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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도 있구. 우리 애기는 바깥에서 뛰어노는 게 취미인데, 부르면 올 거야.”

 

그레마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애, 애기요?”

 

“쳇! 하프드래곤따위에게는 육체를 주면서 이바님에게는 왜 숨쉬는 육신이 없는 거냐! 이거 진짜 부조리한 거야! 다 망해버려라!”

 

“드래곤의 육체는 엄청난 마력을 견뎌야되고 네 육체는 완성되어야하니까 그렇지. 주신께서 게으름부리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 그건 됐고, 우리 딸내미~! 이리오련!”

 

그레마는 허공에다 대고 여유롭게 소리쳤다.

 

웅웅하는 이상한 파열음이 들렸다. 꼭 목도를 휘둘렀을 때의 소리를 극대화한 것 같은 소리다.

 

‘하프드래곤?’

 

페리온스와 웜은 마주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 너무 많았다.

 

“블레이드 소드를 휘두르고 있군. 집 안에서는 휘두르지 말라고 따님께 말씀드렸는데.“

 

르네는 딸에게까지 존칭을 쓰고 있었다. 그는 멍한 눈길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잔잔하게 마력을 담아 말했다. 페리온스로서는 느껴지는 파동이 묘했다. 평소의 말과는 다른 것이 확실하다.

 

“세느님 오시겠습니까?”

 

“아빠! 편하게 말하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식탁의 구석에 순간이동한 빨간머리의 여자애가 자신의 무게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나갈 것같은 블레이드소드를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

 

강력한 마력이 필요한 순간이동을 저 꼬마 빨간머리아가씨가 해낸 것이다. 르네는 설명했다.

 

“하프드래곤 세느님일세. 반은 인간의 피를, 반은 드래곤의 피를 받으신 분이지. 성격은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지만.”

 

“그래선지 나랑은 많이 싸워! 르네를 닮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레마는 장난기 어리게 웃더니 르네의 뺨에 기습적으로 뽀뽀를 했다. 르네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레마는 활기차게 하하! 웃었다.

 

“아빠성격 닮았으면 매력적이었을텐데.”

 

“그, 그만두세요. 다들 보잖습니까.”

 

“쳇. 아주 꼴값들을 떨어요.”

 

페리온스가 들고 있는 단도, 이바가 으르렁거렸다. 순혈의 드래곤이 아니면 드래곤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드래곤 회의에서도 참석하지 않았던-순혈드래곤이었어도 나이가 어린 해츨링이어서 참여하지 못했겠지만- 꼬마 주제에 몸을 가지고 날뛰는 것이 이바로서는 딱 꼴보기 싫었다. 육체를 더 이상 내놓을 수 없다는 신의 말에 갈 곳없는 영혼으로 남겨진 이바였다.

 

“육체가 있으니 인간이랑 바람나고 아주 즐겁게 사는구만.”

 

결국 이바는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말을 바로 해라. 꼬마이바. 나는 원래 솔로였거든? 바람은 아니야. 바람은. 뭐 애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생겼길래 낳았지.”

 

“애가 이렇게 컸으면 르네백작님은 대체 몇 살이신 거죠?”

 

웜이 두 손으로 머리를 짚고 소리쳤다.

 

“40세. 중년이지. 적은 나이는 아니야.”

 

르네는 말했다.

 

“결혼하면 좋았을텐데.”

 

그레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드래곤께서는 언제 떠나실지 모르니까요. 저는 그레마의 발목을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르네는 창백한 얼굴에 꽃같은 미소를 그렸다.

 

“네가 결혼을 안해줘도 안 떠날 거야. 드래곤 수명이 몇 천 년인데 사람 하나 숨 거두는 거 못 보고 돌아가겠어?”

 

“영지는 돌보셔야죠. 아이크들이 기다립니다.”

 

“엄마! 이 사람들 뭐야?”

 

세느가 천연덕스럽게 그레마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아아 세느, 얌전히 있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칼로스 영주에게 데려갈 거야. 그가 파충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너는 아직 어리니까 얌전히 있어야 한다. 하프드래곤이라면 침을 질질 흘릴 거야. 그 작자.”

 

“나도 갈래! 얌전히만 있으면 되잖아!”

 

“또 떼를 쓰네.”

 

“같이 갈거야! 저 사람들도 칼로스영주의 공물이야?”

 

“공물이 아니라 사람을 빌리러 가는 거지?”

 

그레마가 일행을 빤히 보았다.

 

페리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도시를 재건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악마의 도시라…….”

 

르네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는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오트라스의 영지라고 불렀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다 악마의 도시라고 부르니까요.”

 

페리온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네 생각은 어떠냐는 거야. 페리온스.”

 

“제 생각은……. 아버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럼 지오트라스의 영지라고 불러. 그랬으면 좋겠군.”

 

르네가 말했다. 페리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이 되어 입에서 잘 떨어지지는 않았다. 악마의 영지라는 말이 더 쉽게 나와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부른다면 아버지의 일도 악마의 일로 치부하는 것처럼 느껴져왔다. 지오트라스의 영지가 나을 것이다. 페리온스는 작게 지오트라스의 영지, 라고 중얼거렸다.

 

“더 쉬다가 가라고 하고 싶지만, 칼로스남작이 우리를 의심하게 두는 것도 좋지 않지. 이제 만나러 가봐야겠네.”

 

르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법도 전혀 모르는데.”

 

페리온스는 긴장이 되었는지 얼굴을 아래 위로 거칠게 쓰다듬었다.

“예법 생각할 거 없어.”

 

“네?”

 

“어차피 죽으러 갔다오라고 할테니까 말이야.”

 

르네는 빙긋 웃었다.

 

“성문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겠나.”

 

“저는 지금 죽을 수 없습니다!”

 

페리온스는 벌떡 일어섰다. 하인 로스가 자신의 생명을 버려가며 지켜줬던 목숨이다.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독수리는 새끼가 날 때 먹이를 주지 않고 호랑이는 강한 놈만 키운다는 말이 있네. 알아서 해봐.”

 

페리온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성문을 통과하게 해주기는 했고 지금 정보도 주고 있다. 그러나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페리온스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르네의 멍하고 엷은 눈이 장난기를 띠며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어쨌든 안내해줄 생각이니 따라오게.”

 

페리온스는 저택 바깥으로 걸어나가 대기 중인 마을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여러 분은 여기서 쉬십시오.”

 

같이 가겠노라고 곧 마을사람들이 떠들썩해졌지만 르네가 나오자 곧 조용해졌다.

 

“마차가 작아서 몇 사람 가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다녀오겠습니다.”

 

페리온스가 말하자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도 수긍한 눈치였다. 웜과 어니스트는 얼른 페리온스의 옆에 따라붙었다. 마차는 네 사람이 타자 꽉 찼다. 르네가 헛기침을 하자 마부가 말을 몰았다.

 

“칼로스남작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바님이 소란스러우셔서 그 얘길 못했군. 그냥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귀족이야. 수집벽이 조금 있고, 현재의 상황을 지키려고 하는 편이지. 지오트라스공작님 시절에는 교권이 강했는데, 지금은 교권과 왕권이 팽팽해서 말일세. 균형감각있게 처신하며 영지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지.”

 

“수집벽은 뭡니까?”

 

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드래곤에 관련된 거야. 우리로선 조심하고 있지.”

 

“그레마님에 대해서는 모르십니까?”

 

어니스트가 물었다.

 

“실체는 모르는 것같아. 소문이야 있지만, 음유시인에게 그 소문을 전해듣고 날 받아준 게 아닌가 싶은데. 나 역시 추측일세. 어쨌든 가보지.”

 

마차의 차체는 계속 덜그럭거렸다. 도로의 정비가 깔끔하게 되어있지는 않은 듯했다. 르네는 페리온스를 계속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르네의 표정은 유달리 튀었다. 새하얀 피부에 장미꽃같은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르네백작과 함께 있으니 어디든 통과하기는 쉬웠다. 영지 내에서 익숙한 얼굴인 듯,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마차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 어느덧 산 위에 올라서 있는 높은 성 위에 도작했다. 한참을 숲길로 달리다가 정원이 나왔다. 정원에는 연못이 잘 꾸며져 있었는데 다리 밑으로 악어떼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페리온스일행은 생전 처음보는 동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동물은 뭐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남쪽지방에 사는 악어라는 동물이 저렇게 생겼던 것같아.”

 

웜이 대답했다.

 

“악어?”

 

“신께서 드래곤을 만들기 전에 실험삼아 만드셨다는 수많은 동물 중에 하나라네.”

 

르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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