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진해준은 최대한 차분하게 유영을 보았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명색이 그룹 전무가 바람의 대상이라고요?”
사진에는 이선과 진형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공원 어귀를 거닐고 있었다. 옆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둘의 표정은 밝고 웃음이 가득했다. 이선의 표정도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서비스 차원에서 인위적이고 친절한 미소만 짓던 그녀였는데. 진해준은 차분하게 행동하려고 고고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목 뒤가 찌릿찌릿했다.
“응. 알고 있어.”
“뭐라고요?”
“알고 있는 사실이야. 새로울 거 없는 사실이야. 그리고 그녀는 바람을 핀 게 아니야. 내가 끼어든 거지.”
“뭐, 뭐라고요? 오빠 제정신이에요?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오빤 자존심도 없어요!”
“그래. 자존심이 없더구나. 내 생각보다도 더 내가.”
“어머머. 어머.”
기가 막힌다는 듯 유영이 입을 벌렸다.
“어쨌든 할 말이 끝났으면 나가줘.”
“후회할 거예요.”
“그래. 가기 전에 하나 물어보자. 그건 해랑이 방식의 후회니?”
“그걸 왜 알려줘야 하죠?”
유영은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난 해랑 오빠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잘못된 게 있다면 이 세상이죠!”
“알았다. 가거라.”
유영은 씩씩대며 해준을 한참 보다가 경비원이 올라오자, 비키라는 고함과 함께 사라졌다. 어쩔 줄 모르는 경비원에게 해준이 고갯짓했다.
“수고했어요. 그냥 경비실로 돌아가 주세요.”
이선은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화분이 하나하나 늘더니, 제법 늘었다. 예전에 해준이 준 꽃도 조금 시들고 있긴 했지만 살아있었고 얼마 전에는 진형이 보라색 도라지꽃 화분을 놓고 갔다. 하나는 자신이 키우겠지만 하나는 관상용으로 여기 놔두고 수시로 보겠다는 억지에 큰일도 아니어서 여기에 놓아두었다.
대체 도라지 소녀의 일화가 그렇게 가슴 아프고 와닿는 일화일까? 그저 꽃들에게 흔히 있는 흔한 전설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진형의 마음을 울렸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작가라는 거지…….’
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손님 접대라면 천우가 잘하고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선은 뒤를 돌아보았다.
진해준이 이내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무심코 집중해서 바라보게 되는 얼굴이다. 이선은 잠시 진해준을 보다가, 물이 튀어 급하게 호스를 껐다.
“계속 하던 거 해요. 기다릴 테니까.”
“아 죄송해요. 오신 줄 몰랐네요.”
이선은 호스를 내려놓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태양 아래에 반사된 진해준의 피부는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새삼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커피가 그리워서 왔어요.”
“영광입니다!”
“항상 미안해요…….”
“무슨 말씀을요. 단골고객이신데요.”
이선은 얼른 안으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천우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다.
“오늘은 핸드드립으로 주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우는 조금 당황했고 이선은 얼른 드리퍼를 들고 왔다. 진해준은 찬찬히 뜰을 살폈다.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다. 거기서 어렵게 구해온 카두풀도 아직 피어있는 것을 보자 어쩐지 이선이 고마웠다. 자신이 준 게 전부 쓸모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지금까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이선의 애정을 얻는 일은 자신이 했던 모든 일 가운데서 가장 어려웠다.
“내가 준 꽃이 아직 죽지 않았군요.”
진해준은 카운터에 기대서서 물줄기를 내리는 이선을 보았다.
“신경 써서 돌보고 있는데 기후가 맞을지 걱정 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 싱싱하게 잘 피어있어요.”
“사실은 의논할 게 있어서 왔어요. 진형씨는 아직 없는 것 같군요. 함께 있었으면 하는데.”
“진형이를요?”
이선은 조금 놀라 해준을 보았다.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조금 불안해져 온다. 사실 해준의 위력은 실감하지 못했는데, 해랑의 일을 겪으며 새삼 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자신과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칼날에 베이기에 십상인 것만 같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형은 그런 것들을 다 이겨낼 것만 같다. 절대로 기죽지 않으니까.
“아침을 먹고 오니까, 곧 올 거예요.”
“그래요. 조금 앉아 있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진해준은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커피를 들고 앉았다. 한 조각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것은 처음이다. 항상 들어와서 에스프레소를 원샷하고 떠나고는 했었다.
이윽고 딸랑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꽉 차는 큰 남자가 나른한 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나른한 눈은 자신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를 보는 순간, 아주 커졌다.
“진해준 전무님이 우리한테 할 얘기가 있대.”
“아 그래? 항상 반갑지 않은데.”
“좀 그만해. 중요한 얘기겠지.”
진형은 부루퉁해져서 진해준의 앞에 앉았다. 진해준은 고개를 돌려 진형을 보았다. 해준의 아름다운 얼굴은 다소 이질적이어서 그저 보는 것뿐인데도 상대를 약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해준은 간단히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느냐고는 묻지 않을게요.”
여전히 진형은 퉁명스럽다.
“다름이 아니라, 두 사람을 우리 조직에 속하게 하려고 합니다. 안된다면 한 사람이라도 좋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이선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라, 무작정 낙하산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과 이선씨, 진형씨가 하는 일이 많이 겹치고 있어요. 그래서 내 눈이 가는 곳에 당신들을 두고 싶습니다. 이건 내 잘못에 대한 책임입니다. 하나는 커피체인점입니다. ‘바리스타 정’으로 커피 체인점 장사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름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둘은 웹툰작가입니다. 새로 론칭하는 프로그램에 진형씨가 합류해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웹툰은 아주 자유롭지는 않고 매일 출근해야 합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당신들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왜죠? 왜 우리에게…….”
이선이 물었다. 진형은 여전히 옆에서 팔짱을 낀 방어적인 자세로 부루퉁한 표정이다.
“해랑은 풀려납니다.”
“뭐라고 했어요? 결국 손을 쓸 작정인가!”
진형이 벌떡 일어섰다.
“당장은 살다 나오겠죠. 하지만 몇 년 후에라도 풀려납니다. 반성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이선이 탄식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들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내 까다로운 입맛과 눈으로 보는 정원, 인테리어를 모두 만족시킨 커피를 내리고 한 사람은 최근 핫한 SNS 스타죠. 우리로서는 영입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책임을 지시려는 거죠?”
이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준을 보았다. 해준은 그 눈을 피해버린다. 마음이 약해진다. 왜일까, 이선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힘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요?”
해준은 그러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이선을 보았다. 유혹하려는 뜻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를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요?”
“더 큰 조직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죠. 그리고 제가 즉시 알 수도 있고요. 해랑이 아무리 사납게 굴어도 지켜줄 수 있습니다. 나는 해랑이 누군가를 해치기를 바라지도 않고 누군가가 다치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전에 그 손님을 도우려다가 일이 이렇게 되고 잘못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때 진형씨에게 제 명령을 들어달라고 했죠. 그것도 이 일을 제안하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회사에 들어오십시오.”
“뭔가 계산을 잘못했군.”
진형이 나섰다. 해준은 차갑게 진형을 보았다. 사실 그에게 회사에 들어와달라고 한 것은, 그 이전에는 너는 나의 밑이다. 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속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해준은 독기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이선은 그에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진형은 불안정하다. 이선은 고생할 게 틀림없다. 해준은 지금 그러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을 선물할 수 없다면, 안정성이라도 선물하고 싶다. 진형에게 직업을 선물하겠다. 그녀의 사랑이 다 할 때까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진형은 자신의 예상을 깨고 당당하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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