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비를 걸다 말까?”
페리온스가 어니스트에게 물었다.
“내 자세가 좀 괜찮아져서 아닐까? 그 보다 주군, 카르멘 좀 챙겨줘.”
“카르멘이 왜?”
“춤추다가 귀족아들내미 발을 밟아가지고, 시비가 걸려 있어. 부탁한다. 나는 타모르 사부님 곁으로 가있을게.”
직접 챙기면 될텐데, 페리온스는 무도회장을 보았다. 춤을 추는 공간 한 복판에서 카르멘이 쓰러져 있었다. 거기다가 욕설을 퍼붓는 귀족. 페리온스는 그 모습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일행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춤을 못 추면, 여길 오지 말라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상한 여자가 감히 내 발을 밟아?”
“미안해요……. 으악!”
“이것 봐! 일어서는 척 하면서 또 밟았어!”
카르멘은 거의 울상이었다. 페리온스는 인파를 헤집고 달려갔다.
“카르멘!”
“뭐야! 네 일행이냐? 관리 잘 안할 거야? 어라, 너는 아까 왕자님한테 검을 바쳤던 녀석 아니야?”
“……데리고 가겠습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서는 딱딱한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야! 사과 안 해? 영지도 없는 녀석 같은데!”
페리온스가 귀족을 노려보았다.
“잘못하고도 노려보냐?”
상황은 제쳐두고, 이 녀석의 태도가 너무 화가 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카르멘이 외쳤다.
“페리온스 나 좀 업어! 쉬가 마렵다!”
“뭐, 뭐?”
“카르멘?”
“빨리!”
페리온스는 얼른 카르멘을 업었다. 귀족이 쯧쯧 혀를 찼지만 비상상황이다. 뜰로 달려 나갔다. 카르멘은 멀찍이 뜰 외곽으로 와서 폴짝 뛰어내렸다.
“페리온스 화내는 거 처음 봤다.”
“……마렵다면서요?”
“화낼 것 같아서 기지를 발휘했지!”
카르멘이 눈을 찡긋했다. 페리온스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휴…….”
“역시 나 별로지?”
카르멘이 시무룩했다.
“아니.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역시 귀족세계는 어려워. 하지만 어니스트는 귀족이 되려고 하니까 말이야.”
“아……. 어니스트 형 열심히죠. 저도 좀 예민해졌었나봐요. 카몬이 시비를 걸었거든요. 그런데 어니스트형이 누나 챙겨주라고 했어요.”
“어, 어니스트가?”
카르멘이 말을 더듬었다. 카르멘의 뺨이 발그레해진다. 페리온스는 흘끗 카르멘을 보았다. 설마 카르멘은 어니스트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카르멘, 형이 좋아요?”
페리온스는 직선적으로 묻고 말았다.
“아,”
급소가 찔린 듯이 카르멘은 말을 잃고 말았다. 페리온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 안해도 돼요.”
“아, 저기 좀 봐.”
화제를 돌리려는 듯 카르멘은 하늘을 가리켰다. 페리온스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보름달이 참 예쁘다. 그치.”
동공이 커졌다. 보름달. 뮤오린이 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던 보름달. 커다랗고 하얀 달이 아찔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숨이 가빠졌다.
“페리온스?”
소리가 모두 웅웅거리며 스쳐지나갔다. 혈관이 모두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몸에는 털이 곤두선다. 상체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뜨겁다.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없다. 화가 난다. 모든 것이 타오른다. 확장된다.
-아우우우우!
몇 번이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같다. 앞에 모든 것이 방해되기만 한다. 번뜩이는 모든 것, 꺽어버린다. 사냥감이 있다. 사냥감이 도망간다. 뜨겁다.
…….
…….
푸른 들판에 누워있었다. 들판의 한복판에 홀로 있었다.
여긴 어딜까. 페리온스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바지는 그대로 있었지만 상체는 맨 몸이다, 천이 덮어져 있었다. 온몸이 욱씬거렸다. 조금 거칠어졌지만 이상한 부분은 없다.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동트는 쪽을 바라보자, 저 멀리에 새하얀 낡은 신전이 보였다. 새하얬지만 이끼가 껴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곳은 어디일까. 목이 타듯이 말랐다.
“정신이 들었어?”
익숙한 목소리. 로브를 쓰고 있었다. 뾰족한 귀가 로브를 뚫고 살짝 드러나 있었다.
“뮤오린?”
“맞아. 널 여기까지 유인했어. 기억이 안나겠지.”
“전혀.”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별 일은…… 없었지?”
“타모르가 너를 죽이려고 했어.”
“날?”
“지오트라스의 명예에 금이 가는 인물은 필요없다고, 죽이려고 했지만 너에게 도리어 당했지. 다행히 네 모습을 본 사람은 거의 없어. 로즈소드를 만들러 갔다 온 우리 일행이 너를 말리다가 큰 일 날 뻔 하기는 했지만.”
“으으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충직한 타모르였는데.
“거꾸로 말하면, 일행은 다 알게 됐다는 말이야.”
뮤오린이 조롱박에 담긴 물을 내밀었다. 페리온스는 벌컥벌컥 들이키며 다시 아찔해졌다. 뮤오린의 손에 찢긴 자욱이 있었다.
“그거.”
상처를 가리키자, 뮤오린이 슬그머니 숨겼다.
“넌 제정신이 아니었어.”
“…….”
“다른 일행은? 안 다쳤어? 너는 파티에 안 왔잖아?”
“몰래 성벽에 앉아 있었어. 다른 일행은 모르겠지만, 제일 크게 얻어맞은 건 타모르였지. 은화살로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너는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
페리온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윽.”
“일어나. 돌아가자.”
“저 신전은 뭐지?”
페리온스는 아까 봤던 신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버려져 있던데, 아르테미스신전은 아니었어.”
“가보자. 다른 신일 수 있잖아.”
“아티마는 없었어.”
“그래도 가보자. ……기도하고 싶어.”
뮤오린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페리온스가 비틀거리자,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페리온스는 꿋꿋히 혼자 서서 걸었다.
“난 일어서야만 해.”
페리온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곧 신전의 전경이 드러나보였다. 앞이 트여있지를 않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덩굴식물은 하얀 신전을 타올라가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칼로 후려쳐 작게 길을 만든 이후에 신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안에도 이끼가 껴있었다.
“이바.”
페리온스는 이바를 불렀다. 이번에도 이바는 말이 없다. 대체 어쩔 때는 시끄럽고, 어쩔 때는 너무 조용한 이 단도를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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