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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는 자전거와 함께 밤하늘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3학년이어서 과목을 잔뜩 신청해둔 덕택에 매번 마치면 저녁이었다. 요 며칠은 로진이 스토커처럼 마칠 무렵에 찾아오는 통에 마른 나무가 빼곡한 하교길을 함께 걷던 버릇이 들었는데 오늘은 이유도 없이 로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완전 제멋대로!’
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주일간 방치되어있던 자전거보관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잘됐어! 오히려 자유롭게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채희는 로진을 만나면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으며 페달을 밟았다. 싫은 것은 아니었고 좋고 싫음으로 굳이 나눈다면야 좋기는 했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별나다. 예의바른 듯이 보이지만 가식이거나 혹은,
‘내가 너무 좋다거나? 으으, 아냐. 아냐. 착각은 병이야. 심채희.’
페달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었으면 분명히 허공에 멀리 던졌을 것이고 침대와 발이 있었다면 침대와 바닥을 오가며 쿵쿵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오글거림을 자전거페달에다 토해낼 수 있었다. 자전거는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심봤네 국수집.
자전거가 멈춘 곳은 거기였다.
채희네 집은 국수를 전문으로 10년 간 버텨온 집이었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했지만 열심히 일을 하셨고 씩씩한 어머니가 가게의 간판 역할을 하며 이럭저럭 10년이 지내올 수 있었다. 1층은 가게였고 2층은 채희네가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3층은 5년 째 서울로 유학온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이름은 제훈이라고 한다.
채희는 서슴없이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오늘은 기타소리랑 노래소리가 안들리네? 대학로에 가서 공연하고 있는 거니? 류제훈?”
그녀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문 안잠궜으면 연다!”
“아, 안돼! 잠깐만!”
“있구만!”
채희는 집 안의 문을 열 듯이 벌컥 문을 열었다. 제훈은 황급히 뭔가를 품 안으로 쓸어담았다. 채희는 의심이 가득담긴 눈으로 제훈에게 다가와 그가 어미닭처럼 품고 놔주지 않으려는 그의 달걀을 보았다. 사진들이었다. 채희는 픽 웃었다.
“너어.”
“뭐가!”
“로진 선배 팬이었어?”
그 사진들은 모두 로진의 모습이 제 삼자의 시선에서 찍힌 사진들이었다. 제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사진을 사느라 만원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거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그리고 착각할까봐 말하는데 나는 절대로 남자의 팬을 하지 않아.”
“로진선배가 적이라니? 수업도 같이 들은 적 없지 않아?”
“으윽.”
로진이 도강했던 사건은 까맣게 잊은 걸까. 제훈은 자신의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채희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머리스타일도 바뀌었네. 제훈이 너는 그 머리스타일 안 어울린다니까. 로진선배 따라했구나? 그 머리스타일은 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따라한 거 아니야! 팬도 아니야!”
제훈은 소리를 질렀다.
“밥이나 먹으러 내려와!”
채희는 싱긋 웃었다.
제훈은 그저 세들어사는 이웃집 주민이었지만 같이 산 세월이 10년이나 되었고 어릴 때부터 채희의 부모님이 돌본 탓일까. 거의 가족 같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오래 전부터 제훈과 채희네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제훈아! 얼른 와서 밥 먹자. 채희두.”
채희의 어머니인 민경은 두 사람을 불러모았다. 가게 구석의 앉은뱅이 탁자에는 이미 채희네 아버지가 웃음을 한가득 물고 앉아있었다. 잡채와 소고기 볶음, 흰 쌀밥이 상 위에 올라와있었다.
“이야, 잘 먹겠습니다!”
제훈이 외치며 밥숫갈을 들었다. 채희도 빈 자리에 앉았다.
“제훈이는 여자친구 안 사귀니?”
제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채희를 바라보았다. 밥숟갈이 허공에 멈추었다.
“에이, 엄마. 엄마는 뭐 그런 질문을 해?”
채희는 엄마를 타박했다.
“얘는. 요새 제훈이 멋부리는 거 안 보여? 매일 기타치고 노래부르더니 여자친구 생긴 거지? 맞지? 어째, 요새 가수활동은 잘 되어 가니? 힘들지?”
“저작권료는 조금씩 받고 있어요. 요즘 인디밴드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서요. 월세 낼 정도는 들어오고 있어요.”
“어이구 기특하네. 부모님한테 손도 안 벌리고.”
“아니에요. 알바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등록금도 다 자기가 벌어서 대는데 불효자죠. 배고픈 음악한다고 그러니까요. 용돈도 못 벌어 쓰고 겨우 월세 정돈데.”
“네가 열심히 하는 건 다 알고 있어! 언젠가 유명한 가수가 될 거야. 그런데 왜 국문학과를 간 거니?”
“가사를 예쁘게 쓰고 싶었어요. 엉뚱하죠?”
제훈이 짧게 자른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제훈이 채희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무딘 매력을 한 껏 드러내며 이번에는 제훈을 타박했지만 제훈은 빙그레 웃었다.
“참 심채희! 네가 쓴 시로 이번에 노래 만들었어. 발표는 소규모공연장에서 할 거야. 올거지?”
너는 모를 것이다. 음악을 하게 된 계기도 그리고 음악을 한다면서 거리공연을 하는 주제에 국문학과에 온 이유도 모두 너 때문이었다는 것을.
네가 국문학과를 간다고 했고 나는 좀 더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제훈의 성적은 그 의도가 불순했던 탓일까. 엉망이었다. 평균학점이 2점은 넘을까 말까했다. 제훈이 전형적인 베짱이 타입인 이유도 있었다.
상을 물리고 나서 채희는 뒷정리를 하다가 이번에도 도망치는 제훈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치우겠습니다.”
“됐고. 로진 선배 사진 나도 한 장 줘.”
“미쳤나봐!”
“아니 뭘. 미쳤다고까지 그래? 고등학교 친구들한테 우리학교에 잘생긴 선배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나, 남의 사진 그렇게 함부로 퍼트리는 거 아니야!”
“헐 자기는?”
채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 그 선배 좋아해?
제훈은 웃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채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싸움을 하듯이 노려보는 통에 채희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그랬군.”
제훈은 가위를 만들어 얼굴을 받치며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도 못해. 친해진 것도 며칠 안됐어.”
“남자의 촉으로 말하는 건데, 너 그 사람 조심해. 알겠지? 백 번 조심해. 천 번 조심해.”
“너랑 반대라서 괜찮아.”
“내가 뭐!”
“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독하구. 여자 많이 만난다는 소문도 들었고. 친구로서는 좋지만 위험한 걸로 따지면 네가 더 위험하지 않을까? 그 선배 겉은 날카로운데 생각보다 되게 순둥순둥해.”
“여자 많이 만난 건 철없을 때 그게 마냥 좋은 건 줄 알고 그랬지.”
제훈으로서는 변명 아닌 변명거리가 쌓여있었다. 우선 첫사랑과는 쉽게 헤어진다는 속설을 믿었다. 둘째 여자를 알아야 진짜 사랑에게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치 못하게 여자들을 울린 것도 사실이지만 제훈은 ‘너 때문이잖아.’하는 시선으로 채희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도 썩 철 든 것같지는 않습니다.”
채희는 제훈을 바라보며 보고했다.
“야! 그 놈도 여자 많이 만나!”
“이젠 거짓말까지 뻔뻔하게.”
“야!”
제훈이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로 고함쳤지만 채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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