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네가 불편하다면 먹어보는 게 어때?”

 

“…….”

 

“히어로 병원이라서 능력에는 큰 손실이 없게 처방해준 약일 거야.”

 

“그럴까. 먹으면 긴장되는 게 좀 나아질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낫긴 낫겠지.”

 

그와 병원을 나와서 가는 길은 함께 걷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걷는 이 시간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이 도시의 노을이 참 좋다. 문득, 오늘 오전의 일이 생각났다.

 

“아 참, 이찬이 능력이 뭐랬지?”

 

이찬오빠를 부를 때는 항상 신경이 쓰였지만, 이번에는 궁금해서 안 물을 수가 없었다.

 

“너 안 들었구나.”

 

“팀장이라는 거에 너무 당황해서.”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오히려 선우는 피식 웃는다.

 

“꽤 특이한 능력이더군.”

 

“뭔데? 혹시 약 만드는 능력이야?”

 

“그렇지는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그린 것을 그대로 구체화해서 튀어나오게 할 수 있는 능력인 것 같아. 약이든, 자동차든. 그런데 자신이 그린 크기만큼 똑같이 튀어나오니까 그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리는 공간도 필요하고 상상력과 그림 솜씨도 필요하겠지.”

 

“오, 대단하다.”

 

“히어로로서 기본이지.”

 

이찬오빠한테는 항상 박하다. 선우는.

 

“주의 깊게 듣지 않다니 썸 타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썸? 썸이라니? 이찬오빠와 내가? 헛소리 좀 하지 마!”

 

나는 발끈했다.

 

“거봐, 이찬오빠라고 하지.”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 인간 정체가 뭐야?”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둘러댈 말을 생각나지 않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을 못 하고 있자 선우는 내 머리에 툭 손을 올렸다.

 

“말하기 난감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으, 응.”

 

이럴 때면 항상 선우에게 고맙다.

 

“아빠한테도 가야 하는데.”

 

나는 중얼거렸다.

 

“그럼 집에 들렀다 가자. 약 얘기 할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끼치긴 싫어.”

 

“저녁이나 사가자. 아저씨랑 같이 먹게. 나 해물찜 먹고 싶어.”

 

“응!”

 

나는 팔랑팔랑 걸어가다가, 이 길로 가면 카모스가 있는 커피숍이 나올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딴 길로 갈래?”

 

“왜? 그냥 이 길로 가.”

 

나는 진땀을 흘리며 선우의 시선을 가리려고 애썼다. 선우는 과잉된 나를 의아하게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드디어 고비가 왔다. 10평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커피숍, 카모스가 아는 척을 할지도 모른다.

 

갸웃. 카모스는 고개를 돌린다. 나를 보았다!

 

나는 애써 선우를 보며 외면했다. 다행히 카모스도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다. 선우도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작은 제스처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우가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다음 날, 등교 시간이었다. 나는 수선화와 마주쳤다. 인사를 했는데도 수선화는 창밖을 보며 시름에 잠겨있다.

 

“선화야. 수선화.”

 

나는 어깨를 꾹꾹 눌렀다.

 

“어, 소라네.”

 

수선화는 그 한 마디뿐, 다시 창밖을 보았다.

 

“왜 그래, 선화야.”

 

“히어로 학과에 등록되는 인원은 40명이지만, 자질미달로 떨어지는 사람이 20명은 돼.”

 

갑자기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나만 아직 능력이 없네.”

 

그제야 말뜻을 알았다. 나는 위로의 말을 찾다가 큰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선택할 수 있었다.

 

“너만은 아니야. 아직 30명은 능력이 없어.”

 

“우리 팀에서는 나만이야. 출동하더라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나랑 남아서 특훈할래?”

 

“……고마워.”

 

수선화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되려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서 강당으로 향했다. 이찬오빠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그림을 그리러 갔다. 이제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게 그의 능력이 되어 버렸다.

 

강당에는 이미 많은 히어로들이 있었다. 우리는 1학년이라 눈치를 보며 자리를 골라 앉았다.

 

연합해서 훈련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직 말을 섞지는 못하겠다.

 

나는 히어로글러브를 꼈다. 글러브를 끼면 기술의 효과가 20%로 줄어든다. 연습게임을 할 때 유용하게 쓰는 기구였다.

 

슈트를 입고 화면을 넘기자 아무래도 난감해진다. 블루헤드의 기술만 세 개였다. 나머지 하나는 황금주먹.

 

사람들이 많은데 블루헤드의 기술을 쓰기는 좀 그렇다.

 

나는 황금주먹을 불러냈다. 그리고 수선화에게 돌격했다.

 

“황금주먹!”

 

체육장 구석에서 황금빛이 번쩍이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여기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정통으로 들어갔지만, 수선화는 온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에너지가 대단한데도 어떤 능력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수선화는 이리저리 피하기는 했지만,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신체능력은 상당히 유연하고 좋은 편이다. 재능도 있고 연습을 많이 한 것이 티가 났다.

 

그러나 히어로슈트의 작용으로 매우 민첩하고 빠르게 이동할 뿐, 공격도 특수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다.

 

20여 분 동안 공방을 하고 숨이 차서 둘 다 슈트를 벗고 쉴 때였다. 어떤 덩치가 큰 남자 선배가 내게 다가왔다.

 

“너 그거 황금주먹 아니냐?”

 

“진짜로 능력을 훔쳤나 보네.”

 

옆의 선배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너 나랑 연습게임 하자고 하지 마라. 내 능력 뺏길까 봐 무서우니까.”

 

맨 처음 말을 걸었던 그가 껄껄 웃었다. 나는 긴장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선배가 툭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라. 난 내 능력을 줄 생각이 있어. 블루헤드만 물리칠 수 있다면.”

 

어쩔 줄을 몰랐지만, 그 말에 뭔가 찡한 어떤 것이 느껴졌다. 항상 긴장하고 죄책감을 느꼈는데 그제야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두를 향해 고함쳤다.

 

“잊지 마! 우리의 적은 블루헤드라는 것을!”

 

수선화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히어로 능력에 좋고 나쁨이 어디 있담.”

 

수선화의 말은 투덜거림에 가까웠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우리는 조용히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너 스트레스 안 받아?”

 

수선화는 다짜고짜 물었다. 나는 그냥 웃음만 지었다.

 

“쇼핑하러 가자.”

 

“밥부터 먹자. 배고파.”

 

저녁이었다. 우리는 합의를 봐서 백화점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이찬오빠도 시간 되면 오라고 톡을 보내놓았다.

 

백화점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을 더 가야 한다. 수선화는 별말이 없었다. 나는 자연히 주위를 보며 걸었다. 히어로학과가 있는 학교다 보니 곳곳에 히어로에 관련된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대체로 좋은 글귀였지만 빨간 글씨로 ‘못 살겠다! 무능력한 히어로는 물러가라!’라는 글귀도 있었다.

 

나도 집이 파손되어 보고 히어로로서 무능을 느낀 적도 많아 공감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히어로집안으로서 저런 문구는 속상하다.

 

“엉뚱한 거 보지 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붙박여 있었나 보다. 수선화가 내 고개를 휙 잡아 돌렸다.

 

“나한테 집중해. 나랑 밥 먹으러 가니까.”

반응형

'소설쓰기 장편 > 지구는 맑음(히어로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는 맑음 27화  (0) 2024.01.04
지구는 맑음 26화  (0) 2024.01.03
지구는 맑음 24화  (0) 2024.01.01
지구는 맑음 23화  (0) 2023.12.31
지구는 맑음 22화  (0) 2023.12.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