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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검을 들고 있다. 장발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누가 있을까. 이런 히어로가 있었던가?

 

키가 매우 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가면을 쓰고 망토를 휘날리고 있었다. 붉은 눈과 마주쳤다.

 

설마……? 

 

“카모스……?”

 

그는 훗 웃고는 훌쩍 뛰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히어로슈트를 입고 훌쩍 뛰어올라 다친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저 무대포적인 칼날에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 수면가루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 전에 썼던 기록으로는 내가 뿌린 수면가루의 효과는 8시간이 갔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경찰관에게 보고하고 사람들을 구급차와 바닥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정신없이 옮기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 왔다. 집에 갈 시간이 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카모스가 거기에 있던 거지? 블루헤드의 황태자가 블루헤드는 왜 공격하는지 아직도 알 듯 말 듯하다.

 

일이 끝나고 나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아빠가 봤다면 틀림없이 위험하다고 난리였을 텐데 다른 수단이 없었다.

 

가고 있는데 갑자기 히어로 슈트를 입은 사람이 빛으로 나를 비추었다.

 

나는 눈이 부셔서 손으로 빛을 가렸다.

 

“이소라!”

 

“어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아, 선우구나.”

 

빠르게 내려오는 실루엣과 목소리가 선우다.

 

“연락도 안 되고.”

 

“연락할 틈이 없었어. 이제 나도 히어로학과잖아. 힘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어. 그런데 비상시도 아닌데 히어로슈트를 입으면 안 되잖아.”

 

이젠 히어로에 대한 규칙도 조금씩 알 것 같다. 그동안 선우가 내게 해줬던 게 조금씩 무리를 한 것이라는 것도.

 

“……연락받고 가던 참이야. 백화점에 블루헤드가 나타났대. 너부터 찾아야지 싶어서 근처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어라, 나 거기서 왔는데. 나보고는 돌아가라던데.”

 

“나는 현역이잖아.”

 

그렇구나. 나는 아직 학생이구나.

 

“하지만 팀을 짜라는 걸 보니까 데뷔가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 데려다줄게.”

 

“그럼 고맙긴 하지만.”

 

“업혀.”

 

오늘은 삭신이 쑤신다. 업혔다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그래도 선우의 등에 업혔다.

 

오늘은 다들 포근하다. 수선화까지. 더 돕고 싶지만 나는 아직 무리이겠지. 선우는 창문으로 나를 내려주고는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방에는 어둠과 적막이 가득했다.

 

카모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왜 도와준 걸까.

 

선우는 지금이 카모스를 없앨 기회라고 했는데.

 

그나저나 힘이 없어져도 백화점을 가를 힘 정도는 있구나. 쉽지 않은 상대다. 정말.

 

나는 불을 다시 켤 힘도 없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는 길에 뛰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내달려왔다. 빠르다, 누굴까? 하고 봤더니 수선화였다.

 

“나한테 말할 거 없어?”

 

“말할 거?”

 

나는 뛰면서 생각하기가 버겁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흥, 나한테 말할 거 없다고?”

 

“응.”

 

나는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말할 게 없다. 지금 생각나는 건 단 하나.

 

“지각하겠어. 뛰자!”

 

강의실에 뒤늦게 도착하자 뭔가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아 편안하다. 나는 카드를 찍고 뒷자리에 앉았다. 수선화는 뚱하니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다. 나는 책상 가 쪽에 누군가 버려둔 신문더미를 하나 골라잡았다. 같은 내용인 것 같은데 10매 정도가 쌓여있었다.

 

“히어로능력은 외계인과 함께한 연구를 통해 개발되었다. 물론 블루헤드는 아니지.”

 

교수님은 계속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 시선은 그리 가 있었다. 왜일까. 안 보면 그만인데 자꾸 보게 되는 것은. 그것도 집착하는 것처럼 내 이야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도둑소녀의 수면가루, 사람을 살리는 가루였나 죽이는 가루였나.’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 거칠게 백화점을 찢어버리다. 사망자는 없음.’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슬프다.

 

“어이 거기, 신문보고 있는 자네! 왜 교역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우물쭈물했다. 곳곳에서 시선이 내게 온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앉아! 집중하도록!”

 

이라는 소리에 곧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수선화를 보았다. 여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내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 그런 게 있었던가. 뭐에 삐졌는지를 모르겠다.

 

이윽고 수업이 마쳤다. 점심시간이 코앞이다. 나는 수선화에게 다가갔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그건 좋은데,”

 

뒷 말을 하지 않는다. 선화는 새침하다.

 

“이찬이도 부를까?”

 

“흐흥, 이찬이.”

 

그녀는 콧웃음을 친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수선화가 말했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선 것과는 다른 이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너 비밀 있지?”

 

수선화는 무엇을 안 것일까. 이렇게 추궁하자 선우와 함께 같은 집에 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카모스도 떠올랐다. 들킨 걸까?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있네. 있어.”

 

수선화는 혼잣말하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간신히 내뱉었다.

 

“뭐, 뭐가.”

 

“속여도 소용없어. 맞춰볼까?”

 

“…….”

 

선화가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너 이찬이랑 사귀지?”

 

“뭐어?”

 

나는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왜 선우도 그렇고 선화도 그렇고 이찬오빠와 나를 엮는 것일까.

 

“난 분명 들었어.”

 

“뭘?”

 

“넌 무의식적으로 이찬오빠라고 했었어. 친구인데 왜 오빠라고 부르지? 아무리 사귀어도 자존심도 없어?”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자,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지?”

 

“음, 이찬오빠에게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근데 절대 사귀는 건 아냐! 일단, 왜 오빠라고 부르는지 물어봐. 답이 나올 거야,”

 

수선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이찬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윽고 우리 셋은 학교 중앙에서 만났다. 수선화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찬에게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응?”

 

“소라랑 사촌이니?”

 

“아닌데.”

  

이찬은 멀거니 대답했다.

 

“사촌이니까 동갑인데 오빠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사귀는 게 아니면 그거밖에 없잖아? 분명 소라가 너를 보고 오빠라고 불렀단 말이지.”

 

“아, 그랬던가?”

 

이찬은 뒷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그랬어. 뭐야, 뭔데, 정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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