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민. 그는 오랜만에 이선의 가게 옆으로 찾아왔다. 진형은 노트북 가방을 들고 그대로 나섰다. 그는 이 근처에 있었다고 했다.
“야아 오랜만이다! 이진형, 거리도 가깝고 인연이네. 인연이야! 나도 사무실 이쪽에 있거든.”
“뭘 또 인연까지.”
“여전하구나! 그 붙임성 없는 성격!”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왔다. 진형의 키가 한 뼘은 더 커서 팔이 주욱 올라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술이나 먹자. 오늘 날 불러낸 대가를 치를 거다.”
“응?”
“달릴 거거든.”
“무슨 일 있었냐?”
말만 그렇게 했지, 진형에게도 달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한숨이 푹 나온다.
“왜 그래. 요즘 잘 나가는 작가님께서!”
“뭐 실속이 있어야지.”
“그래.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도 그거다.”
“뭐?”
진형은 의아하게 사공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하하, 얼굴이 주름지도록 웃었다.
“일단 들어가자! 뭐라도 먹으며 얘기하자고! 내가 살 거니까 싼 거로 먹어라.”
“네가 왜 사?”
“그냥 넘어가는 게 없네. 들어가. 들어가.”
사공민은 작은 좌석이 빼곡히 들어앉은 포차 안으로 진형을 밀어 넣었다. 진형은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갔다. 네모난 좌석들이 기차처럼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었고 메뉴판이 식탁에 붙어있었다. 가격들은 다 만 원이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들이었다.
“10개 시켜도 되냐?”
진형이 메뉴판을 보며 물을 들이켰다.
“다 시켜도 된다.”
“이놈 왜 이래?”
“난 널 꼬시러 왔으니까.”
풉! 하고 진형이 물을 뿜어냈다.
“너 설마…….”
“응?”
사공민은 싱글싱글 웃는다.
“나 남자는 취향 아니다.”
“아아, 나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야 그 떡대. 싫다, 인마.”
“나도 싫어! 인마!”
“야, 네 만화 봤다. 조회 수가 10만 찍혔더라. 참, 일단 시키자. 식탁 좁으니까 천천히 시켜.”
진형은 알탕과 닭구이를 골랐다. 칼라만시 소주를 시키는 진형을 보며 사공민은 싱긋 웃었다.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왔군.”
“취할 거야.”
“클래식하게 가야지. 칼라만시 소주라니, 다시 봤다.”
“소주 맛이 없어. 나 평소엔 술 안 먹는다. 몰랐지?”
“어, 괜히 술 먹자고 했나 보다. 난 너랑 편하게 얘기하고 싶어서 술집으로 골랐는데.”
“아냐. 오늘은 참 적합한 날이다.”
사공민은 의아한 눈으로 진형을 보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데려다줄게. 맘껏 마셔.”
“진짜 왜 이러냐. 소름 돋는다. 너.”
“나 원래 친절한 사람이야. 몰랐구나. 너.”
진형은 사공민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종교단체라도 가입한 거 아닐까. 미심쩍은 감정까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종종 봤던 얼굴이라고,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워낙 사공민이 사근사근한 성격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보면 뭔가 방심하게 된다.
이윽고 알탕과 닭구이가 나왔다. 진형은 얼른 집어 들었다. 한참 책을 봤더니 배가 고프다. 사공민은 한동안 정신없이 닭을 집어먹는 진형을 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이선이는 잘 지내냐?”
“네가 이선이를 어떻게 알아?”
진형은 바로 경계하는 눈초리로 돌아섰다. 요즘 정이선은 인기가 너무 많다.
“동창이잖아. 혜은이 친구고.”
“음.”
“그리고 네 첫사랑이고.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진형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겨우 기침이 멎은 진형은 사공민을 노려보았다.
“알면 넘보지 마라.”
“엥? 아니. 내 취향은 굳이 말하면 혜은이 쪽이야.”
“혜은이 남자친구 있어. 설마 그거 때문에 다리 놔달라고 연락한 거야?”
“아니. 그거 알고 있어. 서코나 부코에서 늘 만나는걸.”
“그럼 연락한 목적이 뭐야?”
“일단, 취해야지?”
사공민은 잔을 들었다.
진형은 잔을 쨍 부딪쳤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곧 알 수 있겠지. 진형은 사공민에게는 별말 않고 계속 안주와 소주를 먹었다. 사공민은 얼떨떨하게 진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달리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진짜 무슨 일 있냐? A툰에 또 까였어?”
“난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가 더 궁금하다. 처음에는 그냥 놀자는 건 줄 알았는데 얘기를 듣다 보니 더 미심쩍어졌어.”
“뭐 좋겠지. 너 조회수로 봐서 어딘가에서 연락 왔겠지?”
“응.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사공민은 엄지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사업가 둘이서 웹툰을 양분하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서. HG그룹에서 만든 준쓰가 꽤 커버렸어. 물론 인터넷이라는 게 생기면서 만화의 활로가 생긴 일이기도 하지만 이 양강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있냐? 다만 말해두는 건 난 준쓰에는 못 들어가.”
“응? 왜?”
“그냥 그런 이유가 있어. 난 A툰 밖에 없어.”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넌 항상 파고드는 걸 잘했으니까. 난 너처럼 그림 실력도 없고 섬세한 건 잘 못 해. 그렇지만 난 이게 기회라고 생각한다.”
“기회?”
“둘은 만화를 사업으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아. 만화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고. 물론 마케팅은 만화를 좋아한다고 하고 있지만 기업 하는 사람이 서코에 와봤겠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틈새 공략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너 설마.”
“만화 사업을 하자! 네 힘이 필요해.”
사공민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업~?”
진형은 후,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소주를 마셨더니 벌써 취기가 약간씩 돈다.
“나 쪼잔한 놈이다. 사업은 못 한다.”
진형은 단언했다. 이선의 아버지 사정을 알고 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것을 질색하는 이선이었다. 물론 자신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빚을 지거나 있는 돈을 까먹지는 않는다. 이 순간, 허세 때문에 이선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 수 없다. 틀림없이 빚을 지면 그녀와 헤어지거나 그녀가 자신을 크게 도와주거나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대책 없이 해보자는 건 아니다. 가능성이 틀림없이 있어.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마니아층은 자신들이 좀 더 제대로 놀 곳이 필요하다. 나는 그 장소를 만들어줄 수 있어. 너도 좀 더 자유롭게 연재할 수 있을 거야. 작가들과 교류도 될 거고.”
“네가 대인관계가 좋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 이미 15명을 섭외해놨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사장 자리야.”
“무슨 소리야?”
“너는 돈을 낼 필요가 없어. 나 한때 돈 좀 벌었던 거 알지?”
그랬다. 한때는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되었었다. 그게 4년 전이었던가? 사공민은 꽤 유명했었다. 그게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지만. 코믹만화여서 그런지 모두 한 번 보고 잊어버린 듯,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공민도 활동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동창들의 모임에는 태연하게 얼굴을 내밀었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사공민의 최근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 돈이 남아있다. 자본금은 내가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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