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일단 진심인 것같기는 하더라만.”
“아니야. 여자 후리는 기술이야.”
“걔랑 오늘 같이 술 먹어봤는데.”
“기분 좋아보이던가요?”
“좋아보이기는 하던데.”
“그 것봐! 진짜 좋아하는 거면 내가 이렇게 힘든데 자기가 그렇게 즐거울 수는 없는 거잖아? 나 완전 당했어요.”
그러면서 채희가 조용하게 울기 시작하는 통에 선아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간신히 채희를 달래놓고 전화를 끊자 이번에는 화경의 전화가 울렸다. 벨소리만 들었는데도 벨소리가 처량하고 기죽어 있었다. 선아로서는 어젯밤 로진이 화경을 버리고 자신과 채희를 따라온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에잇!”
선아는 속으로 화를 쌓아만 가는 밤이었다.
“뭘 사과하면 됩니까?”
“가르쳐야 알아? 사과 할 거야? 말 거야? 불행을 선물해놓고 어쩔 거냐고!”
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결혼 때문에...”
“관혼상례, 사람이 치르는 중요한 의식 중에 혼례가 있는 거 몰라?”
로진이 뭔가 잘못 파악하고 있는 듯 했으나 선아에게는 그 것을 정정해줄 애정도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그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니까 불행하다는 건가요?”
어제는 180도로 다른 불행을 껴안고 로진은 얼굴 밑까지 다크서클을 내리며 대꾸했다. 선아는 흠칫했지만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지!”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물론이지.”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같습니다. 제 생각만 했어요.”
“물론, 물론.”
로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나가보려고?”
로진의 몸이 동아리방 문을 향해 시체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사과하러…….”
“그래. 다녀와!”
선아는 손바닥을 로진이 보도록 해서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심했는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제 그리고 오늘 로진의 처세를 보면 그다지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그냥 연애를 하지 말어라.”
선아는 다소 잔혹한 말을 로진이 사라진 곳의 문 뒤통수에다가 내어뱉으며 낮게 배치된 사물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로진은 학교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특히 동아리방에 아무도 없을 때 그 자리에 틀어박혀 각개전투를 하듯이 빠르게 숙제를 끝내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다.
집보다는 학교가 좋았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학교동아리방에 앉아있는 로진은 좁은 동아리방 안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편치 못하게 하고 있었다. 펜도 뭔가를 적으려고 하다가 로진의 손가락 위에서 끊임없이 돌아갔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철제의자가 끊임없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진선배, 시험봐요? 불안한가봐. 계속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네.”
화경이 이끌고 다니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로진을 편하게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팬클럽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로진의 짐작으로는 화경이 그들의 리더라서 팬클럽을 만들어준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방금 들어온 후배는 그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니. 아 맞다. 그런데 채희라고 아니?”
로진은 황급히 물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인걸요.”
무심코 대답한 그녀는 곧 눈을 새초롬하게 뜬다.
“선배가 여자에 대해서 물은 건 처음인데? 걘 왜요?”
“사과할 게 있어서.”
“선배가 잘못을 해요? 신기하네.”
“큰 잘못을 한 거 같던데.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과는 하고 넘어가야할 것같아서.”
“전공수업 지금 걔도 있을 걸요? 가실 때 같이 가실래요?”
로진은 책을 덮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진으로서는 처음 안 사실이지만 자신은 꽤 소심하고 보잘 것 없었다. 채희가 어디 있는 지 알게 되자 꽤 마음이 내려앉으면서 안심이 되었다.
“휴.”
로진은 한숨을 쉰다. 오히려 보지 않을 때는 상상 속에서 편했는데 정작 지금에 와서 채희를 마주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더 괴롭다.
“어 선배! 이 수업 들어요?”
화경의 친구인 소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선이 모두 로진과 자신을 향해 있었다. 다른 학과 아이들도 로진을 구경하러 올 정도로 로진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우선 도자기같은 피부가 여자아이들보다도 고왔고 항상 정갈한 느낌이 들도록 머리매무새와 옷매무새가 깔끔했다. 로진과 가정부 아주머니만이 아는 사실이지만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도 ‘단정함’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로진은 뭘하든 자신은 단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뀌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호들갑에도 그저 고개 몇 번 끄덕이고 말았다.
“어, 저기 있다.”
로진은 어느새 소윤을 팽개치고 채희에게 다가갔다.
채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외면을 하면서도 채희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왜 저 선배만 보면 당황하는 거지? 정신차려!’
채희는 자신의 뺨을 짝 때린 뒤에 로진을 보았다. 채희는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기합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일까. 그 것은 째려보기에 가까웠다. 로진은 채희의 눈빛에 아랑곳 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네? 잘 안 들려요.”
로진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탓일까. 심채희는 몸을 한껏 뒤로 물렀지만 경계태세는 감추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음. 오늘 마치고 시간 되니?”
“이 수업이 마지막이긴 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그럼 마치고 할게. 밥이나 차나 아무 거나 좋으니까 사줄게.”
채희가 대답하기 전에 로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채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로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아선배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기합을 주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것으로 추측해봤을 때 그녀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는 것은,
‘채희가 계속 고개를 돌리는 걸 봐서도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은 맞아.“
로진은 수업은 듣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들지를 못했다.
그런 로진을 계속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2년 째 채희와 친구로 지내고 있는 남자. 제훈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제훈은 성큼성큼 로진에게로 다가갔다. 로진은 교수님이 나갈 때까지 자신의 수업도 아니었지만 수업을 하나도 듣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 수업 시작한 지 꽤 됐는데 오늘 처음 보는 분이네?”
로진과 함께 앉은 소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응! 우리 동아리 선배야!”
소윤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멋있지?”
“그렇게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나는 남자거든?”
“에이,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잖아.”
“헛소리하네. 왜 오셨어요? 아까 채희한테 밥사신다고 한 것같은데.”
그제야 로진은 제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였지만 미성에 가까운 청량한 목소리였다. 제훈은 웃음을 거두었지만 늘 웃고 다니는 얼굴이라 웃음기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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