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애들한테 다 말해야겠다. 사실은 나 재수, 삼수해서 이 학교 들어온 거야. 나이가 많아.”
“헐.”
“소라에게는 들켜서 말이야.”
“헐, 오빠라고?”
“아하하, 쑥스럽구만.”
내 쫄린 마음과는 별개로 이찬오빠는 호탕하다.
“다른 대우를 기대하지는 마.”
수선화는 딱딱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아 들켜버렸네.”
나도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역시 비밀은 간직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고마웠다. 소라야.”
“별말씀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비밀이 많다는 사실이. 이제 남은 비밀은 두 개. 선우와 함께 사는 것과 카모스. 둘 다 들키지 않았으면 싶은 비밀이다.
나는 다시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깊은 숨이다.
가는 길에 나는 일부러 카모스의 커피가게를 들렀다. 주인도 없이 카페는 덩그러니 열려있었다. 나는 안에 가만히 앉았다. 손님이 한 팀 들어왔는데 주인이 없다고 내가 주인인 것처럼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가만히 멍때리고 있을 즈음, 누군가가 내 옆에 섰다.
“웬일이지?”
옆을 돌아보자 붉은 눈의 카모스가 서 있다. 장검은 없다. 로즈마리를 들고 있다.
“카모스.”
“뿔을 돌려줄 마음이 들었나?”
“왜 도와준 거야?”
“무슨 말이지?”
“왜 블루헤드를 네가 해치워? 무슨 꿍꿍이지?”
“무슨 말인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척하지마. 백화점에 있던 거 너였지?”
나는 쏘아붙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군.”
“검으로 백화점을 갈랐잖아.”
“나라는 증거가 있나?”
“…….”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카모스였는데.
“커피나 한잔해.”
“어디 갔다 온 거야?”
“카페 텃밭. 허브가 자란다.”
“정말 안 어울려.”
“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나 보군.”
카모스는 훗 웃었다.
“천만에!”
“나는 뿔이 필요해.”
“뿔을 찾으면 우릴 다시 괴롭힐 거지?”
“…….”
뿔은 아직 내 몸 안에 있다. 아픈 건 없었지만 히어로 능력을 쓸수록 몸에 퍼지는 느낌이다.
“너는 괴롭히지 않는다. 약속하지.”
“왜 우리 지구를 괴롭히는 거지?”
“전쟁 중이니까.”
“너희가 먼저 시작한 전쟁이잖아. 네가 물러가 준다면 생각해보겠어. 이 지구를 떠난다면……!”
“이 지구를 떠난다면, 뿔을 준다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되면 카모스의 약속을 어떻게 믿지?
“난 사실 지구엔 관심이 없어.”
“…….”
나는 할 말이 속으로 끓어올랐지만,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선우가 말했던 최악이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관심이 없었는데, 쳐들어와서 건물과 삶을 부수고 하는 말이 지구에 관심이 없다? 정말 최악이다.
“내 고향은 암석으로 된 땅이라 지구의 먹거리는 좋아한다만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분명 사람을!”
“건물 부수는 걸 좋아했지, 사람은 죽이지 않았어. 블루헤드는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블루헤드는 네 책임이잖아!”
“나는 황태자고 사령관은 따로 있어. 길티모어라고. 그리고 그 녀석의 목적은 지구를 파괴하고 나를 미치광이로 만들어서 지구에 버리고 가는 것.”
“왜?”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외척의 힘이 별로 없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후궁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해. 암석뿐인 별인 데다 통일된 별이지만 지구의 역사와 우리의 풍습은 비슷한 부분이 있더군. 첫째가 왕위를 잇는 게 보통이다. 적장자인 내가 그들로선 귀찮지. 길티모어는 그쪽 사람이야.”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가장 힘이 있잖아?”
“고맙군. 그래도 돌아가면 무언가에 약을 섞어 주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면 도시 한 복판에 있었어. 실낱같은 의식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나는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 생각이고 나의 사랑하는 국민을 그렇게 쉽게 죽이지는 않으니까.”
“…….”
역시 대화가 통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지구는 절대 식민지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일단 제안해보았다.
“길티모어를 함께 없애보는 것은 어때?”
“나도 좋다. 다만 뿔이 없으면 본국에 돌아가도 소용없게 돼.”
“뿔이 되게 약하던데?”
분명 툭 떨어졌다.
“약점이긴 하지. 지구인으로 치면 목 같은 거지.”
“그래?”
“하지만 힘을 갖고 있지. 네가 웬만한 블루헤드와 상대하더라도 그들보다 더 강할 수 있다. 원래 히어로들은 암흑기술을 쓰지 못한다. 쓰더라도 위력이 약하겠지. 그러나 네가 뿔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거지.”
“그렇담 가지고 있다면 내가 유리한 거네.”
“넌 지구인이야.”
“…….”
난 경계 섞인 눈초리로 카모스를 보았다.
“그걸 오래 가지고 있으면 죽는다.”
“그렇게 되면 뿔은 어떻게 되지?”
“모른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 그러나 지구인이 암흑에너지를 견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블루헤드로 만들려고 주입받은 지구인은 전부 죽었어.”
“…….”
나는 내가 히어로의 피를 받은 것에 딱히 자긍심을 느낀 적은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살기 위해 지구를 포기하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렵지 않게 말했다.
“그 이유라면 뿔은 줄 수 없어.”
“훗.”
“그리고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우리 과 선배의 기술과 위력이 비슷하던데, 그거 맞고 쓰러질 정도면.”
나는 도발을 했으나 카모스는 한쪽 손가락을 까닥까닥할 뿐이었다. 그러다 짧게 말했다.
“기습적이었어. 네 공격은.”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가.”
분명 백화점을 쪼개 버렸다. 이 정도면 B 정도 이상의 능력은 충분히 감추고 있는 것 같다.
“공격을 더 좋아하긴 하지.”
역시 뿔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해도 신고를 해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 내 어깨에 카모스가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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