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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정금은 함선을 거닐었다. 운동장만큼 넓은 함선은 끝에서 끝까지 걷는데 십여 분은 걸렸다. 햇빛이 난간에 비스듬이 내려 반사되어 눈부시다. 정금은 챙이 넓은 모자와 발목까지 길게 내려온 원피스를 입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선은 해가 다르게 발명되고 부피가 커졌다. 하나둘씩 전쟁을 시작하고 그 전쟁이 얽히고 설키며 전쟁의 규모만 점점 커져가는 미친 시대여서 그런 모양인가, 정금은 긴 시간 동안 배 안에 있으면서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곧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더군.”

끝날 때도 되지 않았겠어?”

함선 안에서는 이런저런 소식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정금은 운임을 내고 일본 땅에 발을 디뎠다. 항구에는 뱃고동소리가 요란하다. 함선이 발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행기라는 것도 발명되었다는데 참으로 세상이라는 것은 요상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커다란 새같은 기구로 인간이 날아다닌다.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국가 중의 하나가 일본이라 했다.

전쟁에 이용할 모양인가보아.’

이회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하였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시작한 세계 1차 대전은 그칠 줄 모르고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회가 중국에 간 동안 정금은 일본에서 필요한 것을 사서 중간 부근에서 합류할 작정이었다. 물론 필요한 것을 산다는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미리 전보로 그들과 연락을 취해놓은 터였다. 환갑이 넘은 정금은 직원 두 명과 동행 중이었다.

사러다녀올테니 볼 일 보세요.”

몸 조심하시고 좀 있다 항구에서 봅시다.”

어느덧 노년을 보는 정금이었다. 그들은 정금의 몸을 걱정하는 듯했다. 정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남은 정금은 주소를 보며 길을 찾았다. 황족이 사는 집은 그래도 꽤 큰 편이어서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정금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은은 밖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옆에는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그녀가 바로 이은과 약혼한 일본 귀족의 딸, 마사코인 듯 했다.

최근 이은은 약혼을 하였고 일본인과 약혼하는 것과 동시에 나라의 백성들은 이은에게서 등을 돌렸다. 게다가 그는 내정된 조선의 약혼녀가 있었다.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이였지만 엄선영이 택한 민갑완이라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는 철썩같이 자신이 이은의 약혼녀라 믿고 있었다.

이은에게는 현실감이 없고 낯선 일이었다. 17세에 약혼한 약혼녀는 옆에 있었고 11세에 약혼한 약혼녀는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이은은 정금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갔다.

당신이 어머니의 친구분이시군요.”

어마마마라 하지 않고 어머니라 말하는 그 어투가 자연스러운데도 못내 어색해보였다. 그는 늙은 정금의 몸을 배려하여 옆에서 부축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도 차분하게 잘 꾸며놓은 것이 보였다. 등받이가 있는 둥근 의자로 안내받은 정금을 마주하여 이은이 앉았다. 정금은 모자를 벗으며 이은에게 물었다.

생활은 강령하시오니까.”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사는 것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조선에는 언제 돌아가시려고 하시옵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가보긴 하였습니다만…….”

아이들은 늘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잊는다. 정금은 황태자가 조선의 궁궐을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을까 싶었다. 이은, 아버지의 온화함과 어머니의 강단을 두루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잘 섞였으며 일본인들도 은을 좋아하고 있었다. 유능함 또한 적절히 뽐내고 있었고 바람둥이인 강에 비해 아직 청년이었으나 은에게는 그런 소문이 없었기에 평판도 깔끔했다. 옆의 마사코와 비록 정략결혼이었으나 서로 보는 눈길이 따스했다.

선영을 닮았다면 그녀가 일평생 주상만을 보았던 것처럼 이은도 그러하리라. 마사코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 동안 정금은 이은을 보며 물었다.

폐하께선 일본인과 결혼하시리까.”

…….”

이은은 말이 없었다.

형님인 의친왕께서는 항일의식이 투철하십니다. 조선인들은 그를 좋아하지요.”

형님은 정말 멋진 분이시지요.”

이은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에서 악의나 원한은 없었다.

어찌 일본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돌아가신 순비전하께서 원통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일본을 싫어하지 못합니다. 조선을 사랑하지만.”

조선에도 전하의 약혼녀가 있나이다. 듣기로는 아직 전하를 기다리고 있다 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결혼하겠습니까. 그 사람도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하.”

저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변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은의 말은 단호했다. 선영이 수학원을 만들어 조선의 귀족과 이은이 친구가 되고 협력하도록 교류시켰던 세월도 고작 1. 이은에게는 일본인 친구들이 훨씬 많을 것이었다. 조선은 멀었고 현실감도 없었다.

전하께오선 황제로서 기반을 잃으실 것이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살고 싶고 그 결과를 거두며 살고 싶습니다. 사실, 그래요. 전 시민의 삶이 저에게 더 좋다고도 느낍니다. 군대생활도 적성에 맞았어요. 솔직히 의친왕 형님께서 황제의 위에 올라도 좋아요. 조선백성들은 일본과 적대하라고 하지만 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일본인 전부를 죽여야한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 스승도, 제 친구도, 제 약혼녀도 일본인입니다.”

조선의 백성이 얼마만큼 학대받는지 전하께오선 모르십니다.”

그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영친왕 이은의 말은 담담했다. 이토의 마지막 책략에 확실히 당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금은 숙양이 전한 엄선영의 뜻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그는 그들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마지막 왕이 되어달라는 선영의 부탁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그는 일본에게서 교육받은 사람이다. 선량하고 반듯하게 컸으나 선영은 아들을 빼앗긴 것이 틀림없었다.

전하께오선 조선이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황제께서도 태황제께서도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계속 이렇게 지내실 것이옵니까.”

별 일이 없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저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금은 이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미래. 선량하며 유능하다는 평판의 이은이었으나 미래는 아니었다. 조선의 미래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조선은 이제 져버린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까지 그들의 획책대로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는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몸조심하소서. 전하.”

염려마십시오. 조선에도 잘 지내고 있다 전해주십시오.”

정금은 차를 다 마시고 나서 밖으로 나섰다. 정금이 이은을 찾은 것은 독립군들의 요청이었다. 혹여나 이은이 중심이 되어 이 사태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하는 의견이 항쟁하는 이들에게서 나왔고 그 의견을 받들어 그를 찾았지만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최상궁을 생각했다. 그녀는 독립자금을 대는 것을 들키기 전에 집안에서 사망했다. 험한 꼴을 당하는 이도 있는 터에 조용한 죽음이었다. 나이가 나이였으므로 사람들은 호상이라하였고 가족은 없었으나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모여 장례를 치렀다. 팔자가 나쁘다고 집안에서 쫓겨난 여자. 그러나 그 삶의 끝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렸다.

궁궐에서는 아직도 궁녀들이 뽑히고 있다. 개 중에는 정금 자신처럼 집안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보내진 이도, 최상궁마마님처럼 버려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른 채로 싸우고 알고 싸운다. 점점 위의 가치를 보던 선영이었으나 자신은 늘 밑의, 저 아래에서 늘 변화하는 가치를 보고 싶었다. 그 것이 끝내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선영.’

정금은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선영을 떠올렸다. 다투기도 하였지만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이였다. 선영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나서 정금이 바쁘게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은 친구에 대한 감정이 자신을 자극했던 탓도 있었다.

정금은 최상궁이 하던 지원을 대신 하기로 약조한 터였다. 중국인 이회의 뒤에서 보통의 조선인보다 안전한 정금이었기에 쉬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으나 목숨을 바친 채 뭉쳐서 항쟁하는 그들은 결코 쉽게 선택한 일이 아니었으며 조정이나 정금보다 결사적이었다.

조선의 미래는 그 곳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자들.

그들은 매우 천천히 배우지만 뿌리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게 아닌 자들보다는 죽어도 죽지 않는 자들이 더욱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의 황실은 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대다수 사치와 타락에 절어 겉으로는 잘사는 듯 하였으나 극소수만을 제외하고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파산신청을 하고 거지가 된 인물들도 적지 않았고 수년 안에 대다수의 다른 인물들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의 수준은 대체로 그 정도였고 그들의 번성은 하루살이에 그치겠으나 그 암세포와 같은 그 번성이 끝난 후 조선의 미래는 어떠할까.

그들은 작위와 보물을 받았지만 평생을 부족함없이 살 재물을 가지고도 반절이 넘는 비율이 스스로의 타락으로 인해 파산신청을 했다. 그들은 건드리지 않아도 이미 썩어있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조정에서 도려내야할 썩은 부위임은 틀림없다. 그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고 저들도 빚잔치로 가문을 망칠 것이다. 그러나 그 썩은 부위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이미 황제와 황비가 옥새를 끌어앉고 나라를 팔 수 없다 울부짖어도 그 큰아버지가 옥새를 뺏어 일본에게 넘기기 위한 도장을 찍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그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황실에 얽매여 있는 이들이리라. 핏줄, 직책, 관습, 관성. 이미 썩어버린 집단의 안. 정금 자신도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은 아닐터. 선영도 마지막 생을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닌 채로 몇 년을 살았다.

그러하였으므로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엄선영은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피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선영을 비롯한 많은 선인들이 무료로 숙식과 학용품을 제공하여 학문을 닦도록 한 아이들이 이제 머리 굵은 성인이 되고 있었다. 조선은 개화를 하였다고 각국들이 주장을 하나 조선은 아직 개화한 것이 아니다.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이 움츠리고 있었다. 저 밑에서 땅이 들썩이고 있다.

그래, 그렇다.

그러나.

정금은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이은의 저택을 뒤돌아보았다.

아직 지지 않은 꽃이 여름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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