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귀환은 단순히 왕의 아버지가 귀환한 것과는 다른 문제로 흘러갔다. 조정의 인물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여겼으나 행동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이 회심으로 배치한 인물이 원세개였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들어온 원세개는 서서히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원세개는 애초에 조선을 청에 통합시킬 목적으로 부여받은 터였고 조선을 이미 청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인간성은 오만하고 타락했다고 말하기 충분했다. 그는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홍삼 수천근을 밀수출하려다가 해관장에게 발각되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직권을 남용하여 그 것을 그대로 수출하고 떼돈을 벌었다. 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일일이 간섭하여 포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청이 멋대로 하도록 두고 보았으나 이대로는 안되겠네. 원세개의 횡포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네.”
중전은 엄선영을 불러 나즈막이 말했다. 민영익대감이 옆에 있었다. 중전은 최근에 러시아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다른 강대국이 필요했던 것도 물론 그 이유였지만 러시아공사관의 웨베르가 사교성이 좋고 조선의 왕가에 호의를 표하며 조정의 호감을 산 이유도 컸다. 최근에 조선에 부임한 웨베르는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웨베르부인이 참 괜찮은 사람이더군. 러시아에게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가?”
“러시아에 대한 사대나 청에 대한 사대는 다를 것이 없사옵니다.”
민영익은 완고히 말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여 문물을 두루 알고 사교성도 풍부한 사내였다. 정책노선은 보수였으며 청에 대한 불만은 있었으나 원세개와도 자주 교류하며 지냈다. 그녀는 선영에게 눈짓했다.
“엄상궁, 자네의 생각은?”
“저 또한 사대는 문제라고 생각하오나 현재 청의 횡포가 심하니 러시아에 의지하는 것도 한 방법으로 보이옵니다.”
“내 생각은 엄상궁과 같네.”
민영익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엄선영을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청과 일본에 질릴대로 질린 조정은 러시아가 또 다른 해결책으로 보였다. 청과 일본에게 이권을 주지 않으려면 다른 강대국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나왔던 이야기였으나 어느새 새어나간 모양이었다.
‘민영익…….’
선영은 민영익을 생각했다. 그 이야기가 빠져나갈 곳은 그 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흥분하여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이 또 있음을 짐작하고 청에게 친서를 보냈다. 국왕과 왕비를 폐위시키겠다고 협박하여 나라가 뒤숭숭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친서는 허위보고였다. 그는 내심으로는 이 것을 조선의 국왕을 페위시킬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 소문을 반기고 그 소문을 더욱 크게 만들어 부풀렸다.
“조선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하옵니다.”
보고를 받은 이홍장은 일본을 견제하느라 내버려둔 조선을 어느새 러시아가 삼킨 것인가하여 당황했다. 원세개가 올린 보고는 조러협정문서에 조선국왕의 옥새가 찍혀있다고까지 적혀있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국왕은 분통이 터져 말했다.
“과인이 본 적도 없는 비밀협정 문서에 어찌 과인의 옥새가 찍혀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원세개를 불러오시오.”
그러나 원세개는 조선은 물론 조선의 국왕까지 무시하는 터였다. 불러도 오지 않았다. 왕이 답답해하자 엄선영은 고개를 숙이고 나름의 해결책을 읊었다.
“전하, 미국에서 온 데니참판의 말이라면 청도 귀를 기울일 것이옵니다.”
“엄상궁, 데니참판을 모셔오게.”
“명받잡겠사옵니다.”
엄선영이 나오는 참에 내시가 선영을 쿡쿡 찔렀다.
“데니참판께서 오늘 아침, 심각하다고 전하께 이 쪽지를 전하라하셨소.”
사태는 심각했다. 쪽지에 적힌 것은 금주에 머물러있던 72영의 청군이 함대를 끌고 조선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그 함대는 동해안 북쪽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동하고 일본 나가사키를 위협했다고 했다. 데니는 덧붙여 그 것은 조선의 귀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던 당연한 이유를 가르쳐주었다. 청은 이미 조선의 모든 전신회선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니참판께 빨리 가보아야겠습니다.”
선영은 치마를 위로 잡아들고 경박스럽게 보일 수 있을 만큼 허둥대며 나인들을 찾았다.
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궁녀였으나 엄선영은 왕의 특명으로 빠져나왔다. 화려한 서양식 건물이 눈 앞에 있었다.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선영을 데니참판에게로 데려다 주었다.
“청이 왜 이리 행동하는 것입니까?”
데니는 공사관까지 찾아온 엄선영을 보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조선이 러시아와 비밀협정을 맺었다고 하여 배반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일이 없습니다. 청의 핑계입니다.”
“이번에 청에서 온 자……썩긴 썩었더군요.”
데니는 원세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의 사태는 조선에만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의 작은 사회도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청국에 있던 미국 함대 오스피스호가 그 소식을 듣고 조선의 제물포에 도착하여 20명의 미해병대를 상륙시켰다. 미국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다.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면 외국공사관의 인물들을 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청은 군함 여덟척을 제물포에 입항시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신다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우리로서도 지금의 전하를 환영합니다. 부탁해줘서 고맙소. 원세계의 계책대로는 절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데니는 엄선영을 보낸 후, 바로 원세개를 찾았다. 미국공사관에서 만나기를 청한다고 하자 조선의 요청에는 코웃음치던 원세개가 바로 나타났다.
“조선국왕이 옥쇄를 찍었다는 비밀협정의 증거를 보고 싶소.”
“증거는 없소. 소식을 들었을 뿐이오.”
원세개는 당황한 듯 보였으나 애써 태연한 표정을 꾸며내어 대답했다.
“그런 정보를 당신이 직접 꾸며낸 것은 아니오?”
“조선이 러시아와 결탁하려고 한 것을 사실이오!”
“만일 그렇다한들 그 것은 조선의 외교이며 무엇보다 비밀협정사본도 없으면서 그렇게 대책없는 말을 내뱉을 수 있소? 자네는 조선의 왕과 왕비를 폐위하고 대원군을 왕으로 세워 청의 꼭두각시로 세우려는 것이지 않소. 조선의 모든 외국인들을 죽일 셈인가!”
외국공사관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들이 왕으로 세우려 하는 흥선대원군은 외국인들에게는 잔혹한 일면이 있었다. 천주교인 학살이 그 한 예였다. 외국공사관들이 현재의 주상인 고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젊은 사람답게 개방적이어서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외국공사관으로서는 정권이 청국으로, 그 것도 쇄국정책으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을 앞에 세워서 바뀌는 것은 결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조정이 공사관에 의지했던 선택은 최선이었다. 미국공사관의 데니는 이홍장과 대질한 이후 조선과 러시아의 비밀협정은 사실상 없으며 원세개의 조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청국 정부는 국왕과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를 대질시켰다. 그로 인해 원세개의 국왕폐위전략은 드러났지만 데니의 항의에 청은 원세개를 파임시킨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조선을 차지하려는 청의 속셈은 더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아버지는 역시 나를 폐위하러 오셨군.”
예상했다고 하여도 결코 그 것을 바라지 않았을 터. 나라 안의 가장 큰 적이 그의 아버지라는 것은 그에게 심적인 부담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굽힐 줄 몰랐다. 일본에서 머물러 있는 실패한 개화당이 흥선대원군과 접촉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한 때 꿈을 나누었던 개화당. 그들도 이제 자신의 적이다. 기를 쓰고 노력하는 것이 이제 무엇인지도 왕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초기는 그래도 즐거웠다. 나라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모든 힘을 기울여 나라 밖의 문물을 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남은 것은 어마어마한 나라의 빚과 반란.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애쓰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뜻으로 출발했던 이들이 원하는 것이 나라의 부국강병인지 일신의 권력추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왕 자신이 지쳤다.
서양인들이 자신의 편을 든 것은 의외였다. 청이나 일본 외에 서툰 말로 조정에 무례한 어법과 예법으로 화젯거리가 되는 서양인들이 오히려 믿을 수 있을 성 싶었다.
‘그러나 그들도 믿을 수 있으랴.’
왕은 의심을 놓치지 않았으나 그래도 서양인에게 가장 호의적인 정책을 베풀었다. 러시아의 웨베르 대사와 알렌부인과 데니부인은 왕실에서 큰 인정을 받아 아이들을 데리고 왕세자와 함께 놀 수 있도록 까지 하였다. 이권을 얻기 위해 눈이 벌게진 일본과 청보다는 외국공사관이 더 믿을만하였고 강대국으로서의 힘도 있어 조정으로서는 안심되는 것이었다.
엄선영은 외국인들의 알현을 보고 무엄하다고 생각하였다가 나중에는 함께 웃었다. 그들은 어려운 시국에 즐거운 이들이었다. 그들은 경어체의 사용을 특히 어려워하여 주상께 감히 반말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조심해야하는 궁궐에서도 몸짓이 컸다. 주상은 그 때마다 “그들이 무엇을 알겠느냐.”하며 온화하게 대응하였으나 훗날 2차조러밀약설로 불리우는 그 음모와 원세개가 위협했던 그 난폭한 말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채로 얼굴에 어두운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밤을 새기 일쑤에 수라를 제대로 자시지 못하는 것을 보며 엄선영은 마음이 쓰렸다.
타국의 교류에 국왕과 왕비를 폐위한다고 들고 일어서는 그들은 오만했다. 그런 위협을 왕은 또한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신기한 외국인 외에는 모두 적이다. 저 외국인들도 아직은 큰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찌될지 모른다.
엄선영은 왕의 침실에 보료를 깔았다. 왕의 침실은 궁궐의 정중앙에 놓여있었으며 그 것은 바로 지상의 황극을 뜻한다. 황색이란 중앙을 뜻하며 중용을 뜻하는 색. 스스로의 절제를 요구하는 왕 혼자만의 침실이었다. 중앙은 방향이 없다. 위아래와 좌우에서도 자유로운 채로 모든 것을 포용해야만 했다. 대전들의 중앙에 있는 강녕전은 온갖 소용돌이 속의 태풍의 눈으로 보였지만 동시에 포위되어 꼼짝 못하는 위치인 것으로도 보였다. 정중앙에서 쉬어야하는 왕은 쉬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노출되어 있었다. 그 황극의 주변으로 8괘를 뜻하는 8개의 방이 있었으며 그 방마다 지밀의 나인들이 숙직을 하고 있었다. 엄선영은 강녕전에 든 왕에게 아뢰었다.
“보료를 깔았사옵니다. 오늘은 부디 편히 주무소서.”
“엄상궁. 언젠가 이 나라가 침탈당하겠는가?”
반복된 실패에 국왕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나라의 힘은 강해지기는커녕 점점 조금씩 그들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시기를 늦추고 있을 뿐이라는 불안이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시나이까.”
“점점 어려워지고 있네.”
“주상전하께옵서는 역사에 능통하시옵니다. 수많은 침탈 속에서도 굳건히 일어섰던 조상님들을 아시옵니다.”
“중전도 이제 살아남는 일에 치중하는듯해.
“외교가 탁월하신 중전마마이옵니다.”
“과인은…… 이리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하는 고민이 드네. 방해꾼들은 너무 많고 세월은 보이지 않아.”
“당분간 외국공사관에 의지하옵소서. 그들도 그 곳은 건드리지 못하옵니다.”
엄상궁의 태도는 깍듯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섭섭하였다.
“자네는 이 상황이 어찌 보이는가.”
“전하께옵서는 어린 시절 가난하셨사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일국의 왕으로서 위엄이 있으시옵니다. 일개 군밤장수에게 천대받으셨으나 훗날 힘을 길러 그를 처형하셨습니다. 그렇게 될 줄 누군들 짐작치 못했을 것이옵니다. 지금도 그 가난한 시절일 뿐이옵니다.”
“군밤장수……. 엄상궁이 어찌 그 것을 아는가?”
“궁궐에 있사오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하옵니다.”
왕의 물음에 엄선영은 태연하게 둘러대었다.
“그 서러움은 저도 아옵니다.”
엄선영은 덧붙여 말했다. 그 말은 자칫 무엄해보일 수 있었으나 임금은 말이 없었다. 임금은 궁궐에 들어온 전깃불을 껐다. 불은 밝은 만큼 꺼지자 더없이 깊은 암흑으로 보였다. 엄선영은 말없이 물러났다. 왕은 자는지 자지 않는지 암흑 속에서 있었다.
“궁녀는 왕의 여자인가?”
자지 않았던 것인지 암흑 속에서 말이 들렸다.
“물론이옵니다.”
암흑 속에서 말이 그쳤다. 선영은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자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을 지키며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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