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허. 됐다니까.”
“죄송합니다.”
채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괜찮아. 괜찮아. 첫날이니까.”
민훈이 웃었다.
민훈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민훈은 로진의 등을 밀었다.
“왜 이러십니까?”
“아가씨가 너를 데리고 가는 이유가 뭐겠냐. 곧 저녁인데 그냥 가봐, 데이트.”
“그런 건 아니지만요!”
채희가 외쳤다.
“네. 그런 건 아닙니다.”
로진이 맞장구치며 채희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왔다. 발걸음의 리듬이 맞지 않아 로진이 자꾸 휘청거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정문 근처 소극장에요. 시간 있어요?”
“네가 만들어줬잖아. 시간은.”
소극장은 6시부터 시작이라는 팻말이 놓아져 있었다. 로진은 소강당은 처음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봐요?”
“이 날씨에 꽃이 폈어.”
“이상한 꽃이네. 미친 꽃일수도 있겠어요.”
“아니야. 아름다운 꽃이야.”
로진은 묵직한 어조로 말하며 채희를 보았다.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 뜻이 아니라.”
“됐어요. 안에 들어가요.”
안에 들어가자 어둑한 조명이 비친 정도지만 사람이 로진과 채희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로진이 헛기침을 했다. 채희는 정중앙의 자리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더니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앉아요.”
“그런데 여긴 왜?”
로진은 얌전히 채희가 안내한 자리에 앉으면서도 물었다.
“친구가 무대를 하거든요.”
“그런데 나를 왜?”
채희는 머뭇거리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냥요.”
둘은 자리에 앉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조용한 가운데 어두운 조명이 비치고 로진과 채희의 침삼키는 소리가 가끔 울려 퍼졌다. 로진은 기다리다가 혹시 채희가 잠들었을까 옆을 보았다. 채희는 마냥 앞을 보고 있었다. 무대에 시선이 박혀있는 것 같았다.
“뭐 나는 좋다.”
로진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강당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열댓명쯤 들어오자 소강당도 곧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팜플렛을 보자 제훈이 단독공연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낯선 사진들이 주루룩 붙어있었다. 제훈은 그 중 아홉번째 순서였다.
채희에게 팜플렛을 건네받은 로진은 제훈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 친구?”
“맞아요.”
“저번에 봤어.”
“정말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나봐요.”
“뭘?”
“선배를 꼭 데리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 친구가?”
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로 인상이 깊지는 않았다. 웃는 것이 화려했지만 그 정도의 인상이다.
곧 노래는 시작되었고 채희와 로진의 대화는 끊겼다.
두 번째 가수가 나왔을 때 채희의 고개가 로진의 어깨에 닿았다.
로진은 깜짝 놀라 채희를 보았지만 채희는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처럼 쌕쌕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는 조용하다. 로진은 작게 숨을 내쉬며 무대 앞을 보았다. 각자 두 곡씩을 하며 들어갔고 한 명 당 10분 정도로 주어진 모양이었다.
순서가 아홉 번째가 되기 전까지 로진은 주의 깊게 들었다. 드디어 아홉 번 째가 되었을 때 로진은 채희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네 친구차례야.
채희는 쉽게 깨지 않았다.
로진은 두 어번 채희의 몸을 흔들다가 포기하고 앞을 보았다.
오늘의 출연진들 중에서는 제법 팬이 많은 모양이었다.
제훈이 의자에 앉아 기타를 쥐자 구석구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번 두 곡은 모두 신곡입니다.”
제훈은 마이크를 입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한 곡은 제 친구가 써준 가사를 바탕으로 작곡했습니다. 다른 한 곡은 다소 뻔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제 친구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현실고발성이 있는 노래입니다.”
제훈은 마이크 너머로 작은 웃음을 흩뿌렸다.
몇몇 사람들이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그럼 들어주세요.”
로진은 마지막으로 채희를 흔들었다. 채희는 깨지 않았다.
“제목은 가시나무입니다.”
‘채희가 쓴 시로 만든 노래인 것같은데.’
로진은 채희를 가만히 보았다. 아주 깊게 잠든 것같았다.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로진이 채희를 바라보는 동안 한 곡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달이 깊이 패인 채 떠나려 하고저
달이 패인 흔적은 제자리에 서서
둥그런 님을 그리고 있었다.
흔적은
사랑하였네라
그래서 상처 입힌
님을 보내고자 하였다
달은 홀로 떠나갔지마는 도망친 것은
흔적이었네라
그는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잘 잔다.’
로진은 중력을 따라 축 처진 채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두 번째, 노래입니다.”
이 번에도 로진은 채희를 보며 노래를 감상하려 했지만 눈이 번쩍 뜨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는 경쾌하게 기타를 튕기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는 게 노래 자체가 순 풍자조였다. 그러나 로진이 놀란 것은 노래의 풍자성때문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말하는 듯이 직접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재벌이라면 너를 사랑했을 거야. 그러나 어쩌나, 재벌을 좋아하는 것은 재벌집이었다네! 저리가, 저리가. 해도 안 가는 녀석들! 내 여자가 다쳐도 나는 보고만 있었지. 힘 있는 자가 괴롭히는데 내가 어떡해. 저리가. 저리가. 재벌집 여자들이 나를 따라다녀. 이걸 어쩌나 그냥 돈많은 여자가 좋을까.
사람들은 같이 온 짝들과 함께 숨죽여 키득거리며 노래를 들었다.
로진은 자신이 재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제훈은 200여명이 앉아있는 가운데에 자신을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노래는 풍자였지만 제훈의 표정은 능청스럽지도 않았다. 표독스럽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성 싶었다.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로진은 표정을 굳히고 제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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