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으이그.”

 

뭐 하고 있었어?”

 

좀 쑥스러운데. 시를 쓰고 있었어.”

 

채희가 자신이 쓰던 노트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비밀로 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과제야?”

 

그냥 썼어. ?”

 

곧 채희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제훈은 손을 내밀었다.

 

뭐야? 이 손은.”

 

내 작사가면서 무슨 소릴. 줘 봐. 읽어보게.”

 

아직 수정 전인데.”

 

채희는 머리카락을 꼬았다. 하지만 곧 방에 들어가서 노트를 한 권 가져왔다. 노트는 맨 앞에 깔끌한 글씨로 습작노트라고 적혀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에 달과 별이 걸려 있는 게 너무 예뻐서 써봤어.”

 

음률에 안 맞으면 개사해야할 지도 모르겠지만 흠. ?”

 

제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

 

너 누구 사랑해?”

 

갑자기 웬.”

 

채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네가 사랑시를 썼길래.”

 

사랑시 아니야.”

 

오늘 썼다고 했지?”

 

.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이야.”

 

너 오늘 누구랑 같이 왔어?”

 

제훈은 사뭇 집요했다. 시의 제목은 가시나무였다. 노트에는 채희가 쓴 짧은 시가 적혀 있었다.

 

 

 

가시나무

 

 

하늘에 걸린 달이 깊이 패인 채 떠나려 하고저

달이 패인 흔적은 제자리에 서서

둥그런 님을 그리고 있었다.

 

흔적은

사랑하였네라

 

그래서 상처 입힌

님을 보내고자 하였다

 

달은 홀로 떠나갔지마는 도망친 것은

흔적이었네라

 

그는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시를 다 읽은 제훈은 심장이 몹시 두근거리면서 불쾌한 느낌이 치솟아 올랐다. 제훈은 눈이 빨갛게 달아올라 채희를 보았다. 머리가 뒤집힐 것같았다.

 

이게 사랑시라니. 여기서 사랑은 빗댄 거잖아.”

 

채희는 변명하듯이 말한다.

 

누구랑 오긴 왔네.”

 

제훈은 간신히 웃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로진선배랑 같이 왔어.”

 

로진?”

 

제훈의 말끝이 몹시 올라갔다. 이제는 얼굴이 빨갛다.

 

이름 막 부른다. .”

 

채희는 타박했다.

 

가시나무가 로진이고 달이 너라 이거냐? 지금?”

 

제훈의 말은 명백히 시비조였다.

 

아니. 너 왜 그래?”

 

미쳤어!”

 

왜 그러냐고 묻잖아.”

 

너한테 빨간 색으로 그인 악의섞인 사진을 누가 보낸 줄 알아? 아니 누구 때문인 줄 알아? 다 로진때문이야. 로진! 게다가 여긴 왜 데려왔어? 여기가 네 집이라고 떡 소개한 거야? 제 정신이야?”

 

말을 왜 그렇게 해?”

 

로진이 어떤 놈인 줄 알아?”

 

제훈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체구는 작아도 가수 지망생이어서 목청만은 컸다. 채희는 기에 눌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물렸다.

 

E사 들어봤지. 요새 다이어트식품 선전하는 그 회사. 다 한 번씩은 들어봤잖아. 텔레비전만 틀면 광고 나오고.”

 

그게 로진 선배랑 무슨 상관이야.”

 

그 집 첫 째 아들,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후계자야! 그 놈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직접 물어봐. 뭐라고 하는 지. 재산이 수백억이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너를 만나냐? 왜 만난다고 생각해? 장난질이야. 장난질. 만만한 여자 그냥 데리고 노는 거야!”

 

. 순간 제훈이 얼어붙었다. 손등이 얼얼했다.

 

그만해. 자꾸 그러면 다음에는 뺨이야.”

 

정말 넌 하나도 모르는구나. 그런 사람들하고 우리는 다르다고. 선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도 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라는 거야?”

 

남자친구를 만들라는 말이야! 그딴 놈한테 현혹되지 말고!”

 

.”

 

채희는 입을 벌리고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훈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봐도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없으면 내가 있잖아.”

 

제훈은 손바닥을 가슴에 올렸다.

 

무슨 뜻이야?”

 

진짜연애든 가짜연애든 내가 남자친구가 되어줄게!”

 

채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보고 채희와 함께 일어선 제훈을 바라보았다.

 

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너한테 고백하고 차인 것도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것때문에만 하는 말이 아니야.”

 

제훈의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채희는 더 듣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정말로 너를 위해서 한 말이야!”

 

닫힌 문을 향해 발악하듯 제훈이 외쳐댔다.

 

 

 

그러나 채희는 아예 현관문 바깥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삑거리는 문소리를 듣고 제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오래 전부터 자신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로진은 다가왔는데 자신은 아무리 몇 년간 노력해도 그저 형제같은 그런 존재였다. 특별하다고 해도 그런 존재는 싫었다.

 

카톡이 오고 있었다.

 

무시해오고 있었지만 채희가 사라진 방 안은 카톡이 더 날카롭게 울렸다.

 

제훈은 신경질적으로 카톡을 보았다.

 

-소윤누나

 

그 사람이었다.

 

 

 

겨울인데 축제라니 우리 학교도 특이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패딩에 얼굴을 파묻은 여자아이 둘이서 텐트를 세우다가 투덜거렸다. 채희는 수업을 마치고 텐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의문의 사진이 사물함에 채워지고 나서 친구들은 묘하게 채희를 슬슬 피했다. 오늘도 동아리방에는 평소에 김아정이라는 친구와 함께 갔는데 그 친구도 오늘은 다른 선배들과 밥을 먹다가 동아리축제에 참석하겠노라고 말했다. 채희가 저도 함께 밥을 먹자고 말했지만 아정은 크게 곤란한 표정이었다. 채희는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채희가 낑낑거리며 책상이며 텐트를 치는 친구들에게로 가서

 

뭐 도울 것 있을까?”

 

라고 말했을 때도 아이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야. 괜찮아. 쉬어.”

 

라고 말했다.

 

괜찮긴 뭘. 무거워 보이는데.”

 

채희는 책상의 한 쪽에 힘을 보탰다. 그러자 아이들이 놀라서 책상을 놓쳐 버렸다.

 

.”

 

채희는 갑자기 무거운 힘이 손과 팔에 내려앉자 책상과 함께 천천히 바닥을 향했다. 팔이 얼얼했다. 인대가 늘어나는 고통이었는데 다시 움직이는 것을 봐서 심하게 다친 것같지는 않았다. 근육이 놀란 듯했다.

 

진짜 괜찮아. 쉬어. 쉬어.”

 

둘은 다시 책상을 들고 바삐 옮기더니 구석으로 가서 서로 마주보고 소곤거렸다. 그리고는 곧 텐트 밖으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