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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낙화

어마마마, 가야하옵니까?”

떠나는 날의 영친왕의 초롱한 눈망울이 그렇게 애통스러울 때는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천진한 얼굴. 선영은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궁궐의 예법은 아니었으며 일본인들 앞에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마마마.”

그러나 참지 못하고 눈물은 흘러내렸다. 영친왕은 어미의 눈물을 보자 이 이별이 슬픈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선영이 울자 머지않아 영친왕이 따라 울었다. 선영은 영친왕을 껴안았다.

떨어지십시오.”

그들이 울자 군인들은 강제로 떼어놓고 영친왕, 광무황제가 폐위되며 의민황태자가 된 그를 배에 태웠다.

전하!”

선영은 배에 대고 외쳤다. 배는 출항준비를 하고 있었고 비릿한 바다내음 가운데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부디 건강하소서! 아무리 그들이 괴롭혀도 지지마소서! 전하는 조선의 황태자이옵니다!”

어마마마!”

소리는 곧 들리지도 않았다. 거친 뱃고동이 몇 번 울리고 나서 배는 떠났다.

 

선영은 며칠간 멍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들려온 소식은 더욱 기가 막혀 만 10살인 영친왕을 2, 3살 많은 나이로 구성된 일본의 학급에 넣어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노골적인 책략이었다. 영친왕이 따라가지 못하면 조선황족, 더 나아가 조선민족의 열등함을 광고하기 위하여 쓰일 것이었다. 그 속셈이 뻔히 보이는 판국에 이용당하는 영친왕이 마냥 걱정될 뿐이었다. 그들이 수라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 끼니를 챙기게 할런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실 수 있는 것을 하셔야하지 않겠사옵니까.”

앓아누운 선영에게 소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늘 과로하던 선영이었다. 선영은 악에 받혀 일어나 영친왕과 혼례하려 했던 규수를 다시 검토했다.

……단순히 명망으로 결정해선 안되겠네. 권세를 가진 이가 필요하네. 외척이든 무어든 권세, 권세가 필요해.”

다시 알아보겠사옵니다.”

. 그렇게 해주게.”

그러나 이토의 말대로 그 것은 발악일 뿐인지도 몰랐다.

 

하나 둘 씩 이제 벗어날 길이 없다며 체념하고 일본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보면 이제 진실로 가망이 없어보이기도 하였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영친왕은 다행히도 그런 나이많은 일본귀족들과 겨루어서도 모자람없는 성적을 거두어내고 있었다. 그런 전보를 들을 때마다 선영은 아들이 기특하였으나 또한 걱정되었다.

걱정마시오. 그 좋아하던 영사기까지 선물했으니 일본 황실의 대범함이 보이지 않소? 우리가 이렇게 조선을 위하는데 그 눈은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토는 가끔 황실에 오는 날이면 엄선영에게 비아냥대었으며 선영은 이런저런 획책에도 불구하고 점점 세력기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매번 실감하였다. 이토는 그런 실감을 선영에게 보이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며 가학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영은 아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로 수년이 흐르는 동안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기를 쓰고 일어나다가도 털썩 주저앉기를 수 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영에게 풍성한 몸집에 금발을 한 여인이 찾아왔다. 손탁이었다.

돌아갈 것을 윤허해주십사해서 찾아왔습니다. 일본의 압박이 더 이상은 부담스러워, 있지 못하겠군요.”

꼭 가야하겠소?”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선영이 고개를 떨구자, 손탁이 선영의 손을 잡았다. 선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헤이그 특사사건 뿐만 아니라 각종 사건에서 왕실에 협력했던 손탁은 독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조선에서 12년 간 살았던 손탁이었다. 그녀는 왕과 선영의 심부름을 도맡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던 손탁호텔을 보에르에게 넘기고 독일로 돌아갔다. 비록 돌아가게 되었으나 왕은 3만원이라는 거금을 손탁에게 주었다.

그 동안 공로가 많은데 이렇듯 쫓아내듯 가게 하여서 미안하오.”

왕은 쓸쓸해했다.

천만에요.”

손탁은 마지막까지 여유가 있는 웃음을 지었지만 거친 손탁의 피부와 탁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그 동안의 고생을 말해주는 듯했다. 손탁이 떠나는 길에서 선영은 참아왔던 눈물을 훔쳤다. 웨베르 러시아 공사가 떠난 후로 손탁은 웨베르만큼 믿을 수 있는 외국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도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

손탁이 떠난 직후 그 조약은 체결되었다. 조약의 이름도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황제가 서명조차 하지 않은 조약이 통과되었다. 내각 총리인 이완용과 한국통감인 데리우치가 회의를 열어 그 것을 통과시켰으니 신하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것.

일본은 조선황실의 예우를 일본 황실의 밑으로, 그리고 일본 귀족의 위로 책정하였다. 백성들의 세력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치였다. 조선이 망하면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날 것이지만 천천히 삶아 반발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것으로 실제 무딘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지도 모르기도 할 정도였다. 황실의 인물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신하들도 황제폐하를 떠났구나.”

선영은 이 원통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울화병이 걸릴 지경이었다.

충신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충신들은 왜 자살을 했더란 말이냐. 죽어야할 놈들은 살아있는데.”

훗 날을 기약하소서.”

소화가 순비를 달랬다.

 

훗날 순종으로 불리는 지금의 황제는 어머니였던 명성왕후가 집권하던 시절부터 엄선영의 돌봄을 받은 터였고 그녀가 황귀비에 오른 후에도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을 아는 터였으므로 이은의 행방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그에 밖에 미치지 않는 것에 암담하였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친족들을 챙기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그 합방에 날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것을 통과시켰다고 간주하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있었고 그 것은 힘에 의한 현실이었다.

앞서 시험 성적 발표에서 동급생 44인 중에서 5등을 했다는 전보를 받고 네가 본토어(일어)를 써야하고 또 나이도 동급생들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능히 이 같은 성적을 올린 것을 알았다. 심히 가상하다. 앞으로도 더욱 부지런히 힘쓰기를 바란다.’

황제는 자신의 이복동생에게 전보로 부칠 편지를 그렇게 쓰고 난 뒤, 계모인 엄선영을 찾았다. 방 안에는 엄선영과 함께 아버지인 태황제가 있었다. 태황제는 강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였다. 그는 최근 협박당한 황제를 부드럽게 맞이했다.

최근의 강의 인기는 높아만 가고 있었다. 그의 오만함과 반항심은 일본의 귀족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일본의 귀족에게 협박까지 하는 그 태도를 전의 황족들에게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민중은 그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반항심이 단순한 반항심이라는 것은 문제였다. 그가 우수하여 제대로 된 대안을 지니고 있고 장기적으로 주권을 향해 가는 황자였다면 조선에는 좋았을 것. 그러나 그는 사춘기 소년과 같은 모습에 더 가까웠고 엄선영은 그 사실을 반겨야할지 슬퍼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장점이라면 인기와는 별개로 자신의 아들인 황태자 은이 집권자로서 더 낫다는 것. 단점이라면 이강의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인재가 되기에는 다소 모자라다는 것. 이강, 그는 합방소식이 들려오고부터 어느 날 타버릴 것같은 불나방과 같은 모습으로 지냈다.

그러나 은이 붙잡혀 간 터에 엄선영은 강의 소식을 들으면 밥을 먹지 못했다. 그가 모든 걸 부술지도 모른다. 그의 적의는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의 황실에게도 향해있었다. 게다가 엄선영은 요즘 뿌리채 흔들리는 자신의 생각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의민황태자가 황제가 될 날이 오기는 할까. 주권을 빼앗겼는데 어찌 황제가 될 수 있기는 할까.’

이번에도 은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합니다. 걱정하실게 없습니다.”

황제는 이제 뒤로 물러난 태황제 부부를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 돌아올 수 있다고 하옵니까?”

이은의 소식을 들으면 엄선영이 매번 묻는 말이었다.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심스레 서 있었다. 태황제는 합방 당시 분노하였으나 지금은 날개를 꺽인 새처럼 부드럽기만 하였다.

폐하께서는 합방에 서명하지 않으셨지 않사오니 그 것은 무효요. 때가 되면 돌아오리다.”

태황제가 아내를 다독였다. 훗날 고종으로 불리는 태황제는 훗날 순종으로 불리는 지금의 황제에게 분노하여 네가 감히 종묘사직을 팔아먹었다! 외쳤으나 황제가 울분을 토하듯 울먹이며 서명하지 않았소! 서명하지 않았소! 외치는 것을 본 후 같이 꿇어앉아 껴안고 통곡했던 터였다.

끝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더 참혹해질지 알 수나 있을까.

엄선영은 소식을 듣고 난 후 홀로 방 안에 앉았다. 자신의 나이도 몇 년 후면 환갑. 요즘들어 태황제는 자주 자조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고 잇었다.

나는 독살당해 죽을 것일세.”

아마 일본인들의 협박과 을미사변 때 그들의 만행을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일 터다. 그러나 엄선영도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똑같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총독인 데리우치가 오는 날이면 엄선영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바뀐 데리우치도 이토만큼이나 지독했다. 을사조약을 만들어와 신하들을 매수하였던 이토는 1년 전 저격당했다. 이토가 죽었지만 선영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영친왕은 돌아오지 않았고 새로 부임된 데리우치는 이토가 죽은 것을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는 듯이 보였다.

데리우치는 엄선영의 약점이 황태자인 것을 알아 그 점을 늘 공격하고는 했다. 데리우치가 얼마나 황태자에게 잘하는지 당신들이 알아야한다고 비꼬는 날이면 엄선영은 저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앓아눕고는 했다. 데리우치는 자신의 피를 말려 죽이기로 한 것이 틀림없다. 엄선영은 데리우치와 마주치는 날이면 독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엄선영의 걱정과 달리 뜻밖에 일본 황실이 이은 의민황태자에게 잘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경우의 수를 따져 조선에 왕을 세워야만 한다면 이은을 철저한 친일파로 만들어 왕으로 세우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유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이은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굳이 엄선영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협박을 서슴지 않는 것이 일본에게 유리하다 생각하였다. 저렇게 엄선영이라는 자가 죽어지내는 것이 자신들로서는 훨씬 좋았다.

데리우치는 이번에 이은을 촬영한 영상을 들고 있었다.

상영할테니 모이시오.”

지시에 따라 황족들이 모였다. 특히 엄선영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영사기는 그토록 이은이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며 선영은 자식이 보고 싶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선영은 자리에 앉았다. 소파 사이로 빛이 번지듯 앞으로 나가 벽에 부닥쳤다. 빛이 부닥치면서 그림이 생겼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고작 만 14살이었으나 예전의 앳된 모습이 많이 사라져 몰라보게 장성해있었다. 나이많은 일본 귀족들과 계속 어울려다녀서인지도 몰랐다.

궁인들이 돌아다니며 떡과 차를 나누어주었다. 엄선영은 그 것을 받아들고 멍하니 영사기를 보았다.

처음에는 넋을 잃고 보고 싶었던 그 얼굴에만 집중하였으나 점점 화면의 다른 부분들도 신경을 기울여 보게 되었다. 군화, 들판, , 언덕, 뒹구는 사람들. 황태자는 뒹굴고 있었다. 진흙을 묻히고, 심지어는 교관에게 맞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 것은 궁궐의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엄선영의 얼굴을 데리우치는 웃으며 보았다.

엄선영의 시선은 그렇게 고생한 그가 후에 주먹밥 한 덩이로 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나서 더 그 곳에 머물지 못했다.

마마!”

!”

저 놈들이 진흙이 묻은 밥으로 수라를 하여 매끼를 채우게 하고 매일 학대하는구나. 평생을 살아오며 황족이 아닌 종친도 저렇게 대하는 법은 보지 못했다. 잠도 저 진흙바닥에서 자게 하는 것이 아닌가! 저리 짐승처럼 다룬다는 말인가.

정신을 잃은 엄선영을 놓고 궁궐은 또 한 번 소동이 일었다. 소화는 주치의로 한국에 왔다가 미국공사까지 맡게 된 알렌을 불렀다. 갑신정변 때 칼에 맞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알렌은 명의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단순히 체한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알렌은 약을 먹였으나 밤이 깊어지고 다음 날 해가 뜨도록 선영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알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요.”

약을 먹었으면 일어나야 정상인 상황이었으나 선영은 계속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소화야.”

선영은 이제 더 이상 어린 궁녀가 아닌 소화를 불렀다. 그러나 선영의 눈에는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소화였다.

마마, 일어나셔야지요.”

소화는 그래도 선영이 눈을 뜨고 말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선영을 보았다. 선영의 입술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파랗게 변해있었다.

몸은 자신이 잘 안다. 이제 일어날 수 없다.”

마마, 어찌 그리 약한 소리를 하시옵니까.”

지금 가면 어이할꼬.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없네. 나라를 빼앗겼으니.”

엄선영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정상궁, 있소?”

숙양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고 가까이 왔다.

항상 고맙고 미안하네. 내 마지막 부탁 하나 합세.”

마지막이 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숙양이 선영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전하를, 전하를 구해주게.”

선영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태황제와 황제가 달려왔으나 선영은 말도 못하고 간신히 생명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다시 하루를 부지했다.

임자, 일어나게. 자네 이렇게 약하지 아니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생명이 붙어있다는 말과 달리 새하얗게 질려 식물인간이 된 그녀는 살아있는 것같지 않았다. 태황제가 무어라 계속 말을 걸어도 그 입에서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활동사진을 보고 난 후, 이틀 뒤, 엄선영은 사망했다. 태황제는 격앙되어 엄선영의 시신을 잡고 흔들었으나 그래도 엄선영은 깨어나지 않았다.

, 쉽게 죽는군.”

데리우치는 활동사진을 다시 보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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