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준이란 사람 연락 와?”
“왜 그렇게 집착해? 내 번호 모른다니까.”
이선이 뚱하니 진형을 보았다.
“나 연락했어. 그 번호로.”
“그래?”
“그리고 결심했어!”
“뭘?”
“A툰에 들어갈 거야. 성인물 그려보려고.”
“난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어?”
“원하는 일도 할 거야. 성인물을 그리고 청춘물도 그릴 거야. 어떻게 해서든 재미있고 유명해질 거야.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나 때문에 진해준과 연락하지는 마.”
“알았어. 기회가 되지 않을까 했을 뿐이야. 큰 생각은 없었어.”
“검색해보니까 더 이상한 놈이야. 여성 편력도 많다 하고.”
“알았어. 시어머니가 따로 없어.”
“넌 진짜 내가 시어머니로 보이냐?”
“시아버지로 정정해줄까?”
“내가 돈만 많이 벌어봐. 아주.”
“밥 사주려고?‘
“내 짝사랑에게 처음으로 대쉬할 거야.”
진형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비 오는 깜깜한 새벽이라 들리지 않겠지? 목소리를 우렁차게 뽑아냈다.
“엄청나게 잘해줄 거야. 엄청! 그리고 평생 그 여자밖에 안 볼 거라고!”
“좀 실망인데.”
이선의 말은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뭐가!”
진형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버럭 대꾸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 우리 절친 아니었어?”
“비밀이니까, 얘기 안 했지. 그리고 부담 주긴 싫으니까.”
“마음은 표현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됐네. 고생길로 끌어들이긴 싫으니까.”
진형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오, 순정파.”
“너는 뭐, 없어?”
“나는 없어.”
“진짜야?”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싶다. 진형은 집요하게 매달렸다.
“지금이 좋아. 너처럼 우산 씌워주는 든든한 친구도 있고. 난 남자친구 필요 없어.”
진형은 우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불만 어린 목소리로 내뱉는다. 그에 반해 이선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매번 신세 지는데, 너희 집까지 내가 바래다줄까?”
“됐어.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럼 뭐해. 너 또 와야 하잖아.”
“너도 많이 걸었는데.”
“됐어. 다음에 커피리필 예약.”
진형은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이선은 미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픈 것을 느끼며 진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일까. 진형이 좋아한다는 사람은.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그 애와 잘되어가고 있는 건가? 지금까지 진형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조금 섭섭해져 오기도 했다.
이선은 집에 돌아와 수건을 목에 감고 씻기 시작했다. 내일은 쉬는 날이었다. 영화를 보며 시원한 맥주라도 한 캔하고 싶었다. 우울한 생각은 빨리 잊어버리자. 이선은 생각을 떨쳐내더니 곧 잊고 놀 생각에 바빠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얼굴을 씻고 팩을 붙이는데 휴대폰이 우웅 진동을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엄마였다.
“엄마?”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은 지방에 가 있었다. 매일매일 전화를 하긴 했지만, 오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목소리 듣기 힘드네. 잘 지내고 있어?”
“그렇지, 뭐. 왜?”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
“갑자기 왜 그래? 또.”
이선은 본인도 모르게 짜증을 부렸다.
“할아버지 쓰러지셨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좀 알아봐.”
“할아버지가?”
이선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인 아빠를 따라 사는 곳을 옮기셨지만, 원래는 이선이 살던 이 지역에 살고 계셨다. 지금 커피숍을 짓기 전에 땅도 원래는 할아버지의 소유였으나 손녀딸이 커피숍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흔쾌히 땅을 빌려주셨다. 지금 커피숍의 정원은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선에게도 추억의 장소였다.
“내일 나 쉬어.”
이선은 휴대폰을 반대편으로 바꾸어 들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병원이 어디니?”
“한국에서 제일 좋은 병원이라면 한국대학병원이지. 하지만 몇 달 밀려있을 텐데.”
“당장 입원할 수 있는 데 없어?”
“알았어. 알아볼게.”
이선은 전화를 끊었다. 혼자 있는 적막한 집에서 빗소리만 크게 울렸다. 비는 점점 거세게 오고 있었다. 이선은 한숨을 푹 쉬고 맥주를 꺼내 들었다.
비가 그친 세상은 깨끗해져 있었다. 햇살이 비추는 하늘은 푸르렀고 먼지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가로수 밑에 들꽃들이 풀 내를 풍기고 있었다. 이선은 병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 안에서 가족들과 재회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와 아빠였다.
“안 보고 싶었어?”
엄마가 이선의 등을 두드린다.
“보고 싶었지. 할아버지는 뭐래요?”
“암이라는데. 그나저나 너도 이제 우리 있는 데로 내려와라.”
아빠의 말이었다. 이선이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님이었기에 익숙한 말이었다.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가게가 있는데 뭘 내려가.”
“할아버지 병원비도 있고 가게를 정리하는 게 어때? 수입도 변변찮다며.”
“수입은 변변찮아도 적자는 아니에요,”
“그래도 할아버지 병원비를 대야 하잖아.”
“아빠 사업을 좀 접으면 되잖아.”
“뭐라고? 이 녀석이!”
이선의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핏줄을 세웠다. 이선은 팔짱을 끼며 물러서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주신 땅은 추억도 있고 장사도 잘되고 있다고요. 아빠도 사업을 하다가 적자난 적 많잖아요. 나는 적자는 아닌데 접으라는 건 가혹해요!”
“얘가.”
이번에는 엄마가 이선을 말렸다.
“주스나 사 올게요.”
이선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들어오는 학생이 있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이선은 깜짝 놀랐다.
“어?”
마주 들어오는 학생도 깜짝 놀라 이선을 보았다.
“어? 언니!”
둘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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