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이윽고 탁자에 앉을 수 있었다. 해준은 생긋 웃으며 괜찮냐는 말을 건넸다.
“이런 자리에 왜 저랑 오는 걸 택하신 거예요? 익숙한 분들이 많을 텐데.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그냥, 유혹? 하하. 친해지고 싶었어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려둘게요. 당신은 멋지지만, 작업은 사양이에요.”
“이유가 있나요?”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사업하는 남자가 싫어요. 저희 아버지가 사업하시거든요. 망한 거 반, 성한 거 반인데 허세가 있으셔서 집안 재산도 많이 까먹고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셨죠, 대기업은 다르겠지만 스케일은 크면 더 컸지 작지는 않잖아요. 큰 손들에게서 느끼는 거부감이 있어요. 휘말리게 되니까.”
“음, 이해는 돼요. 내게도 친해지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들어볼래요?”
“배 안에 꼼짝없이 갇혔는걸요. 마음껏 말씀하세요.”
“가둬둔 게 티 났나요?”
해준은 하하 웃었다. 이선도 긴장이 풀려 픽 웃었다.
“우리 집은 재벌 중에서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어요. 졸부라고 할까? 아버지 대에서 크게 성장했죠. 그래서 아버지는 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계셨던 것 같아요. 나는 아버지 기사를 하고 계시는 분의 아들과 자주 어울렸죠. 그 녀석은 천재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어요. 10분 만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려냈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꾸중을 들어가면서도 만화에 관심이 많았고요. 나는 그 애에게 내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리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나는 떼를 썼죠.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내 얼굴을 때렸어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말했습니다. 지금도 후회되는 일이에요. 아버지는 기사를 해고했거든요. 그 아들이 아버지와 사과하러 왔는데 아버지는 단호하셨어요. 어쩌면 그 아들이 끝까지 나를 노려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나는 그냥 단순히, 그 애가 좋았고 그 애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잊히지 않을 끔찍한 기억을 선물해버렸죠. 내 조건은 그런 자연스러운 걸 내버려 두지 않더군요. 돈을 보고 오거나, 외모를 보고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질투와 적대의 대상. 내게도 자연스러운 애정의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휘말리기 싫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돼요.”
“……실례지만 외로우신 건가요?”
“부정할 수는 없겠군요. 외로움이란 건 무섭죠. 아무도 해치지 않고 싶은데 나약하면 누군가를 해치게 돼요.”
“진형이도 해칠 생각이신가요?”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조금 부럽더군요. 그 사람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싫다는 게 그냥 싫다는 건지, 부럽다는 감정이 섞인 것인지. 내가 싫은지 내 조건이 싫은 것인지 내 행동이 싫다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해칠 것인가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해준은 딴청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선은 말을 끊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해준은 벙찐 표정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해요.”
이선은 드레스를 입은 채로 빠르게 내달렸다. 해준의 긴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너무 참았다. 그때 누군가가 발을 걸었다. 이선은 발이 걸렸지만 재빠른 운동신경으로 뛰어넘어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나오는 길에 누군가가 이선의 손등에 세게 부딪혔다. 유리잔이 깨져 온통 파편이 튀었고 파란 포도주가 옷에 묻었다.
‘일부러야…….’
이선은 직감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을 건 장소를 봤을 때 넘어졌다가는 크게 다칠만한 곳이었는데 너무나 괘씸했다.
이선은 씩씩거리며 다시 탁자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좀 튀었나 봐요.”
“왜…… 무슨 일 있었군요?”
해준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이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쏟았군요.”
“일부러였어요.”
“이런, 누가 이런 염치없는 짓을! 일단 내 옆에 있어요.”
유람선에서 내릴 때까지 해준은 옆에서 살 얼음장 같았다. 둘의 분위기도 꽁꽁 얼어붙었다. 유람선에서 내리자마자 이선은 전에 입던 청바지와 단화로 갈아입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나쁜 경험이었겠지. 미안합니다.”
“아녜요. 해준씨 아니면 어떻게 오늘 같은 경험을 했겠어요. 좋지만은 않았지만 새로운 경험이잖아요.”
“그래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고마웠어요. 가는 길은 태워주지 않아도 돼요. 버스 타고 갈게요.”
“끝까지 권하면 안 되겠죠? 보통은 그래도 끝까지 권해주길 바라던데.”
“편안하게 가고 싶어요. 부탁할게요.”
“알겠어요. 커피숍에 고객으로는 가도 되겠죠?”
“그건 환영이에요. 내 커피를 좋아해 준다는 거니까.”
이선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사라지는 해준의 차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차가 다 사라지고 나자 얼른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마칠 시간은 되지 않았다. 천우는 과연 커피숍의 일을 잘 해내고 있을까. 긴장하고 있느라 잊고 있던 걱정들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역시 들렀다 가야겠다. 이선은 버스를 탔다.
바리스타 정의 간판은 아직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안에는 북적북적 소리가 날 것 같다. 아늑한 불빛이었다. 이선은 얼른 걸어 들어갔다. 손님은 한 팀이 있었는데, 정원에서 뭔가를 하는 듯했다. 걸어 들어가 보자 진형이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있었다.
“할아버지!”
이선이 외쳤다. 이선의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이선에게 팔을 벌렸다. 이선은 그대로 안긴 채, 또 하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익숙한 그림자. 익숙한 덩치. 진형이었다.
“할아버지께 꽃 보여드리려고 모시고 나왔어. 돌아가야 하는데, 너 보고 가신다고 오늘은 밖에서 묵기로 했어.”
정원에는 카네이션과 카두풀이 물통에 담겨있었다.
“내 꽃이 더 싱싱하지?”
마치 초등학생처럼 진형이 묻는다. 그 물음조차 지금은 아늑한 느낌이었다.
“고마워. 할아버지 모시고 나와줘서.”
그때 천우가 달려 나왔다.
“형님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저 혼자서는 손님 감당을 못했을 텐데……. 서빙도 하시고요.”
“별일 안 했어.”
진형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 것 같아.”
이선은 싱긋 웃었다.
“그놈하고 나갔다며? 별일 없었지?”
“물론이지.”
“별일 생기면 꼭 말해야 해. 네가 물가에 내 논 아이 같다.”
“알았어. 오늘은 가게 정리까지 해줄래? 좀 피곤해서, 먼저 할아버지 모시고 들어갈게.”
“별일 없었지?”
진형이 끝까지 묻는다.
“별일 없었네.”
이선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
카두풀과 카네이션이 까무룩 숨이 죽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이선은 음료를 한 잔 서빙한 뒤 가게 안 쪽을 비우고 정원으로 들어서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 시간 때쯤은 항상 한가했다. 진형과 한 사람 정도가 주문을 시켜놓고 있었다. 한참 물을 주다가 유리창으로 된 실내를 바라보는데, 음료를 주문한 여자가 혼자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이선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잠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죠?”
수 분 뒤, 그 여자는 깜짝 놀랐다. 이선이 손수건을 건넸기 때문이다.
“닦으세요.”
여자는 히끅히끅 숨을 삼키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말했다.
“여기 온 남자……없어요?”
“남자요?”
“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겼는데, 없죠! 안 왔겠죠! 내가 속은 거죠!”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선이 여자를 다독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진형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 남자가 와야 해요. 그 남자가 내게 빚을 남기고 갔어요. 다 갚는다고 했는데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안 와요.”
그때 밖에서 엔진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게에 들어온 것은 해준이다. 이선과 진형, 카운터 안쪽의 천우마저 시선이 해준에게 쏠렸다. 진형은 해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팔짱을 낀 채 읊조렸다.
“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겼다…….”
“칭찬 고맙군. 웬일이지?”
단발머리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이분은 아니에요.”
'소설쓰기 장편 > 이 선을 넘지마(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선을 넘지마 12화 (0) | 2023.10.24 |
---|---|
이 선을 넘지마 11화 (0) | 2023.10.23 |
이 선을 넘지마 9화 (0) | 2023.10.21 |
이 선을 넘지마 8화 (0) | 2023.10.20 |
이 선을 넘지마 7화 (0) | 2023.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