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무인 숙양이 요즈음 공부만 하는 선영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요새 대체 무얼하니? 예전에는 방에 돌아와 서로 힘든 일을 이야기하며 피로를 풀었는데 요새는 통 얘기를 할 수가 없구나.”
말끔히 치워놓은 방 안에 앉아 선영은 이 비밀을 숙양에게 말해야할지 하지 않아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선영에게 말을 해야할 것같았으나 젊은 대감과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오해를 사기 쉬운 일이기도 했다. 선영에게는 고민이었으나 숙양에게는 큰 생각없이 말한 불만이었는지 그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엄가, 이번의 회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숙양은 늘 조용하고 얌전했다. 그 이야기도 그렇게 큰 이야기로 와닿지 않았다.
“또 누구의 대감이 임신했나 보구나. 그게 화제가 되다니 주상께서 특별히 무얼 내리셨니?”
“얘는! 소식에 누구보다 빠르더니 아직 몰랐던 게야?”
선영은 요새 공부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녀가 두꺼비 같은 얼굴로 멀뚱히 숙양을 보자 숙양은 답답한 듯이 웃으며, ‘어이구.’ 말을 했다.
“엄가가 틀림없이 어딘가 빠져있긴 빠져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수?”
“왜 이래, 갑자기 날 잡누?”
선영이 화들짝 놀라자, 숙양의 얼굴에 더욱 웃음기가 서렸다.
“놀라는 걸 보니 더 의심스럽구먼.”
“얘가 생사람 잡어. 아무튼 누가 회임을 하였어? 어느 대감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선영은 버럭 화를 내며 밖으로 소리가 새었을까 뒤를 보는데, 그러는 동안 또 숙양이 선영의 입을 막았다.
“경을 칠려구!”
선영이 얼떨떨하여 숙양의 얼굴을 보자 숙양이 말했다.
“대감이 아닐세. 주상전하의 아이가 곧 태어난다 하우. 이번에도 상궁의 몸에서 아이가 난다는데……. 그게…….”
“그런가. 흔히 있는 일 아니오. 주상이 유년부터 다정하긴 하셨으나 국법에는 어긋나지 않으니.”
숙양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선영이 말했다.
“장상궁님이시네.”
숙양은 대답을 해놓고 선영의 반응이 없자 다시 한 번 말했다.
“승은을 받으신 분이 중전마마의 밑에 계신 장상궁마마님이라 하네.”
“또?”
“응 또 중전마마 밑에서 일하시던 분이지.”
“중전마마의 밑에서 일하시던…….”
엄선영은 신음하듯 숙양의 말을 되풀이 했다.
“어찌 되었던가?”
선영이 물었다.
“어쨌든 지금은 회임 중이시라는 말만 들었네.”
“중전마마께서는 어찌 되셨던가?”
선영도 숙양도 중전 민씨가 아이에 관한 한 악에 받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세자 척도 몸이 병약하여 늘 걱정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껏 낳은 자식이 척을 제외하고는 다 죽어버린 탓에 세자 척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왕실의 염려가 팽배하여 있었다.
척이 죽으면 민비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
사저로 내쫓긴 완화군이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주상은 비록 완화군과 소의 이씨를 궁궐에서 쫓겨나는 것을 내버려두었지만 끊임없이 돈과 쌀을 보내어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역사상 궁녀가 낳은 왕손이 훌륭한 국왕이 된 전례도 많았으므로 여차하면 완화군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일어난 궁녀의 회임이었다. 그리고, 그 것도 자신의 바로 밑에 있던 궁녀, 자신의 시중을 들던, 자신의 궁녀였다. 민자영은 매번 배신당하고 있었다.
“내쫓으라 말씀하셨네.”
“안동준의 목을 벤 독기 아닌가……. 그만하길 다행일세.”
“내의원의 온갖 독으로 태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실지 겁이 나네.”
“정가 숙양. 자네는 중전마마를 표독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일세.”
“내 자네라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그 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 선영, 자네의 생각은 어때.”
“아이를 죽이시진 않을걸세. 지나치게 도에 어긋나네. 대궐 밖으로 쫓은 다음에는 대군도 아닌 군을 신경쓰시겠는가.”
선영은 두꺼운 웃음을 물었다. 숙양은 가끔 그럴 때의 선영이 두렵기도 했다. 선영은 뱃심이 좋았다. 그래서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일을 과감히 해낼 때도 많았다. 숙양은 중전마마에게 겁을 먹었지만 선영은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씩 중전의 자리를 탐내는 듯한 언사마저 보일 적이 있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내 가끔씩은 가까이서도 모시고 먼발치서도 모시고 소식도 전해듣고 그 분은 잘 알지는 못하나 아주 모르지는 않다고 생각하네. 중전마마의 심정은 그저 궁지에 몰린……. 안타까운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
“자네는 너무 낙천적일세. 무당에 대한 과한 치성도 나는 가끔 마마가 무서울 때가 있어. 지밀에 있다보니 양반들과 나누는 마마의 독설을 듣게 되네. 그러면 정말이지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보통 분이 아니시지.”
“엄가…….”
더욱 나누고자 하는 숙양의 말을 선영은 끊어냈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말을 꺼내는가. 정가. 일하는 아이가 듣겠네.”
선영의 다독이는 말에 숙양도 침묵하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아무리 궁녀들끼리의 사적인 대화라고 해도 위험한 것이었다.
“자네 요즘 무얼해?”
“내정개혁에 관한 것을 공부한다네.”
선영의 말은 솔직했다. 숙양은 뜨악하게 선영을 보았으나 이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친우로서의 침묵이었다.
‘도란 무엇인가?’
선영은 스스로 뱉어놓고도 그 말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도이고 어디까지가 도가 아닌 것일까. 혹은 명분에 해가 되지 않거나 사태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도가 아니거나 악한 것은 악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선영의 생각은 극으로 치닫는다.
‘도를 어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선영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는 다시 개혁에 관한 서적을 빼어들어 펼쳤다. 그런 것보다는 이런 공부가 훨씬 머리가 아프지 않고 재미있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무어든!’
또한 책을 보며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선영의 말대로 장씨는 무사히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이강이라 하였다. 이강은 궁궐 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채 외갓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존재란 궁궐에서 떨어져있다고 안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틀림없이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팔도에서 왕의 핏줄은 이강, 하나 뿐이었다.
민비는 점점 여위어갔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는 소문이 내명부에도 파다했다. 그러나 궁녀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는 다정하여 가끔씩 연회를 열어 궁녀들의 피로를 풀게끔 하였다. 선영은 온 힘을 기울여 통치하는 중전이 참으로 위태롭다 생각하였으나 그녀에게 의무적인 충성을 다할 뿐 그 외에 중전과 연계되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없었다.
선영은 선영은 세상의 흐름을 보는 연습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1880년 7월은 뜨거웠다. 궁궐 안에서는 이열치열은 외치며 더위를 이기겠노라고 삼복팥죽을 시시때때로 쑤어 먹었다. 선영은 팥죽을 들고 은밀히 궐 안의 공부방을 찾았다.
“대감마님, 더위가 한창이온데 팥죽 드시고 하시지요.”
공부방 안에는 김홍집이며 이르게 벼슬을 가진 명문가 자제들이 서로 둘러앉아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왕친의 자격으로 들어온,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벗지 않은 유생들도 몇몇이 끼어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퀭했다.
“오, 이런 것을 먹어도 되는가?”
그들은 침을 삼키며 내심 반기면서도 짐짓 사양하는 듯 거리켰다.
“아기나인들도 다 먹고 남을 만큼 많이 쑤었습니다.”
“고맙네.”
“오늘은 어인 일로 도련님들이 많으십니까.”
선영은 그들을 휘이 둘러보았다. 유생들의 표정은 흥분을 감추려는 듯이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지만 상기된 얼굴은 표정 위에서 어스름하게 붉은 아우라가 퍼졌다. 나쁜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 것같았다.
“아아, 일본으로 2차 수신사가 파견될 것같네. 그러한데 나도 갈 것 같더군. 만일 그리되면 당분간 자네에 대한 교육을 하지 못하리. 자네처럼 잘 배우는 사람도 없는데 섭해.”
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야 학문에 대한 재미를 붙여가는 터였다.
“대감마님.”
그러나 나라의 지엄한 분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김홍집은 빙긋이 웃었다. 선영은 씁쓸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무사히 다녀오소서.”
“고맙네.”
여름볕이 지면을 흐물거리게 보일 정도로 쨍쨍한 날, 예조참의 김홍집은 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 기선인 치토세호를 타고 일본을 유람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을 유람하다 다시 조선땅을 밟은 김홍집은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가 그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조선도 개화를 하여야 해!”
그의 친구들은 그가 심취하여 있는 것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옳은 것은 아닌즉 너무 심취한게 아닌가.”
“허나 당장은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네.”
김홍집은 처음 접한 새로운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층으로 높이 선 건물의 위에 서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자 예전에는 평온히 보았던 풍경이 이제는 지나치게 여려보였다. 산 위에 서서 바라본 조선의 초가집들은 어린버섯같았으며 언제든 억센 군화의 발에 짖밟힐 것 같았다. 일본의 건물은 단단했고 조선의 건물은 여렸다. 바꿔야겠다는 의식이 누구보다 커져 그는 조급해졌다. 닫힌 조선은 이웃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배워야한다. 배워야지 산다네!”
선영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한 그는 선영에게 중국인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소개하였다. 그 책을 받아들고 선영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는 국내에도 널리 그 책을 소개하였고 개화를 주창하였다.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것은 주상의 눈에는 더없이 기특하게 여겨져 예조참의인 그의 직위가 예조참판으로 올라갔으나 전국적으로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났기에 그 책임을 지고 김홍집은 사직하였다. 김홍집이 궁궐을 떠나자 궁을 나갈 수 없는 궁녀로서는 더 이상 그를 만날 기회가 없어진 셈이었다. 2년 후에 그가 궁궐로 돌아왔으나 바쁜 그와 자주 마주칠 기회는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엄선영의 마음에 새겨진 단어가 있었다.
‘개화!’
어느 궁녀도 지엄한 궁궐의 법도를 지키려고 할 뿐. 시대의 유지를 꿈꾸는 이들은 많았으나 흐름을 알려는 이는 없었다. 그 것은 왕권이 가지는 달콤함이 사람의 위기감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안에 있으면 적어도 굶어죽는 일은 없었기에.
개화(開化) 그리고 개화(開花).
개화파의 싹이 틀 때, 궁궐의 여인들은 피지 못한 꽃이 떨어진 것에 대해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지녔던 어머니를 닮아 뭇사람을 설레게 했던 왕자 선. 고종의 첫 번째 핏줄이자 소문이 무성했던 완화군은 그 해 홍역에 걸려 죽었다. 누구보다 슬퍼했던 것은 숙원 이씨, 그의 어머니였다. 봄이 올 때까지 버텼다면 그가 피어났을 것인가? 그 것은 모른다. 숙원 이씨가 야망이 있는 여인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들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여인이었는지 누군들 알겠느냐마는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그녀가 여린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청초했던 이씨는 아들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그녀의 정신이 드디어 돌아왔는가 싶을 적에는 말을 잃어버렸다. 말의 필요성을 지워버린 것처럼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눈빛은 공허하게 비워버린 채였다.
후계자는 척과 강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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