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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남자

 

                                                                                     강복주

 

 

 

현관에는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현관 앞의 그는 세미정장식의 재킷너머로 책가방을 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전공서적이 서너권은 들어있어 제법 무거웠다. 책가방이며 재킷이며 운동화며 아주머니가 챙겨놓은 옷이었다. 로진은 주어진 옷을 불만 없이 입으며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도련님, 우산 챙겨가셔야죠.”

 

20여 년을 돌봐준 가정부 아주머니가 로진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로진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우산을 받아들었다.

 

걸어서 가실 거예요? 차타고 가시지. 정기사님 대기중이신데.”

 

로진은 무표정으로,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거의 웃지 않았다. 그 것은 3살 때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 대신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가정부 아주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같이 흐린 날에는 더욱 그의 표정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는 입대영장까지 와있었다.

 

아버지는 사내놈이라면 잔말 말고 다녀와.”라는 단 한 마디를 던졌다. 배다른 동생이 살갑게 말을 붙이며 건강하게 다녀오라는 말을 건넸지만 로진은 대꾸하지 않고 새어머니에게 문안인사조차 하지 않고 가정부 아주머니에게만 인사를 하며 밖에 나왔던 것이다.

 

흐릿한 하늘을 보면 오래 전 사고로 돌아가셨던 어머니가 우는 것만 같았다.

 

로진은 예전 어머니가 다녔다고 하는 유서깊은 학교의 복도 안까지 걸어들어오면서 줄곧 하늘에 계신 당신의 기분이 좋지 않은 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로진이 상념에 빠져있는데 콧노래가 들렸다. 흐릿한 창가에서 들리는 콧노래는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로진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주 들었다던 노래의 음률이다. 비틀즈. yesterday.

 

콧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때 위에서 비껴서있던 전공책 몇 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로진은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책 몇 개가 떨어지고 채희가 위를 봤을 때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검은 것이 위에 있었다.

 

그리고 로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뒤늦게 달려왔는데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안 떨어지고 버틴 것이 몇 권 더 있었는지 그대로 등허리에 툭툭, 떨어진다.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전공서적이라 무게가 꽤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웃는 인상에 부드러운 머릿결, 편하게 입은 듯한 가을코트가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포근한 인상이었다.

 

자신에게는 아마 태어날 때부터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가슴에서 머리 위로 올라왔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뇌어도 로진에게 그 것이 첫 사랑이었다.

 

 

 

 

 

*

 

 

 

이른 오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채희는 신입생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학과사물함을 배정받았다. 채희는 사물함에서 책을 두권 빼어든 뒤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학과사물함 뒤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흘러내리지 않은 빗방울이 창문에 붙었다. 무색무취의 빗방울이지만 빗방울에게조차 그림자는 있었다. 그 그림자가 채희의 팔목에 어른거리면서 그녀에게 그늘져 있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멈추었다. 그녀는 하늘에 시선이 가있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갑자기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위를 봤을 때 까만 것이 시선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복도에 울리는 물음. 채희는 몇 번 보지 않았던 로진을 마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가 선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과였다.

 

비가 와서요. 책 정리하다가 하늘을 보다가 했어요.”

 

채희는 싱긋 웃었다.

 

그래?”

 

로진은 비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채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채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선배가 그대로 책을 맞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책 안 아프세요? 많이 떨어졌네요.”

 

비 오는 걸 좋아해?”

 

!”

 

그러면 비가 오니까.”

 

로진은 말했다. 의미심장한 표정이다.

 

나랑 결혼할래?”

 

채희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화들짝 놀랐다. 프러포즈를 처음 받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본 지 얼마가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는 고백보다는 엎드려뻗쳐.’가 더 잘 어울린다. 그의 별명을 새터에서 엿들은 기억이 있었다.

 

얼음왕자.’

 

어떤 사람은 유치하다고 웃어버릴 지도 모를 별명이지만 그 별명과 그는 꼭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채희에게 이러는 것은 무엇인가.

 

채희는 얼굴이 빨개지는 자신을 느끼고 당황해서 단 한 마디를 뱉고 도망쳐버렸다.

 

, 사양할게요!”

 

떨어지는 빗방울을 온 몸으로 맞으며 채희는 가버렸다.

 

책 젖을텐데.”

 

로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도 없는 복도에 대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쥐어준 우산이 아주 어색하게 로진의 손에 들려있다. 로진은 우산과 그녀가 사라진 복도를 번갈아보았다. 빠르게 그 손에 우산을 쥐어줄걸. 로진은 고개를 저었다. 채희는 갓 입학한 상태였고 고백한 로진은 2학년. 군대를 앞두고 있었다.

 

로진은 채희가 사라진 복도에 한참을 서있었다. 몇 분인가 서있다가 하늘을 보았다. 빗물은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난 우산 필요 없는데.”

 

로진의 말이 쓸쓸하게 복도에 울렸다.

 

 

 

로진이 건물에 가리워진 채희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같은 신입생이었고 오리엔테이션 때 채희와 함께 술을 마셨던 제훈은 눈웃음이 인상적이었고 이제 20세였지만 소년에 가까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채희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 제훈아.”

 

채희가 말하자 그는 환한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집에 같이 가자.”

 

고마워.”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이상해.”

 

채희는 손사래를 쳤지만 그 일은 깊이 기억되었다. 채희에게 있어 낯선 사람이 결혼하자고 말하는 것은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곧 그 일을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로진이 군대를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후로 가끔씩은 화도 치솟아올랐다. ‘군대에 가기 전에 가볍게 날 건드려본 거야?’ 라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는 얼굴까지 빨개질 지경이었다.

 

채희는 3학년이 되었을 때 로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혼자 화를 낸 적도 많았기 때문에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앉았는지 무거웠다. 로진을 본 순간 채희는 스스로 찔려 꼼짝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로진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채희를 눈으로 붙잡아두듯 끈질기게 바라보며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 오랜만이다.”

 

. 선배. ,”

 

채희가 더듬거리는 틈을 로진은 놓치지 않았다.

 

군대에 있는 동안 많이 생각해봤는데,”

 

?”

 

결혼할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채희는 눈물까지 글썽해져서 로진을 바라보았다.

 

…….”

 

채희가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던 듯, 로진은 그제야 얼굴에 다소간의 미동을 주었다.

 

채희는 그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도망갔다. 로진은 아무 감정도 없는 듯이 딱딱한 얼굴로 돌아와 혼자 중얼거렸다.

 

그 쪽으로 가면 다시 만나게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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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사람은 정오에 올렸었는데 이 소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올려보려고 합니다.

2017년에 처음으로 써본 로맨스소설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클리셰를 따라가려고 애썼는데요.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던 클리셰를 따라간 것같습니다. 

쓸 때에는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의 시점을 많이 다루며 로맨스가 전개되는 것은 역량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고 하는데 

역시 초보라 즐겁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잠시 여가를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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