. 폐하.”

그러나 정금의 그림자에 선영은 가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장상궁과 숙원 이씨를 추존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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