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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이?”

 

소윤이 로진과 제훈을 번갈아보았다.

 

저도 밥 사주시죠?”

 

짐짓 허세였다. 제훈은 뻔뻔스럽게 고개를 치켜들고 요구했다. 그러나 170정도의 크지 않은 키와 마른 체구는 그 치켜든 자세조차 그렇게 위압감을 주지는 못했다.

 

너도 우리 동아리야?”

 

200여 명이었지만 남자의 인원이 적어 남자인 후배가 있다면 자신이 모를 확률은 적었다. 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인원이 인원이고 하도 사람 수가 많다보니 자신이 모르는 후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만.”

 

제훈은 예상과 다른 로진의 반응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허세의 부작용이었다.

 

그럼 못 사주겠는데.”

 

.”

 

제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로진은 그 때 일어섰다. 제훈은 더욱 이를 악물었다. 로진의 키는 182cm정도로 제훈보다는 10센치가량이 커서 체구에서 오는 위압감이 있었다. 키는 제훈이 생각하는 자신의 콤플렉스이기도 해서 그런 로진이 더욱 얄미웠다. 그런 제훈을 로진은 쳐다보지도 않고 채희에게로 걸어나갔다.

 

문득 로진은 제훈을 돌아다보았다.

 

채희는 우리 동아리라서.”

 

그 변명 아닌 변명이 제훈을 더욱 불붙였다. ‘두고 보자아아!’ 제훈은 마음 속에서 우렁차게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제훈을 두고 로진은 채희가 가방정리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왜 밥 사주시는 거예요?”

 

채희는 그와 캠퍼스를 거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안해서.”

 

미안한 거 알긴 아나 보네요?”

 

…….”

 

로진은 채희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꽉 다물고 눈은 흔들리는 걸로 봐서 결코 빈말로도 기분이 좋아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잘못했나보다.”

 

그런 말 자꾸 하면 기분 더 나빠지는 거 모르나봐요?”

 

내가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할텐데.”

 

로진은 쭈볏거렸다. 항상 간결하고 힘차게 움직였던 로진으로서는 이런 지지로진함이 견디기 힘들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고 멈출 수도 없었다. 알에서 깨듯이 조금씩 몸부림치면서 알에서 깨기 전에 엄마가 보다가 지쳐버려서 떠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아기새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단체로는 술을 마시거나 어울린 적이 있지만 이렇게 후배에게 밥을 사는 것도 처음이었다.

 

후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로진은 채희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어디로 가지?”

 

채희는 묵묵히 걸었다. 로진은 채희를 따라갔다. 채희는 계속 말이 없었다. 로진은 내가 이끌어가야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채희는 어느 순간 멈추어섰다. 로진도 뒤늦게 채희를 따라 멈추어섰다. 익숙한 골목이었다.

 

여기 가요!”

 

여긴.”

 

로진은 놀랐다.

 

운명?”

 

뭐라고요?”

 

로진은 자신의 입을 가로막았다. 자신이 혼자서 술을 마시러 자주 가던 일식 술집이었다. 자신이 이 곳에 출입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민훈선배 정도였다.

 

우리 마지막 수업이어서 지금 시간이 6시 넘었는데 밥하고 술하고 같이 먹어요. 선배만 괜찮다면요.”

 

좋아.”

 

로진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좌석에 앉아 안주로 먹을 우동과 돈가스를 주문해놓고 둘은 곧바로 술을 시켰다. 로진은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야 입이 좀 돌아가겠다는 계산으로 시킨 것인데 채희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러나 둘의 이야기는 술이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쩌면 흐릿한 조명 때문에 이미 조명에 술기운을 느낀 탓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제대로 이야기 하는 건 처음이네요?”

 

. 계속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얘기해보니까 어때요?”

 

좋아. 많이. 말하는 모습이 더 예쁘네.”

 

! 그런 말 계속 달고 살죠?”

 

, 무슨 말?”

 

선배랑 처음으로 둘이 만났을 때 했던 선배 농담 아직도 기억나는데? 너무 충격적이라서! 됐어요. 오늘 마시고 풀어요. 나도 잊어버리려고 하니까.”

 

그거 농담 아닌데.”

 

로진은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지만 채희는 입을 벌리고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로진은 젓가락을 주워 구석에다 놓고 주방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채희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지만 큼큼, 계속 헛기침을 했다.

 

사실은 선아선배가 많이 화났어. 그 때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사실 내가 많이 멍청하고 부족해서 자세한 건 들어야 알겠더라. 일단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한 것은 미안해. 그 땐 정말로 좀 흥분했었던 것같아.”

 

흥분이요? 엄청 차분하게 딱딱 떨어지듯이 말했잖아요! 무슨 말을 했는 지는 기억해요? 기억도 못하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 결혼하자고 했지. 기억하는데.”

 

으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랑 말도 안 나눠봤잖아요.”

 

첫눈에 반했지.”

 

채희의 손에 이끌리듯 일식 술집에 온 로진이었지만 그 때 쩔쩔매던 것은 어디로 가고 담담하다. 말문이 턱턱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이번에도 채희였다.

 

미안해.”

 

로진이 말한다.

 

뭐가요?”

 

그냥, 전체적으로 다.”

 

그게 미안한 거에요?”

 

채희는 헛웃음을 짓듯이 웃음을 토해냈다.

 

네가 기분 상한 것 같아서.”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아서 싫었던 거죠. 게다가 화경이랑도 사이 좋아보였고.”

 

그 날 후드티, 역시 너였구나.”

 

로진은 표정을 굳혔다. 그 날 본 것은 역시 채희였다. 하기사 그렇지 않았다면 선아선배가 채희의 이야기를 흥분해서 할 리도 없었겠지. 로진은 가지런히 젓가락을 정돈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안주를 가져다놓고 있었다.

 

미안할 일은 없어요. 장난이 아니었으면.”

 

그럼.”

 

로진은 뜸을 들이다가 채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귈까?”

 

, 어이가 없네요.”

 

또 잘못 말한 거야?”

 

결혼하자보다는 많이 발전했네요.”

 

채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어?”

 

좋고 싫고가 어디 있겠어요? 하나도 모르는데! 전 잘 모르는 사람이랑 사귈 마음 없어요. 선배도 저를 모르잖아요?”

 

첫 눈에 반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니. 지금까지 여자들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게 급히 사귈 마음이 없,”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다릴 수 있어.”

 

침묵.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선배를 더 잘 알기 전까지는 무리에요. 무엇보다 나는 그 외모가 마음에 안들어.”

 

……?”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로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반하고 잘생겨서 바람둥이 같단 말이에요!”

 

채희는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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