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물이라면.”
“그래. 그래. 그거. 벗고 나오는 거.”
“저,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야한 건 누구나 보는 거잖아요!”
방미리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어필했다.
“그래? 여자는 어떠니?”
진형은 평소보다 시무룩하고 담담하게 미리에게 물었다.
“뭐가요?”
“돈을 많이 버는 게 좋니?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 좋니?
이선은 한가한 카운터에 앉아 진형의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뜻밖에 즐거워 보인다. ‘싫다더니.’ 손님이라고는 진형과 미리밖에 없어서 조금 심심했다. 진형과 미리가 즐거워 보이는데 그사이 끼어드는 것도 좀 그랬다.
천우가 설거지하는 걸 좀 도울까 싶어서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천우가 깨 먹은 접시만 해도 수십 개는 되리라. 몇 번 깨 먹고는 안 되겠다 싶어 죄다 스테인리스로 바꿔놨는데 떨어뜨리는 건 여전했다. 이선은 한숨을 쉬며 접시를 쥐고 설거지통에 담갔다.
“내가 할 테니 비켜.”
“죄송해요. 사장님.”
천우는 쥐라도 잡을 것같이 날카로운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생긴 것은 깡패랑도 시비를 붙게 생겼는데 마음은 항상 여려서 하루에 한 번은 우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카운터 좀 봐줘.”
“넵.”
“아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진형이랑 여자애 뭐 하는지 보고해.”
“넵!”
“아! 절대 신경 쓰여서가 아니야. 그놈을 못 믿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우리 집에서 성희롱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 그렇지? 사고라도 일어나면 안 되니까.”
“넵.”
진형의 앞에서 미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자기 길을 가는 남자? 순수하고 꿋꿋한 건 좋지만 너무 고집스러우면 싫다. 돈을 버는 남자? 능력이 있고 돈이 많은 것은 좋지만 너무 속물적인 것은 싫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미리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좋아하면 그런 것은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해맑게 생글생글 웃는 미리를 보고 진형의 미간은 더더욱 짙어졌다.
“하, 도움 안 돼…….”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진형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미리는 씩씩하게 말했다.
“웹툰 한 번 봐 드릴게요! 이래 봬도요, 제 취향은 대중적인 걸로 유명하거든요!”
“사이트 알려줄게. 가서 봐. 제목이, ‘그녀는 사이보그’야.”
“네!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도 미리는 가지 않고 진형의 얼굴을 말똥말똥 보고 있었다.
“안 가?”
“오빠의 얼굴을 담아두려고.”
“푸흡!”
이번에는 진형의 입에서 기침 소리가 나왔다. 미리는 헤헤 웃었다.
“갈게요!”
“빨랑 가!”
미리는 깔깔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설거지를 끝낸 이선과 멋쩍은 표정의 천우가 카운터에서 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나온 이선에게 천우가 보고했다.
“둘 사이 별일은 없었고 형님이 기침 한 번 하셨습니다.”
“그래~.”
그때였다. 방미리가 나간 동시에 누군가가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정장 차림에 헤어스프레이로 세워 반듯한 머리 모양을 한 남자, 예전에 HG그룹의 전무인가 했던 그 남자,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남자, 진해준이었다. 나름대로 자주 본 얼굴이었고 단골이라면 단골이었기 때문에 이선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에스프레소 한 잔.”
그는 담백하게 주문했다. 이선은 돌아서서 커피기계를 만졌다. 해준은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있는 진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남자분은 항상 여기 있나요?”
그는 말을 걸어왔다.
“항상 있지는 않은데, 자주 있죠.”
“길 가다가 가게 안을 자주 보거든요.”
“그러시군요. 자주 들러주세요.”
이선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뭔가를 그리고 있는 거 같던데.”
“웹툰 작가예요. 지망생이긴 하지만.”
“그래요? 그런 것 같더군. 그래서 말인데, HG그룹에서 론칭하는 웹툰 사이트가 있는데, 저분을 스타트멤버로 고용할 수 있소.”
“네?”
“사장님이 아시는 분이니까 특별히 눈여겨 봐두었죠. 차후 인기도에 따라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연재할 수 있어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특별한 사이 같던데.”
“네. 잘됐으면 하고 바라는 친구죠.”
“난, 당신에게 많은 걸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위해서 저 친구를 고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난 진심입니다. 내 명함, 아직 가지고 있죠?”
이선은 아직 그에게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는 웃으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들어 귓가에서 흔들었다. 이선은 망설이다가 해준에게 물었다.
“거기는 19금을 넣어야 한다거나 그런 요소는 없나요?”
“그런 장르도 있겠지만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대부분은 오히려 꺼리죠. 답답하실 수도 있겠지만, 자유로운 표현을 원하시나요?”
“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 다음에도 들러주세요.”
“전화 기다릴게요.”
그는 에스프레소를 원샷으로 쭉 들이키더니 싱긋 웃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태도가 담백한 편이다. 진형은 그리는 척만 하고 해준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선은 진형이 뭐가 예쁘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려다가도 역시 고민이 되었다.
“정이선. 좋아 보인다~.”
“뭐가?”
“역시 람보르기니 모는 남자가 대쉬해오니까 좋냐?”
“좋다. 왜.”
“저 사람이랑 이야기하던데.”
“손님이랑 이야기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저 사람이 뭐래?”
“연락하라던데……. 근데 단순한 연락이 아니라……. 너 HG그룹에서 론칭하는 웹툰 사이트 알아?”
“당연하지. HG그룹이라면 요새 뜨는 기업이잖아. 요즘 웹툰 업계에서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거기서 널 쓰고 싶대.”
“내 작품도 안 보고?”
“그건 모르겠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
“너보고 연락하라고?”
“응. 아마도? 연락하라고.”
“그 자식이!”
진형의 목울대가 시뻘겋게 변했다. 빨간색은 점점 올라오더니 얼굴까지 빨갛게 물드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대 연락하지 마. 날 이용해서 네게 찝쩍대다니 사람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흥분할 거까지는 없잖아. 좋은 기회는 맞고.”
“대가 없이 그럴 것 같아? 아주 웃긴 놈이야.”
“왜 화를 내?”
“연락하라고? 내가 연락하겠어. 명함 줘.”
“알았어. 그렇게 말한다면.”
이선은 순순히 명함을 내주었다. 진형은 여전히 씩씩거렸지만 태연한 이선의 모습에 더는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진형은 태블릿과 노트북을 정리해서 가방 안에 넣고 밖으로 나섰다. 이선과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형이 밖으로 나서자 알바생인 천우만이 인사를 건넸다. 밖은 석양이 흐리게 비치고 있었고 흐리게 보랏빛으로 물든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그란 ‘바리스타 정’간판에도 그늘은 내려앉아 있었다. 진형은 어쩐지 이 세상에 홀로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잘난 녀석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왠지 어깨가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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