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왕은 황극 북쪽의 방으로 엄선영을 불렀다. 그 곳으로 가는 길 동안 궁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는 돌병사들처럼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엄선영은 살아있는 자들의 그런 눈빛들이 낯설었으나 명받은대로 왕이 부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찌 여기 계시나이까.”
왕은 팔괘의 방에 있었다. 왕의 침실이 있는 주변으로 8괘를 상징하는 여덟 개의 방이 있다. 그 8괘를 상징하는 여덟 개의 방 중 북쪽의 방은 왕의 머리가 향하는 곳이기에 신성시 되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다.
“여기가 과인의 머리맡의 곳이구나.”
왕은 웃었다. 엄선영은 순간 불안했다. 장소도 이상했거니와 얼굴에 머무는 헛웃음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하께서 불안해하다가 어딘가 정신이 이상해지셨다면……. 무엄한 생각이었으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리 오라.”
“전하.”
“자네도 과인을 그리 보는가? 백성들은 나를 외면하지.”
“전하.”
“자네도 한 백성이겠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물러나는 과인을 무능하다 보리.”
“어찌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엄선영은 강하게 말했다.
“오게.”
이상한 분위기에 엄선영은 앞으로 나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에야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오는 동안에 동료들의 표정이 이상하였다. 시기와 선망이 함께 묻은 그 눈초리의 정체가 이제야 짐작이 가는 듯하였다.
“궁녀는 왕의 여자라 하였는가?”
“전하.”
“전하, 전하, 그 말밖에 못하는가? 진정 내 여인이라면 자네는 거부할 수 없으리.”
임금이 다가와 옷고름을 풀었다. 두꺼비같은 엄선영의 얼굴이 떨었다. 서서히 마음에 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는 다른 이들과 다르더라. 내 언제부터 국정이 복잡할 때 자네가 생각나.”
옷고름이 떨어지고 살결이 드러났다. 두터운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살결이 연약했다. 몸집은 커도 손과 발이 작고 체격은 여러모로 궁녀에 걸맞지 않는 선영이었다. 선영은 정신없는 와중에 중전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얼음장이 되는 기분에 임금을 보았다.
‘아니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선영이었지만 파고드는 임금을 끌어안았다. 위태로운 임금이었다. 말은 나오지 않았고 그녀의 안으로 그가 들어갔다.
임금은 욕구를 풀 듯 정신없이 선영을 탐했다. 선영은 신음했다.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왕의 육신이었다. 궁녀라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왕이라는 자리. 그러나 마음이 왜 이럴까. 이 마음은 왜 이런단 말이냐.
날이 밝자 엄선영은 치마를 둘러입었다. 그 것은 왕에게 승은받은 궁녀의 표식이었다. 엄선영이 치마를 두른 채 가장 먼저 보았던 이는 방동무인 숙양이었다.
‘숙양이 왜 여기에…….’
그러나 의문은 이내 풀렸다. 8괘를 상징하는 방에 숙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지밀의 나인들. 어젯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숙양이 어떤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정가 숙양, 자네.”
“감축드리옵니다.”
상궁으로 오르고서도 둘만 있을 때에는 편히 대하던 숙양이었다. 그 경어에는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엄선영은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숙양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았던가?”
“자네 마음도 그러하지마는, 주상전하께서 친히 물으셨는 것을. 후한이 두려워도 한 번 사는 인생을 이러함이 낫지 않소. 사랑하는 사람이 임금이신 것은 복일세.”
“고맙네.”
“그래.”
엄선영과 정숙양은 웃음을 나누었다.
“나중에 보답하겠네.”
“그러시게. 끝내 나에게 의논하지 않았던 것은 섭섭지만, 내 참도록 하지.”
숙양의 말은 장난스러웠다. 선영은 그제야 무언가 뿌듯해졌다. 승은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어린 이도 승은을 입으면 특별상궁의 직위로 오르며 왕가의 자식이 들어서면 평생 풍족히 지낼 뿐만 아니라 종 5품을 넘어선 내명부의 벼슬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엄선영은 원하는 사람을 얻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했던 새벽의 밤이 지나고 스스로의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단순한 충성심으로 끝나지 않았던 그 감정의 정체를 그 동안 스스로 숨겨놓았던 것인지 치마를 둘러입고서야 마음이 뭉클했다.
그러나 세상은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그 날, 내전은 발칵 뒤집혔다. 엄선영은 만 32세의 늙은 궁녀였다. 당시 10대에 결혼하는 것도 흔하여 빠른 사람의 경우 32세에 손주를 보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떡두꺼비같이 못생긴 외모로 유명한 엄선영이었다. 중전 민씨가 엄선영을 들였을 때 외모가 안심을 할 정도로 못생겼기에 그렇게 특권을 누리는 것이라고 떠드는 이들도 많았었다. 그런 궁녀가 승은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선영과 임금이 자연스레 사랑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고 선영의 계략을 상상하며 그 날의 안주거리로 삼았다. 사람들은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그 것을 즐겼다.
어떤 사람들은 엄선영이 음침하고 계략을 꾸미는 음탕한 계집이라고 말하며 수군거렸다. 상상도 못했던 그런 일을 어떻게 꾸몄는지 계집들이란 무서운 것들이라는 말들을 환관들은 나누었다. 소문은 그 날 하루로도 끝간 데를 몰랐다.
그런 만큼 중전 민씨의 그 소식이 들어간 것도 금방이었다.
“엄상궁이 승은을 입었다 하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중전 민씨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엄상궁. 자신이 늘 의논했던 그 엄상궁이었다. 중전 민씨는 온 몸을 떨며 일어섰다. 엄선영이 임금과 동침했다.
그 자가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35세가 되어서야 상궁이 되는 내전의 관례를 깨고 특별히 아껴 상궁으로 위임했던 엄선영. 중전 민씨는 배반감에 치를 떨었다. 미쳐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격노였다. 중전 민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옆의 상궁을 불렀다. 그녀는 상전의 흥분에 두려워하며 중전 민씨를 보았다.
“엄상궁이 맞느냐?”
“송구스러우나…….”
“어찌 그 자! 그 자가! 엄상궁이 내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고정하시옵소서.”
자신의 상처를 달래던 그 말들도 다 거짓인가.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엄선영은 믿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궁녀의 여색을 탐했던 주상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배신감. 그리고 자식을 놓지 못하는 상태에서 당했던 그 설움들. 그 것을 아는 엄선영이 자신에게 그랬더란 말인가.
“형리를 불러라! 형틀을 대령하라!”
중전 민씨는 일어서서 흥분으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며 말했다.
“마마.”
“어허! 어서 대령하지 못할까!”
“대령하겠사옵니다.”
중전의 기세에 눌려 궁녀는 고개를 숙였다.
“엄상궁을 불러라!”
“마마, 불러서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옵니까.”
“네 감히 내게 대꾸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엄상궁을 불러오라! 내 직접 매를 치겠다!”
왕실의 법도로는 승은한 궁녀를 승은한 것을 이유로 대어 해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궁녀며 환관이며 모두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조정 최고 실권자인 중전 민씨였다. 법도와 실권 사이에서 그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형틀은 금방 대령되어 대전의 뜰에 살기를 풍기며 섰다.
엄선영이 끌려들어왔다. 형틀을 보고 중전 민씨의 눈을 본 엄선영은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중전 민씨가 자신에게 풍기는 그 증오가 배신감이었기에 더욱 아팠다. 엄선영은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내전의 이들은 자신을 보며 더없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전 민씨의 여린 손으로 직접 무거운 매를 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로 화를 내고 있었다.
“형틀에 묶어라!”
엄선영은 눈을 감았다.
“아주 태평스럽구나! 단순히 처벌로 끝날 줄 아느냐! 내 너를 죽이고 말리라!”
살기. 중전의 말을 짜랑하게 울려퍼졌다. 이제까지, 중전은 꺼낸 말은 실행시켰다. 그녀가 죽이고 말리라 하였다면, 이제 엄선영은 죽는 것이다.
그 순간 엄선영과 가까이 지내던 나인 박소화는 발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었다. 그 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박소화의 어린 나이를 감안해 사람들은 스승나인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며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그러나 박소화가 가는 곳은 명백히 목적이 있었다. 그녀는 목표를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다급히 외쳤다.
“전하!”
“네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임금을 모시던 환관이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그 역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화는 임금에게 고했다.
“주상전하! 엄상궁의 목숨이 위태롭사옵니다. 부디 살펴주소서!”
“엄상궁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위태롭다니? 왜 위태롭다는 말이냐?”
임금은 놀라서 말했다.
“중전마마께서 형틀을 대령하라 하셨습니다.”
소화는 흐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우는 박소화의 말에 임금은 당황했다. 질투가 있는 중전이라 하였으나 그 것은 왕세자의 서열다툼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였다. 왕세자의 지위가 굳건한 지금에야 그렇게 혹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자가 장성한 이후로 궁녀와 잔 적은 없었고 자연히 중전의 질투도 없었다. 엄상궁이라면 중전과도 가까운 터, 아무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임금은 용포를 휘날리며 급히 걸었다.
그 시각, 엄상궁은 형틀에 매여있었다. 중전은 이유를 추궁했으나 엄선영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왜 배반하였냐 하여도 이유가 있어 배반한 것이 아니었고 주상에 대한 계략을 캐물어도 계략으로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으나, 그러했다.
마음은 있었다. 허나…….
그 상황 자체가 엄선영에게 안개가 낀 듯 멍했다. 자신은 열심히 살았던 것같다. 그런데 자신은 어디를 향해 열심히 살았을까. 왕가와 임금만이 자신의 전부였고 왕비를 위해서도 열심히 행동했던 것 같다. 그랬을 뿐인데 자신은 지금 배신자였고 익숙한 얼굴의 환관들이 형을 집행하는 기구를 들고 있었다.
힘.
이 것이 힘이구나, 싶었다.
부질……없다…….
익숙한 얼굴들도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개 중에 자신을 노려보는 이도 있다. 입을 열며 욕을 하는 듯한 모양새도 보인다. 어쩌면 지금 이제 죽으리라. 즐겁지만은 않은 생이었다. 엄선영은 여기로 끌려오며 한 마디 말도 제대로 나누어본 적이 없던 나이든 상궁과 선배, 최무희에게 “권력에 환장한 미친개.”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 권력…….
가슴에 불이 일었다.
그들에게 향하는 분노를 드러낼 수 없어 엄선영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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