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은 두 손을 꼭 쥔다. 정말 찢어주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이 감정이 싫은 걸까.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미운 것은 사실이다.
“싫어요. 정말 싫어요.”
이선은 앙다물고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그럼 똑같은 사업하는 남자인데…… 나는 어때요?”
“네?”
“고생은 좀 하겠지만 이쪽이 좀 더 낫지 않아요?”
해준이 장난기 어리게 웃었다. 이선은 정색했다.
“저는 바람 상대는 싫어요.”
“솔로라고요? 이래 봬도.”
“그래도, 전 송충이예요. 솔잎 먹고 살래요.”
“그 솔잎이 꼭 진형씨일 거라고 생각 말아요. 나는 연애 상대로도 당신이 좋지만, 결혼 상대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선은 입이 쩍 벌어졌다.
“대, 대체 왜?”
“현실주의자로 사는 건 경영만으로 충분하잖아요. 결혼 정도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그 사람이 날 싫다고 하지만.”
“싫다는 게 아니라, 전무님. 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제멋대로고요. 난폭하구요.”
“생각 좀 해 봐요. 진형씨가 자꾸 그러면.”
“고마워요. 그래도 아마 안될 거예요.”
“하여튼 그러니까 제가 더 대쉬를 하나봐요. 나도 거절받는 것에 취미가 있나? 하하!”
“그, 그만두세요.”
어느새 커피잔이 다 비어 있다. 맛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마셔버렸다. 해준이 데이트하자는 걸 거절하고 이선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수군거리기는 해도 아무도 자신을 건들지 못한다. 그런 해준에게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선은 진형을 잊고 열심히 일했다. 확실히 그의 드라이브가 도움이 된 것 같기는 하다. 공사 구분이 제대로 안 되던 상태였으니까. 일에는 어느 정도 집중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정신에 힘입어 카페에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의 병원에 들렀다. 할아버지는 항상 걱정을 해주시는데 진형과 싸우고 나서는 회사도 다니기 시작했고 정신이 없어 할아버지 병원에는 통 들리지를 못했다. 면회시간이 끝나기 아슬아슬하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선이구나.”
“할아버지! 자주 못 찾아 봬서 죄송해요.”
“괜찮다.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은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도 말하지 못했다. 이선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사업을 할 때 어땠냐, 등등 그런 것을 묻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할아버지 저 응원해주세요.”
“언제나 응원한다. 우리 손녀딸.”
이선은 할아버지를 꼭 껴안은 후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이전보다 조금 선선했다. 이제 가을로 넘어가고 있는 날씨였다.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는 생각을 접고 조금 걷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집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걸어서 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진형은 휴대폰을 책상에 놔두고 계속 보고 있었다.
이선에게 연락을 하고 사과도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사공민에게 연락을 해서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말해 놓은 뒤였다. 그리고 어떻게 이선에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는 심정이 되었다. 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게 된 걸까.
진형은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었다. 연락을 하고 싶다.
그러다 휴대폰의 진동이 징 울렸다. 진형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선의 이름은 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진형은 얼른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 만났던 경찰, 김영환의 이름이 떠 있었다.
“경찰관님. 어쩐 일이십니까.”
진형은 정중하게 물었다. 김영환의 가벼운 목소리가 오늘은 심각했다.
“어, 진형씨. 지금 피해자분이 어디 있는 지 아십니까?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요.”
“저도 전화번호만 알고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해랑씨가 구치소에서 도망쳤습니다!”
“뭐라고요?”
“피해자분을 보호해야 할 것 같은데요.”
진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해랑이 가는 곳은 피해자 쪽이 아닐 것이다. 짐작이 된다. 자신의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의 복수심은.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다.”
“어디죠? 아 지금 언론도 주목하고 있는데 죽겠습니다. 정말. 빨리 잡아야 합니다.”
진형은 이선의 커피숍의 주소를 불렀다.
“믿고 갑니다!”
“거기서 보시죠.”
진형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 서둘러 이선의 번호를 찾았다. 자꾸 버튼을 헛 누른다. 이윽고 신호가 갔지만, 이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늦게나마 들리는 목소리는 느긋했다.
“여보세요.”
진형은 울화통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야!”
바로 전화해서 큰 소리를 듣자 이선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알 것 없잖아!”
“커피숍에 있어. 집에 바로 가지 말고. 커피숍에 있어. 알았지?”
“무슨 일이야?”
진형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 어디야! 밖이지! 왜 밖에 있는 건데?”
이선은 안 그래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고함치는 진형이 너무 어이가 없어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진형은 황당해서 전화를 보았지만, 전화기는 이미 꺼져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해보았지만, 이선은 받지 않았다. 진형은 바쁘게 휴대폰만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진형은 커피숍에 도착해보았지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천우밖에 없었다. 미리도 앉아있었지만 이선은 없었다. 진형은 식은땀이 났다.
경찰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천우야, 네가 연락해볼래?”
진형이 천우에게 말을 건넸고 천우는 연락을 해보았지만, 이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천우는 이선이 할아버지의 병원을 가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진형에게 알려주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제가 찾아볼 테니, 부둣가에 가주세요. 거기서 저번에 두 번이나 활동했으니까요.”
진형은 영환에게 부탁했다. 만약 부둣가로 가버렸으면 아찔하다. 그곳은 여기에서 1시간이나 떨어져 있다. 배라도 타버리면 다시는 손쓸 방법도 없다.
한편 이선은 진형의 전화를 끊고 걷고 있었다. 천우의 전화는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입을 가리고 그 후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옥상에 있었다.
엷은 눈의 해랑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선은 경직되었다. 왜 구치소에 갇혀있다고 했던 해랑이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다행히 몸은 묶여있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도 없다. 해랑 한 명뿐이다.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선은 그런 희망을 가졌다. 이선은 천천히 일어섰다. 어지럽다. 다시 주저앉았다.
“초면은 아니구나.”
해랑은 비웃음을 물었다.
“진해랑…….”
“궁금하겠지? 왜 나 혼자 너를 보고 있는지.”
“왜지?”
일단 시간을 벌자. 구치소에서 합법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진해랑을 찾고 있다. 이선은 또렷이 진해랑을 보았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나온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난 1대 1을 좋아해. 1대 1로 붙어서 이기는 걸 아주 좋아하지.”
“그런 정당한 애가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는 뭐지? 난 사람도 부르지 않았어. 난 정당하게…… 복수하는 거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한다. 이선은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이런다고 해준씨가 좋아할 거 같아?”
“해준씨? 네 그 더러운 입에서 왜 형의 이름이 나오지? 해준씨?”
“네가 이러는 건 전혀 전무님을 위한 일이 아니야!”
“확신했다.”
해랑은 비릿하게 웃었다.
“전부터 느낌이 왔어. 넌 죽어줘야겠다.”
“살인혐의로 기업가가 오해를 받으면 그 기업이 추락할 건 생각 하지 않니?”
“넌 사고사 처리될 테니까, 상관없어.”
“그렇게 세상이 만만해 보여?”
해랑은 말없이 다가왔다. 이선은 애써 일어섰다. 아무리 슬림해보이는 남자라도 힘으로 당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릴 때 배웠던 호신술을 생각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잘못했다가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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