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뀐 조정은 평소의 쇄국과 노선을 달리하여 일본에게 외교제의를 했지만 미국의 침략을 받은 후 빠르게 선진문물을 흡수한 일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받은 선진문물은 예상을 뛰어넘도록 발전된 것이었다.
일본은 답을 주지 않은 채로 운요호를 타고 조선 근처의 바다를 측량하기 시작했다. 포의 사격범위 내까지 들어와 측량을 하는 운요호에 몇 번 경고를 하던 강화도의 병사들은 포격을 시작했지만 운요호가 가진 무기는 조선보다 더 개발된 것이었다. 조선의 포격을 유도한 운요호는 조선이 포격을 시작하는 순간 자신들이 지닌 신식무기로 성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성이 쑥밭이 되었대요.”
“참말인가? 사람들이 과장한 것은 아니고?”
“외교를 하자더니 공격을 하는군!”
조정은 떠들썩했다. 선영과 숙양, 정금도 궁녀의 신분이었으나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이나 권력,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일본의 공격에 다들 놀라워하고 있었다.
회의는 세 번 열렸다.
세 번의 회의 동안 개방을 거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컸다. 쇄국을 주장하는 이들의 소리는 무시할 수 있을만큼 적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유생들의 지지를 강력하게 받고 있었으며 그들은 조선인들이 죽음을 불사하여 물리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의 마음은 개방에 기울어있었고 새로운 권력의 득세를 원하는 민씨파는 임금의 그 마음을 적극으로 지지했다. 조선에 와있던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도 개방을 찬성하는 쪽이었다.
1876년 구로다 기요타카가 840여 명을 이끌고 대사로 오며 일본에 육군의 증강을 요청했다. 요청을 거절할 시에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위협이었다.
임금이 원하는 개방으로 외교방향은 기울었다. 무기로 우위를 점한 일본에게 조선은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 신헌을 접견대관으로 임명하고 윤자승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강화도에서 정식회담을 열었다.
개방은 하였으나 무기로 우위를 점한 일본과 맺었던 것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조약의 12관 중, 7관의 내용은 해외측량권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10관의 내용은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맺어진 부속조약은 일본의 화폐로 조선의 물건을 살 수 있게 하였고 조선양곡의 무제한 수출을 허가하였으며 일본배는 항세는 물론 관세도 납부하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결국 조선이 자의로 시도했던 개방은 강제문호개방이 되었다.
오랜 쇄국이 끝난 그 해, 선영 및 숙양과 정금은 정식 나인이 되어 임금과의 혼례를 올렸다. 신랑없는 결혼식이었다.
겉옷감과 명주․모시․무명․베를 각각 한 필씩 하사받은 그들은 내려온 옷감으로 옷을 지어입고 머리를 빗은 위에 화관(花冠)을 썼다. 이제 정식나인으로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그들 사이에 있었는데 그 것은 ‘방동무’였다. 보통 두 명이 한 방에 동거하는 터, 그들은 궁궐 안의 온갖 일을 함께 하는 동안 늘 셋이서 다니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말하는 이는 없었으나 누가 방동무가 될 것인가는 은연 중의 큰 문제였다.
그러나 그 문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금은 호쾌하게,
“나는 방동무를 하고 싶은 이가 있어.”
라고 먼저 말해오는 바람에 방동무는 선영과 숙양이 함께 하게 되었다. 정금이 누구와 방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선영은 구태여 조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정금이 대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 스쳐가는 소문에 선영은 더욱 조사하지 않았다. 조사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 대처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으리라. 대식. 그 것은 궁녀 사이의 동성애였다. 그 것을 정말이라면 법도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했으며 그 형벌은 엉덩이에 새겨지는 문신이다.
‘확실치도 않은 것.’
선영은 그 것을 흘려넘겼다. 그러나 궁금증은 있었다. 정식나인이 된 후의 삶은 종일토록 왕친에게 붙어있는 것이라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으나 선영은 야간 번살이때 교체를 하러 온 정금을 붙들고 물었다.
“요새 네 소문은 어찌 된 거니?”
“소문? 별감이 이야기 하였나보지?”
“무어?”
‘별감과 그 소문이 무슨 관계인가.’ 의문을 품은 선영의 눈을 보던 정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이려고 했어. 내일 내 방에 오면 보여줄테니 한 번 보아 보게.”
‘보아보게, 라니 무엇을?’ 선영은 생각하였다. 설마 왕가의 패물을 훔쳤단 말인가? 선영은 소꿉친구라 할 수 있는 정금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금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만약 정금이 패물을 훔치지 않았다면 무엇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선영은 짐작가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얼마 전 인천의 공직자들이 조정에 왔다 간 것이었다.
정금의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선영은 물었다.
“외국문물인가 보지?”
“역시 엄가로세.”
정금이 웃는 것을 보다가 선영이 물었다.
“무엇이야?”
“자네는 관대하네.”
“또 불법을 들인 것이면 눈감아줄 수 없네.”
선영의 말에 정금은 씩 웃으며 보자기를 풀렀다.
“규합총서일세.”
“규합총서?”
규합총서라 함은 조선의 실학자였던 빙허각 이씨가 썼던 것으로 실학서의 내용과 가정에서의 생활적인 지식이 종합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영은 그 책을 읽고 싶어 했다. 본래 선영은 성리학보다 실학에 더 큰 관심을 보여왔던 터였고 여성의 시각으로 쓴 가정실학은 흔치 않았다.
“자네가 좋아할 것같아 구입하였네.”
“내 자네를 안지 10년이 넘었는데 이게 다가 아닐테지.”
규합총서는 어디까지나 조선에서 정리된 조선의 문물이다. 외국문물이 더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것은 커피일세. 문참판에게서 받아놨네.”
“문참판?”
“중국에서 들어온 러시아인, 뮐렌도르프 대감말일세. 그가 매번 달여 마신다더군. 이걸 마시면 잠이 안온다면서. 가피차라 해. 아주 조금만 얻어왔어.”
“가피차라. 신기하군. 어찌 그런 분과 만났던가?”
“양인이라 그런지 좀 이상한 면이 있는 분이시네. 평범한 궁녀에게도 이야기를 잘 거시더라.”
정금은 장난스레 웃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이 것도 아니겠지. 친우로서 자네 표정이 그러하네. 뭘 숨기고 있어?”
“참 엄가는 못 속이지. 그건 그냥 뇌물로 받아두시게. 사실 내가 원한 것은 그 것이 아니라, 옷감이라오.”
정금은 보자기를 끌렀다. 거기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나풀거리는 옷이 있었다.
“이 것도 옷감인가?”
선영은 감탄했다.
“드레스라고 그러더라. 참으로 요상한 옷이기에 쏙 마음에 들었소.”
“지밀의 궁녀로서 너무 멋을 부리면 예법에 어긋나네.”
민가에서는 기생들의 풍습이 널리 전파되어 저고리가 가슴 위로까지 올라가는 때였다. 궁녀 중 지밀, 침방, 수방만이 여염집 아낙처럼 옆으로 여미는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정숙함은 그네들의 특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스라는 것은 짧막한 저고리보다 더욱 심하게 풍습에 어긋나 보였다.
“참으로 요상한 옷이로다.”
선영의 말에 정금은 흐흐 웃었다.
“옷감을 다루니 여인네들에게 인기가 있는가?”
선영은 물었다. 떠보기 위한 말이었으나 정금은 아는 듯 모르는 듯 태연히 답했다.
“난 옷감이 참으로 좋네. 요즈음엔 쉬게 되면 수방의 아이를 불러다가 바느질을 배우지.”
태연한 태도에서 죄인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영은 잘못 안 것인가싶어 정금에게 미안해졌다.
“소가 자네는 지밀이 아니라 침방이나 수방으로 가야했던 것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정금은 선영의 염려에 대꾸하며 옷감을 다시 펴서 개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궁궐에 오고 싶지 않네. 물론 자네들을 만난 것은 좋으나 나는 떠나고 싶어.”
“떠나고 싶다니, 어디로? 외국으로?”
늘 예상치 못했던 말을 하는 정금이었지만 이번의 말은 선영이 더욱 예상키 어려운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줄곧 왕가에 대한 충성이 존재의의였던 궁녀다. 그런 궁녀 중 가장 지엄한 지밀의 궁녀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것……. 왕이 떠날지언정 어찌 궁녀가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정 무엄한 말이었다.
선영은 옷감을 보았다. 산 것이니 무어라 말할 수 없어도 궁의 허락이 있는 것이 아니고보니 들키는 날에는 압수당할 수도 있으리라 보였다. 선영의 시선이 옷감에 내리꽂힌 것을 본 정금이 물었다.
“고할테요?”
“눈감아 줄테니 요청이 있소. 내통하는 이들을 만나게 해주게. 나도 신문물이 어떤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 말이오.”
최상궁께서 알면 경을 치시리라. 엄선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욕구가 더욱 앞서나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앞으로 왕가가 이런 요상한 문물을 가져오는 이들과 다투게 되거나 이들을 이용해야한다면, 이런 요상한 것들을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고 있었다.
“알았네. 헌데 그들이 다시 오자면 시간이 걸릴텐데.”
“이러는 이들이 많은가?”
“많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런 문물을 내다팔면 적잖은 돈이 되는 것도 사실이야.”
‘정금은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알았을까.’ 문호가 개방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겠지만 정금의 행동력은 무섭도록 빠른 것이었다. 선영은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시대가 변하는데 자신은 너무나 느린 듯하였던 것이다.
‘세상 밖은 진정 무엇이 있을까?’
궁녀로서는 가지지 않아야할 호기심이었으나 선영은 호기심이 들끓듯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한 면은 법도에서 늘 어긋나는 정금과 자신이 닮은 면이 있었다.
날은 벌겋게 끓고 있었다. 옮기는 걸음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천을 뚫고 발바닥까지 느껴지고 있었고 나무마다 드리워진 그늘은 제 몸 하나도 되지 못할 만큼 비좁았다.
선영은 신지소지를 찾았다. 신지소지는 전의 상직소환과 헤어지고 이번에는 별감과 사귀고 있었다. 선영은 신지소지를 돕다가 제법 많은 상직소환이며 별감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앞다투어 신지소지를 알려고 하였으나 퉁퉁하고 둔한 선영을 탐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지소지를 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선영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눈치채고 그녀와 교분을 쌓기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 선영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가 있었으나, 선영은
“법도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요.”
라고 대꾸하여 거부하였으며 그들과의 조용한 교류 속에서 차츰차츰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지소지의 외도를 용납하며 스스로의 법도를 지키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체구 탓인지 둔중한 이미지의 탓인지 그녀의 말은 사람들에게 진실로 다가가기 쉬운 특성이 있었다.
선영이 찾던 신지소지는 마루를 닦고 있었다. 선영은 마루에 앉아 넌지시 물었다.
“언니와 정표를 나누던 사람 중에 외교를 하던 이가 있는가?”
“외교말이오니까?”
“실학 쪽도 좋구, 그냥 그런 소식 듣고 배워보고 싶어서 그러우.”
“저도 궁중 안에서 지내는 분외에 알지 못하니…… 허나 항아님께 신세진 것이 많사온데 알아보겠사옵니다.”
신지소지가 소개한 사람은 고위 환관이었다. 신지소지가 천한 궁녀 중에서도 그리 높지 않은 직급의 견습궁녀라 하여도 그녀의 인맥을 어찌 얕볼 수 있으랴. 선영은 아리따운 그녀의 외모가 힘인 것을 실감하며 그의 방에 방문하여 그에게 배움을 청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했던 그였으나 선영의 언변은 그를 차츰 설득시켰다.
“나라를 지키려면 천한 궁녀의 신분이나 알아야하지 않겠사옵니까. 나라가 외세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것만 미천한 소인이 아는 것 이옵니다, 허나 그 이상을 알지 못하니 원통하여도 어리석은 일만 할 뿐이옵니다.”
절을 올리는 선영을 본 환관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기특하구려!”
라는 극찬을 하였다.
“과연 최 상궁이 눈여겨 본 아이로다. 허나 나는 불가하오.”
그는 자신이 거절하자 눈에 띠게 실망하는 선영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허나 내 사람을 소개시켜줄 수는 있으리다. 나라를 위하는 뜻이 기특하니 어찌 감응하지 않겠소.”
선영은 번쩍 눈이 뜨였다.
“하오면…….”
“이번에 조정이 일본과 체결한 약정을 알고 있소?”
“아옵니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계기 정도로만 알고 있사옵니다.”
“그 조약들은 문제요. 한 번도 제대로 외교를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유생의 자존심으로 계약을 채택하였으니! 조정도 이제야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소.”
그는 신랄하게 말했다. 변성기를 겪지 않은 환관의 여린 목소리가 짜랑하게 울렸다. 그는 말한 이후 자신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궁녀에게 괜히 말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소.”
“아니옵니다.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소인이 미천하고 어리석어 사태를 모를 뻔 하였사옵니다. 헌데 소개시켜 주신다함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러 갔던 인물이기도 하고 장래도 창창한 자인데, 김홍집이라고 아시오?”
김홍집. 68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광양현감을 거쳐 조정에 올라와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인 것을 생각하면 몹시 빠른 승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영과는 12살 차.
“최근의 세태와 외국문물에 대하여서는 그만큼 잘 아는 인물도 없지.”
환관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김홍집. 선영은 그 세 자를 머릿속에 넣었다. 선영은 물러나올 때 다시 절을 하여 고마움을 표했다.
천한 궁녀와의 만남이니 극도의 비밀에 붙혀진 일. 그러나 그 비밀이라는 것의 긴장감에 선영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가르치는 이를 감탄케 하였다. 무엇보다 신문물이나 신학문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과 무척 달라 듣도 보도 못한 것이어서 선영의 흥미를 더욱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학문에 매료된지 얼마나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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