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어두운 말을 하긴 하지만 아주 가끔 똘기가 있어서 그렇죠. 밝고 유머감각도 있고, 진지할 땐 진지하죠. 좋은 남자인데 이상하게 여자친구가 없었어요. 소심해서 그런가. 언니는 안심해도 좋아요. 과거 엄청 깨끗한 남자니까.”
“그렇군요.”
대꾸를 하지 않을 수도 없어, 연은 적당히 대꾸했다.
“알 지 모르겠는데,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릴게요. 3년 전에 우울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종종 극단적이 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었으면 일찌감치 죽었겠죠. 지금까지 살아 있잖아요. 그 우울증, 절대 오빠가 나약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다정한 사람이라 잠시 충격을 받은 거죠.
3년 전에, 오빠랑 굉장히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오빠가 보는 앞에서 죽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긴 하지만…… 충격이 엄청났을 거예요. 죽음을 쉽게 생각한 계기일지도 모르고. 그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으면 누구라도 충격을 받죠. 충격이 심하면 변화하잖아요. 인간이라면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본질이 변했겠어요. 원래 착한 사람인데요.”
동의를 구하는 물음. 여동생은 연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연은 창밖을 보았다. 차는 빠르게 세상을 거슬러 흘러가고 있었다. 도로가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빛 꽃이 핏빛마냥 일렁였다. 그렇죠. 연은 말하면서도 이 세상이 그를 만난 이후부터 더 어두운 색조를 띄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이 색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인가 싶은 마음에 절망까지 들었다. 가슴에 묻고 일부러 보지 않았던 그 것이 재를 만난 이후, 가슴 위로 끌러져 올라간다. 자신의 위에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억누르는 것이 없는데도 그 것은 감당하기에 무거웠다.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공기가 무겁다.
죽은 그도 게이였을까?
연은 짐작하며 조곤조곤 제 오빠에 대해 말하는 동생의 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겉꺼풀이 있고, 그리고 속꺼풀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상 밑으로, 무엇이 있을까……. 음지를 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나 다들 어두움 속에서 태어나 밝은 것처럼 자라나니 어쩌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뿌리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가 어떻게 아팠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팠기 때문에 성취하는 것이다. 재가 성취하는 것은, 무엇일까.
재의 동생은 연의 사정을 묻지 않고 달렸다. 도착한 곳은 잔잔했다. 알려지지 않은 바다로 보였다. 3면이 바다인 나라에서는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면 쉽게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관광지인 바다도 많았지만 인적이 드문 바다는 더욱 흔해서 얼마든지 있었다.
재의 동생이 도착한 곳은 그런 흔한 어느 바닷가였다. 소금기어린 냄새 외의 인기척이 거의 없는 바다는, 바위 위에 자그마한 여관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횟집이 하나 붙어있었다. 모래밭보다는 바위가 듬성듬성 서있는 바다였다. 연은 왜 여기에 도착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재의 동생이 잠시 쉬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재의 동생은 근처의 여관에 갔다가 나오면서 연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한 번에 찾았네.”
“찾았다고요?”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오빠가 가는 데야 뻔하지. 뭐.”
“저 여관에?”
재의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는 쉽게도 찾아졌다. 재는 이곳에 있었다. 연은 허탈한 느낌마저 들어, 재의 여동생을 보았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한 번에 찾을 줄이야!”
그녀는 손바닥을 치더니 머리를 휘날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여기에 있을 거라는 짐작이야 했죠. 오빠 엄살이네요. 나 참-. 여긴 오빠 친구가 죽은 곳이에요. 나중에 나 없어지면 여기서 죽은 줄 알라고, 농담을 많이 했었어요. 단순하다니까요.”
“…….”
연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색이 된 연의 표정을 보고 동생이 툭툭 어깨를 쳤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요. 찾아봐요. 아주머니 반응은 평범했어요. 어제도 여관에 돌아왔다고. 며칠 째 머물러 있나 봐요.”
타인인 연보다 동생인 연의 말이 더 경쾌했다. 연은 깊게 잠든 파도를 보았다. 비린내가 천천히 머리카락에 벤다.
여동생과 연은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져 그를 찾기로 하고 흩어졌다. 연은 바위가 많은 쪽으로 걸었다. 금방 숨이 가빠온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관절 마디마디를 억누르는 것을 느끼며 연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여관의 위 부근, 동떨어진 바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있었다. 연은 가쁜 숨을 쉬며 뛰어올랐다.
“거기- 저기요! 이재 씨!”
연이 외쳤지만 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재 씨!”
그녀가 크게 외치고 나서야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재는 가르쳐주지 않은 곳에, 느닷없이 나타난 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죽었네요."
연은 숨을 몰아쉬며 터벅터벅 걸었다.
“죽길 바랐어요?”
“걱정했죠.”
재는 씨익 웃었다.
“한심하죠?”
재의 물음의 뜻을 연은 언뜻 알 수가 없었다. 이 내기 그 자체가 한심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이 한심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기 말인데요. 지지 않았어요.”
연은 재의 목소리만큼이나 천천히 재를 돌아다보았다.
“참, 그렇더군요. 그러지 않을 줄 알았어요. 세상아, 너희는 내게 엿 같다! 라고 처절하게 비웃게 될 줄 알았죠. 그런데 그렇겐 안되더군요. 기쁘지 않았어요. 지지 않은 게 기쁘진 않았어요. 상처도 사라지지 않아요. 상처 주는 사람보다 상처주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해도, 상처 주는 쪽의 양이 분명하게 닿아옵니다. 하기야 그 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고자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상대에게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닿는 것 아니겠어요. 폭력은 그래서 기쁜 것 아니겠어요.”
연은 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다만 바라보았다. 재는 하하, 허탈한 웃음을 세상에 털어 내버렸다.
“애초에 죽으려고 시작한 내기입니다. 질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히 질 내기였고, 나는 죽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 죽음에 내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명분을 주려고 했던 겁니다. 어쩌면 그 욕망이 처음 본 당신에게 이상한 잡소리를 다하고, 이까지 오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죽음을 기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내 죽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당신이.”
그는 특유의 수줍은 웃음을 짓더니, 이내 씁쓸함을 물었다.
“당신이, 착해보였거든요.”
“자주 듣는 소리는 아니네요.”
“그래요?”
“착해보였나요?”
“나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재는 연의 목을 가리켰다.
“당신의 목에 있는 문신, 그거 당신이 새긴 건가요?”
재는 갑자기 물었다. 연은 자신의 목을 감쌌다. 문양이 우는 듯 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타투샵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믿어요. 나도 그렇거든요.”
그는 자신의 손을 내게로 내밀었다.
“3년 전부터 새겨져 있었어요. 나도 손도 안 댔거든요. 당신도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건 겪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죠.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동생에게도 그런 게 새겨져 있나요?”
“아니요. 동생은 전혀요. 딱 보기에도 그렇지 않나요. 이 문장에는 뭔가 있고, 나는 그래서 당신을 택했어요.”
“죽음은 폭력이에요.”
소금기 섞인 바람을 맞으며 연이 말했다. 재는 씨익 웃었다. 황소같이 두터운 웃음이었다.
“어쨌든 지지 않았습니다. 명분을 잃었죠. 세상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데, 엿 같다! 라고 외칠 명분은 없었고- 그래도 죽고는 싶어서 여기에 왔지요.
내기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지만, 뭐 이 내기에 대해서 아는 것은 나와 당신 정도이니까 룰을 멋대로 어겨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오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네요. 죽기도 두렵고, 겁나고, 그 사람도 보고 싶고…….”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재는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연은 말했다.
“혹시, 제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건, 제 이름이 이연이기 때문인가요? 동생과 이름이 같아서 그럴 마음이 들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어느 정도로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 떠오르긴 했었죠. 하지만 단순히 이름이 같다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예요.”
“가족에게 솔직하게 다 말할 생각은 없어요?”
“없습니다.”
재는 단호했다.
“없어요.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당부하듯 다시 한 번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표정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었다.
“하여튼 쪽팔리는군요. 죽지도 못하고.”
죽으려고 기를 쓰지 않을까하는 연의 염려와는 달리, 재는 쉽게 동생이 존재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재의 여동생은 연을 새언니라고 불렀다.
일탈에 대한 여동생의 질책에 재는 허허 웃고 말았다. 설마 죽겠느냐는 것이 재의 말이었고 물론 죽진 않겠지만 애같이 그게 뭐냐는 게 동생의 말이었다. 연의 눈에는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남매로 보였지만 그들은 평화로워보였고 행복해보였다.
평범하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기류는 마치 없는 것 같은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연은 연골이 질긋질긋 눌리는 것을 느꼈다. 터지는 것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장난처럼 가볍고 평화로운 것을 그 당시, 그 공간의 연은 보고 있었다.
연에게 부조연락이 온 것은 몇 주 후였다. 재가 아닌, 경민의 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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