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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거절해도 괜찮아요.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험한 짓이야 하겠어요. 당장 감금될 판이었는데 내가 당신을 불러온다는 조건을 대서 좀 미룬 거예요. 그는 아직 진료도 받지 않았어요. 진단을 받으면 그때부터 미친척하는 건지 미친 건지 구별이 안 가게 될걸요. 물론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죠. 하지만 문제는, 재는 정신은 말짱하다는 거예요. 당신만이 그걸 도울 수 있어요. 거절해도 괜찮지만 거절하지 말아줘요.”

 

유는 연이 거절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이 말했다.

 

종교가 다르다고 믿을 때까지 감금시켜버리는 아버지도 있는걸요. 결혼하지 않는 것은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될 때가 적지 않아요. 가족이라는 기대가 무서울 때도 있죠. 아무튼 저번에 왔을 때랑 방이 달라져서 한참을 찾았네요. 이 방이에요.”

 

유는 벽을 툭툭 두드렸다.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들어갈래요? 온다고 연락했으니 재의 가족 분들이 있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은 정말로 그 방의 손잡이도 잡고 싶지 않았다. 유의 말은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와 가족들이 어디까지 서로를 알고 혹은 서로를 속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들어가야겠죠.”

 

연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포로나 인질이 된 기분이었다.

 

 

 

가족이 다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조그마한 병실에는 재와 중년여성이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녀가 재의 어머니일 것은 확실해보였다. 그녀의 입은 꽉 닫혀있었는데, 입과 경직되게 나있는 주름살이 그녀를 무척 완고해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언뜻 유를 노려보는 듯이 보였다. 유는 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붓감을 데려왔습니다.”

 

연은 유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아닙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지금의 처지에 뒷골이 당겼다. 연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재의 어머니를 살피고 있었다.

 

얘니?”

 

재의 어머니는 연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재와 잘 지내줘서 고마워요.”

 

. 그렇게…….”

 

연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때에 완고한 어조가 말을 가로막았다.

 

내 아들이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에요. 대학도 나쁘지 않은 곳을 나왔고 학과도 반듯하죠. 경영학과를 나와서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서 일을 돕고 있어요.”

 

연에게는 재가 경영학과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계산이 빠르다면 자기목숨을 가지고 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키지 못했을 때의 신용하락과 지켰을 때의 대가를 생각한다면 어느 쪽이든 적자였다. 도무지 수지가 계산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는 눈꺼풀을 내리며 딱딱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이도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가 성품도 바르다는 것을 어머니인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성격에 하자도 전혀 없어요.”

 

성격에 하자가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재는 정신병원의 병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말하는 것에 화난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말을 방해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지친 표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누굴 해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성적도 초등학교 때부터 우수했죠. 원한다면 보관되어 있으니 보여줄 수 있어요. 키도 177cm이니 작지 않은 편이에요. 장래도 유망하죠. 부모님이 뭘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에요.”

 

연은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재와 지금 당장 결혼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연은 유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시작된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혼사가 많이 들어왔었고 나쁘지 않은 집안도 많았어요. 그 중에서는 판사의 따님도 있었죠.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요. 당신의 집안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애들 아버지는 펄펄 뛰었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보다 훨씬 좋은 집안의 아가씨들이 거절당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얘는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연은 기분이 상했다. 그녀의 말투는 망가진 물건을 싸게 판다는 것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 품질은 확실하게 광고하고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 앞으로 가게도 하나 만들어줄 수가 있을 정도지.”

 

어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펜의 손잡이 부분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연은 잠자코 볼펜을 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주민등록번호하고 이름하고. 적고 가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일방적인 대화였다. 연은 무심코 적을 뻔 했던 손을 멈추고 한 동안 가만히 있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휘말려 있었다. 재의 어머니는 연이 당연히 제의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 전제 하에 모든 것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그녀의 확신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연은 펜을 들고 재의 어머니가 말했던 알아서 한다.’라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처리가 빠르고 즉각적이었다.

 

안 적니? 거기 적으면 돼.”

 

어머니는 당연히 연이 적을 것이라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의 목소리였다.

 

아아, 어머니. 어머니.”

 

그 것은 주문 같기도 했다. 재는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은 화를 내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 타입일 수도 있었다.

 

그만하세요.”

 

얘가 온다고 해서 네 진료를 미룬 것을 모르는 거니?”

 

재의 어머니는 완고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벌컥 화를 냈다.

 

실망시키는 것도 정도껏이야.”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가 나가게 되면.”

 

너희 아버지 뜻을 몰라서 그래? 그리고 네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할 지 이 엄마는 불안하다. 왜 뒤늦게 사춘기가 와서 이러는 거니? 왜 반항을 하는 거야? ? 왜 갑자기 말을 안 듣는 거냐고? 이제까지 말 잘 들어 왔잖니!”

 

전 지금도 말을 잘 듣고 있어요.”

 

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죽으려고 하지도…….”

 

재의 어머니는 연의 눈치를 살폈다. 죽으려고 하는 것이 매우 큰 결함이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가게를 하나 더 만들어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쉽게 죽고 싶다느니 허황된 말을 하는 애는 아니었다. 네 기분은 알아. 친구가 죽었으니 너도 힘들겠지만 남자애가 그런 말을 달고 살면 어떡하니. 잠시 그런 말하는 기분은 알겠지만, 너도 얼른 가정을 꾸려야 그런 말이 쏙 들어가지. 연 씨, 지금 이 애가 약한 애는 아니야. 어쩌면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더 이렇게 말하는 거지. 연 씨를 사랑한다고 하니 승낙해주렴.”

 

재의 어머니는 연의 손을 꽉 잡았다.

 

어머니. 연에게는 재가 아깝습니다.”

 

느닷없는 소리는 유의 것이었다. 유는 웃는 인상으로 덧붙였다.

 

이 애의 조건을 알게 되시면 놀라게 될 거에요. 이름을 들으시면 바로 아실 걸요. 무려 아버지가……. 아니, 연 씨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무튼 저도 놀랐죠. 양자로 입양된 거지, 그게 말이죠. 재산총액을 들으면서 아, 재가 감당할 수 있을까싶었어요.”

 

재의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은 유가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가 봐도 장난인 것이 뻔하다. 그러나 재의 어머니는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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