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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달려가는 동안, 왕은 침소에서 잠옷인 하얀 옷을 입은 채로 김옥균을 마주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있었던 것이 1년 반 전. 바깥의 소란을 들은 국왕과 중전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른 채로 다만 임오군란 때의 피비린내를 생각하며 도망쳐야한다는 것에만 동의하고 있었다. 임오군란 당시 그들은 감히 내전까지 들어와 칼을 휘둘러 댔다. 그런 난리가 터졌다면 피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들은 김옥균이 이끄는대로 창덕궁 서쪽에 있는 경우궁으로 향했다. 궁이라기 보다는 사당에 가까운 경우궁.

김옥균의 의도대로였다. 개화당의 병력은 1000여명. 많다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작은 궁궐이어야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할 수 있었고 경우궁은 협소했다.
김옥균은 왕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칙명이 필요하다 여쭈었고 일을 알지 못하는 왕은 김옥균의 조언에 따라 일본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우궁으로 파천한 후, 궁궐 안의 사람 중 사태를 파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난리 중에도 환관과 나인들은 왕을 모시고 있었다.

저기야!’

어둠 속을 헤매던 엄선영은 횃불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선영은 빠르게 걸어 가까스로 파천하는 임금을 따르는 궁인들의 무리 안에 들어갔다. 어두운 길에서 횃불 몇 개를 목표삼아 사람들은 우르르 달리고 있었다. 선영은 겁에 질린 아기나인들을 다독거려가며 어두운 땅밑만 보고 걸었다.

경우궁에 가는 길은 평소에는 먼 듯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무척이나 멀었다.

환관이며, 궁녀며, 모두 뒤섞여 걸은 일행은 경우궁 안에 도착해서야 군인들의 지휘에 따라 양 옆으로 나뉘었다. 엄선영은 지밀이었으므로 대신들의 눈짓에 따라 얼른 임금의 일행과 함께 궁 안으로 들었다.

엄선영이 마루께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처형광경이었다. 환관 유재현.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의 기백조차 없이 대신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엇다.

배신자! 무어라 말을 못하는구나!”

그들의 분노에도 유재현은 말이 없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죽어 마땅하다!”

많은 궁인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개화당은 칼을 들었다. 그 둘러싼 궁인 중에 한 사람으로 있던 엄선영은 새하얗게 질렸다. 제대로 된 상황은 알지 못하였으나 끌고 온 이들이 개화당이며 처형당하는 사람이 유재현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사태는 짐작되었다.

유재현은 환관으로, 본래 개화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로를 바꾸어 청국의 편을 들고 있었던 자. 방 안에서 취소하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으나 칼은 이미 허공을 떠난 뒤였다. 유재현은 목이 반쯤 잘린 채 바닥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정변 첫 날부터 수구파로 판단되는 자들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보자 엄선영은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개화당에 몸담았다가 현재에는 배반했다고 판단될 수 있지 않는가? 그 동안 그들이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를 본다면,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유재현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선영은 손가가 새하얗게 굳었다.

이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선영은 입을 앙다물고 황급히 그 곳에서 벗어났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할 때에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궁녀라면 대개 자신을 알 터, 선영은 무턱대고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앞에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중전마마를 뵈어야하니 부디 제발 그리로 안내하여주소서.”

그 앞의 누군가가 누군지는 상관없었다. 이제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이 개화파에게 사실대로 고하면, 자신은 죽는다. 그들이 자신을 돕는다해도 가는 도중 얼굴을 들키면 자신은 죽는다. 그렇지 않으면 산다. 살 확률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그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중전마마라 함은, 나를 말하는 것인가?”

선영이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중전 민씨가 있었다. 중전 민씨는 임금과 함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은 중전 민씨의 신중한 처사를 엿볼 수 있었다.

마마!”

엄선영은 크게 안도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선영이 유재현의 죽음을 전하자 왕비는 지시했다.

자네가 오다니 행운일세. 창덕궁으로 가서 심상훈과 접촉하게. 난이 일어났다하나 김옥균을 믿을 수 없네. 사태가 어찌 된 것인지 파악해다오. 난리가 일어난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저 자가 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유재현의 죽음을 그녀도 미심쩍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국왕의 이름으로 민태호와 민영목을 불렀는데 둘 다 민비수구파의 거물로서 궁궐에 왔다면 중전 민씨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을 것인데 온 것인지 아니 온 것인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왕의 칙명은 분명히 갔을 터인데 소식이 없었다. 유재현의 죽음으로 그 침묵이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다.

심상훈이라면 우리쪽으로 의심받지도 않는 인물이야. 꼭 연락하게.”

심상훈이라 하면 중전의 일가였다. 중전 민씨의 큰아버지의 외손이다. 그러나 평소 정치색이 없던 인물이었으며 심가라 하면 민가보다는 의심이 덜할 것은 틀림없었다. 엄선영은 고개를 숙였다.

알았사옵니다. 꼭 사태를 알아오겠사옵니다.”

궁궐로 다시 돌아가니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국왕이 부른 민태호와 민영목은 죽었다. 민비수구파로 분류되던 이들은 거의 죽었다. 민영익대감은 죽지 않고 외국공사관에서 알렌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엄선영은 심상훈을 불러 사태를 전했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심상훈은 걸음을 비틀거리며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입궁했다. 선영은 심상훈의 표정을 보아, 그도 사태를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엄선영이 심상훈에게 소식을 전할 때였다. 급작스럽게 신정부 수립이 발표되었다. 궁녀가 아닌 채로 일을 보는 아이가 전한 그 소식에 엄선영과 심상훈은 아연해졌다.

아니,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심상훈이 외쳤다. 경우궁으로 파천한 지금,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 영국총영사, 독일영사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신정부의 수립을 알렸다고 한다. 그 새 내각이라는 것도 철저히 개혁적이었다.

이 것이 무엇인가!”

김옥균이 내무와 재무권을 장악한 새 내각이었다. 좌의정엔 홍영식이 올랐고 서재필은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박영효와 서광범이 군사권과 경찰권을 쥐었다. 도승지에는 박영효의 형 박영교가 임명됐다. 왕을 납치하였으니 이제 정권을 개화당이 잡겠노라하는 속내가 보이는 인사조정이었다. 또한 민비수구파는 모두 제거되었으며 대신 대원군일파와 조대비일파들이 실권없는 명예를 얻었고 개화당은 주요 핵심 권력을 모두 차지 하고 있었다. 청년들답게 지나치리만큼 노골적이었다.

이 놈들이 일을 터트렸구나!”

엄선영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심상훈을 보았다.

개화당으로 꾸미고 궁궐에 들어가시옵소서. 저는 못 들어갈 것이옵니다.”

알았네!”

중전마마께 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시라 아룁소서. 그들이 경우궁으로 옮긴 것은 틀림없이 방비하려 하는 것이옵니다.”

엄선영은 말했다.

자네는 어쩔 셈이지?”

엄선영의 머릿속이 혼란했다.

자네! 청군에게 가보게. 내 먼저 그들과 연락했네만 그들도 자네와 똑같은 소리를 하더군. 우리 일족이 모두 죽기 전에 청군이 있어야겠소. 청군이. 청군이 있어야 주상전하를 구출할 수 있을게야!”

심상훈은 말했다. 며칠 전만 해도 인사를 나누었던 친척이며 친우들이 모두 죽은 터, 정치색이 없던 심상훈이었으나 몹시 감정적이었다. 선영도 임오군란에 보았던 핏빛이 현기증처럼 어른거렸다. 또 사람들이 죽어간다. 죽어가고 있었다.

두통이…….’

선영은 어지러웠으나 바삐 일어섰다. 선영도 시간이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엄선영은 청의 대사를 찾았다.

 

그 날 오후 5. 경우궁으로 파천하였던 주상께서 환궁하셨다는 소식이 있었다. 중전 민씨의 주장이었다. 계동궁으로 옮겼다가 다케조에가 승낙하자 중전 민씨는 고집스레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내키지 않았다. 창덕궁은 넓었다. 개화당의 병력은 결코 많지 않았고 경우궁이라면 어찌 지킬만 하였으나 창덕궁은 지키기에 버거웠다. 그러나 예전에 개화의 뜻을 함께 했던 왕의 마음은 돌아선 듯하여 계속 이동의 어명을 내렸고 마음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었으나 다케조에는 창덕궁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결국 창덕궁으로 옮긴 개화당은 경우궁과 마찬가지로 호위를 하였다. 내위는 충의계의 맹원들과 사관생도 50, 중위는 약 150명의 일본군, 외위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 1000명으로 둘러쌌다. 창덕궁으로 옮긴 후, 그 날 개화당은 밤을 새어가며 혁신정강을 세웠다. 그들은 그 것을 왕에게 들이밀었고 126일 오후 세시, 왕은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엄선영은 그 조서의 소식을 들은 후 왕의 생각을 읽으려 하였으나 쉬이 알 수 없었다. 주상께서도 개화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였으므로 이 것이 그의 뜻같기도 하였으나 개화당의 과격성은 국왕에게까지도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중전의 일가친척이 대부분 피살당했다. 아무리 자신의 일가는 아니라하나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중전께서 대단히 격앙되고 날카로운 상태인 것만은 분명했다.

개화당의 혁신정강 1조에 대원군을 귀환시키라 하였으니 주상께서도 마땅치는 않으셨으리.’

갑신정변 혁신정강 14개조는 개화당의 진취성과 이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진보적인 그 뜻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조서가 내려온 그 때. 오후 3.

연락을 취했던 1500여명의 청나라군이 대궐로 밀려들었다.

궁궐이 커서 방비는 여의치 않았다. 외위의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군이 응전하다가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중위는 없었다. 중위를 맡은 150여 명의 일본군은 벌써 없어진 뒤였다. 개화당은 없어진 일본군을 보고 당혹했다.

배신……! 또 당한 것이야? 나는 또 당한 것이야!’

김옥균은 차관을 빌리러갔을 때, 갖은 협력을 다하는 척 하다가 외무부 앞에 섰을 때, 김옥균의 위임장이 위조라고 주장했던 다케조에가 생각났다. 김옥균이 다케조에를 찾자, 그는 뜻밖에 차분했다. 일본으로 갈 배편까지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혁명은 끝났소.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남을 사람은 남으시오.”

그들은 분노했으나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으로 갔고 홍영식, 박영교 및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의 어가를 따랐다. 윤치호는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미국으로 피신했다.

엄선영은 청군과 주상, 중전이 만나는 그 행렬을 누구보다 어가에 가까운 곳에서 따라갔다. 그리 긴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얼굴이 청군에 익으니 눈치를 채기도 더 쉬울 것이었다. 3일 간의 혁명은 끝났다. 개화당의 몰락…….

중전마마를 너무 얕보았구나.’

엄선영은 어가를 따르는 개화당이 안타까웠다. 주상도, 중전도, 그리고 하물며 엄선영 저도, 앞서나가려 애쓰고 진보하려 애쓴 터였는데 어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엄선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엄선영은 궁녀라는 천한 신분을 엎고 비굴하게 사정할까하였다. 그 것은 양반이나 종친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의 처분은 어떻게 될까. 홍영식, 박영교와 저 사관생도 7명은 조선의 얼마나 큰 재산이란 말인가.

어가는 청군에게 인수되었다. 그리고 어가가 내리기도 전이었다.

해치워.”

마중나온 청군의 한 마디. 칼날이 번잡하게 움직였다.

아악!”

조선의 젊은 인재들은 처참하게 난도당하고 있었다. 엄선영은 동공이 커진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세우며 그 처참함을 보았다. 전에도 대감들이 피살당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러하지는 않았었다. 눈물이 흘렀다.

무슨 짓이요!”

엄선영이 왕가의 예를 잊고 바락바락 매달렸다. 그러나 댓가는 걷어차이는 것뿐이었다. 엄선영이 다시 달려 들자, 그들은 무자비하게 엄선영을 걷어찼다.

그만두게.”

어가에서 큰 소리가 나자 엄선영도 멈추고 청군도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젊은이들은 처참한 시신이 된 이후였다.

엄선영은 주저앉았다. 옆의 나인이 꾸짖었다.

일어나우……. 어서!”

개화당은 그렇게 져버린 듯 보였다. 흙 위에는 시신이 나뒹굴었다. 개 중에 엄선영이 아는 얼굴도 시신이 되어 누워있었다. 허망했다. 대원군도 나라를 위했고 개화당도 나라를 위했고 주상께서도 나라를 위하는데 어찌 이렇게 되는가. 청군을 불러온 것은 자신이었으나 자신도 나라를 위한 것으로 스스로 알아왔다. 자주독립, 자주강병. 개화를 공부할 때 자신인들 외치지 않았던가. 나라를 위하던 젊은이들이 흙 위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시체가 된 사람을 들자, 아직 따뜻한 피가 손에 뚝뚝 흘러내렸다. 선영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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