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이 공부를 배우는 여덟 살에 이르렀을 때부터 궁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선영이 공부를 시작할 때 쯤, 내시며 궁녀들은 진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방에서 난이 일어났다며 궐 안 사방에서 수근거림이 들렸다. 홍경래라는 자가 나라를 세웠다는 말도 들렸다.
그 통에 사도세자의 증손이며 강화도령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던 철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철종은 자식이 없었다. 왕위는 익성군이 이어 받았다. 그 전까지 듣지 못했던 낯선 이름이었다.
순이는 최마마님과 다른 마마님이 오셔서 대화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독살인 것같지 않우?”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최마마님은 딱부러지게 말했다. 선영은 귀가 쫑긋 서는 것을 느꼈다. ‘독살이라니? 그 것은 사람을 죽였다는 거잖아.’ 최상궁이 거처하는 곳에서 마루를 닦던 와중이었다. 마루 위에서는 선영이 귀를 세우고 나무 위에는 까치가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선영은 하는 행동을 잠시 멈추었다가 들키지 않도록 다시 바닥을 닦았다. 두 상궁은 선영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다른 마마님이 바닥에 손을 얹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니, 형님도, 아시면서. 주상이 돌아가시자마자 옥새를 빼돌려 흥선군의 둘째아들을 왕좌에 올렸소. 오늘 교서가 발표됐는데 못 들으셨소?”
“흥선군이라면 왕실의 적통은 아니지 않는가?”
최마마님이 말했다.
“그러니까 흥선군이 보통은 아니우. 어느새 둘째가 조대비마마의 양자가 되어 있지 않겠소. 익성대왕으로 이미 올라왔소. 김홍근이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행실이 너무 엉망이라 도저히 올릴 수 없다고 하우.”
“첫째가 아니라 왜 둘째가 올라왔어?”
“뻔한 일이지 않소. 형님. 어릴수록 쉽지 않겠소.”
한숨이 들려왔다.
“이 나라의 왕권이 계속 무너지는구려.”
왕권.
왕족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세상에서는 몹시 위험한 일이다.
선영은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그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그리고 왕족 역시 위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영은 머잖아 알았다. 익성군은 익성대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어떤 군밤장수를 처형했다. 능지형이었다.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찼다. 그런 소리를 들어 선영은 눈치로 어떤 일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10살이 갓 넘은 어린 소년이 하기에 잔혹한 일이었으며 사람들의 입에서도 여기저기에 오르내렸다. 새군주가 잔혹한 성품을 지닌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였다.
선영은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 궁궐에 오기 바로 전 날, 소년을 때렸던 군밤장수가 생각났다. 물론 그 소년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흐릿한 기억 속의 그 소년은 자신에게 잘 대해줬고 착한 소년이었다. 그 소년이라면, 왕이 되었더라도 군밤장수를 용서해주지 않았을까.
선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왕위에 오른 어린 왕에게 호기심이 갔다. 왕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까. 거리를 떠돌던 어린 왕이라면 어쩌면 비슷한 일로 원한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선영은 왕이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도 선영은 언제나 주상전하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철종은 서자의 자식이었고 나뭇꾼이라 놀림받았지만 순이는 오히려 그러했기에 주상에게 마음이 쏠렸다. 철종은 천민이었던 시절 사랑했던 천민여자를 못 잊어하였다. 궁궐 내에서 그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선영은 왕이지만 천대받는 왕에게서 스스로를 보았다.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발칙하다며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으나 선영은 나무꾼을 하던 왕, 거리를 떠돌던 왕이, 평민의 신분으로 궁궐에 와있는 자신과 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양반의 여식은 없었지만 아기나인 중에도 중인의 신분인 이들은 제법 있었고 더욱이 지밀, 침방, 수방을 지망하는 아이들은 더욱 중인의 신분이 많았다. 그런 이들은 중인인 자신들이 가난한 평민인 선영에게 지는 것을 못 견뎌했다.
시기와 질투, 권력욕.
궁궐 안에는 그러한 이들이 많았다. 다섯 살에 들어와 머리가 굵지도 않았으나 아등바등 권력의 꼭대기로 올라가야한다는 것만을 빠르게 깨달은 이들은 집안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선영이 남달리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 욕망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 잊혀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들의 아귀다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글씨를 쓰다보면 사람들의 아우성이 잊혀지고 글을 읽는 동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선영에게 있어 배운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남달리 출세욕이 강하고 영리한 아이들은 선영이 미래에 왕의 가까이에 머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가까이 두려고 접근하는 일도 있었다. 다들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유혹에 취미를 붙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왕의 성은을 입으면 궁녀 중 가장 천대받는 무수리도 상궁을 뛰어넘는 후궁이 될 수 있었기에 일반적인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 실속이 있었다. 그러나 성은을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왕이 부리는 부서인 지밀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고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주상의 용안을 보는 것마저 쉽지 않은 판국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여야 기회라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왕의 은총을 받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 엄선영이 필요했다.
선영의 실력은 지밀의 아이들 중에서 왕과 가까운 곳으로 배정받기에 부족하지 않았으나 얼굴은 성은을 받기에 부족함이 틀림없다고 모두들 생각하였다. 두툼한 얼굴, 두툼한 입술에 고집스럽게 축 내려간 입술. 그 모든 게 보통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 엄선영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었다. 선영의 성격도 그들의 그런 의도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이 있었다. 때문에 선영은 인기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선영은 생을 맬 수 있었다. 생을 맨다는 것은 아기나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생을 매는 것은 4, 5세에 입궁하는 지밀과 6, 7세에 입궁하는 침방, 수방의 소녀나인만의 특권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생각시라 불렀다.
선영이 생을 매고 난 이후에는 그녀에게 함부로 말하는 이가 없었다. 지밀의 생각시였기 때문이다. 지밀의 사람은 곧 임금이 쓰는 사람이었다. 궐 안 사람 중에서 임금의 사람인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영은 궁궐에서 생각시로 지내는 동안 친구 세 명을 사귀었다.
소정금, 정숙양, 신지소지가 그들이었다. 두 명은 자신과 같은 지밀의 생각시였으며 한 명은 다른 분야로 갓 입궁한 신출이었다.
소씨 가문의 정금은 중인출신의 집안으로 집도 잘살았으나 어릴 때부터 가족의 미움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는 했다. 정금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정금의 방안에 매번 먹을 것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 그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궁궐에 들어왔다는 것은 어떠한 사연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정숙양은 역시 중인의 집안이었는데 집이 몰락하여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워 숙양이 궁에 들어와 받게 된 월급으로 가족들이 먹고 사는 모양이었다. 신지소지는 기생의 딸로 궁녀를 모집하는 내명부관원에게 붙잡히다시피하여 입궁하였다고 했다. 본래 정해진 구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궁녀이고 보니 신지소지는 특별한 계기로 만나게 되었는데 신분의 차이는 있었으나 마음이 잘 통해 선영은 그녀와 가까이 지냈다.
구역이 엄격히 정해져 정해진 구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소녀나인들이었다. 선영이 지소지를 본 것은 그런 구역을 침범하여 지엄한 대조전에 그녀가 서있던 때였다. 대조전은 창덕궁 안에 왕비가 머무는 곳으로 지밀의 사람이 아니면 쉽게 출입할 수 없었다. 선영은 지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조전에 자주 청소를 하러 오고는 했다.
“뉘요?”
“에구머니나!”
경기를 일으키듯 뒤집어지는 지소지에 선영도 같이 놀랄 지경이었다.
“누구요?”
“저, 저.”
더듬거리는 모습이 상습범은 아닌 듯했다. 선영은 도둑년이구나, 생각하며 지소지를 보았다. 누군가 왕궁에 침입하여 노리개를 몇 개씩 빼돌려가는 소행이 가끔씩 일어나는 터였다. 선영이 쏘아보자 지소지는 와락 눈물을 쏟았다.
“울지 말고 훔친 것을 돌려놓고 와! 봐줄 터이니.”
“그게 아니라, 저…….”
“저가 아니라 말을 해야 알 것 아녀. 아, 이리로 와. 여기 있다 무슨 경을 치려구.”
지소지가 머뭇거리자 선영은 손을 잡아끌고 풀밭으로 숨었다. 이렇게 발각되면 더 경을 치겠다, 선영은 어리석은 자신에게 꿀밤을 때리고 싶었다.
풀밭 안에서 지소지는 작게 사정을 말했고 선영은 그 사연을 들으며 계속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소지는 도둑이 아니었다. 왕의 남자를 넘본다는 의미에서는 도둑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상직소환(上直小宦). 그를 기다려 정표를 주고자 하였다고 하였는데, 상직소환이라 함은 견습내시였다.
“어찌…… 들키면 경을 치지 않겠수.”
선영은 놀랐지만 자주 듣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궁녀와 내시가 사랑하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였으며 항아님들에게 주의를 받기도 하던 일이었다. 물론 네가 사랑을 하겠니, 하며 까르륵거리는 항아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선영은 지소지의 몸을 살폈다. 여린 몸에 얼굴은 약간 울상이었으나 꽃같은 자태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른 나이였지만 여자의 태가 풍겼다.
‘참으로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구나.’
선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좋은 것을요…….”
지소지는 나이가 선영보다 한 살 많다는 것을 밝히고도 계속 존대를 했다. 부서별로 차별이 있는 터. 선영이 지밀의 사람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니, 구역에서 함부로 나오지 말고 정표를 나에게 전하우. 얼굴 자주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들키면 태형이우. 그 몸으로 버텨나겠수? 내가 전달할테니 조심 좀 하우!”
지소지와 선영은 그 이후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지소지가 몰래 정표를 전달하면 선영이 지소지가 말한 내시가 다니는 길에 정표를 숨겨놓고 찾게 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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