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훈은 눈이 뒤집혔다.
“야! 채희는?”
로진은 실눈을 떴다. 힘겹게 뜬 눈이다.
“……왜 없지?”
그러다 스르르 다시 감아버린다.
“야!”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로진은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숨소리만 색색 내쉬며 깊게 잠들어있었다. 제훈은 열불이 터졌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잘 수 없을 것같다. 저 놈은 저렇게 잘 자는데 억울한 일이다.
“채희의 목도리가 왜 네 침대에 있었는지 이유를 들어야겠다.”
밤을 새서 퀭한 눈을 부릅뜨며 제훈이 살기띤 오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막 잠에서 깬 로진을 노려보았다. 로진은 멍하니 물을 뜨러 가서 한 잔을 마시고는 멍하니 되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채희를 자신의 몸 안에 가두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가 없는 것이 역시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도리는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순간이나마 품에 안고 있긴 했을까. 그러니 목도리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리라.
“그 앤 요정인가?”
“헛소리 그만해. 남은 일하러 다녀와서 죽겠구만! 채희 이 녀석도 칠칠맞게! 무사히 들어가긴 한 거야?”
“아……!”
“뭐야. 진짜 그냥 보낸 거야?”
“밤을 샜다면서 그 동안 진짜 전화도 안해본 건가?”
로진과 제훈은 서로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훈이 두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었다. 그만 로진이 잘 케어해줄 거라고 믿고만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로진이 먼저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는 몇 분이고 신호음만 갔다.
“부모님에게 해봐야할 것같은데. 네게 부탁해도 될까?”
“부탁 안해도 할 거야! 에잇! 지금 채희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그래?”
제훈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입술에 핏기가 가셨다. 항상 뻔뻔하게 웃어왔던 그 입가가 가늘게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훈은 채희의 부모님과 전화를 하다가 점점 머리가 멍해져왔다.
“안 들어왔다구요?”
“연락은 왔었어. 오늘 외박한다고 그래서 꾸짖긴 했는데……. 어떻게 알았니?”
“채희가 외박을 했다고…….”
제훈은 팩 로진을 쏘아보았다. 대화를 듣고 있던 로진은 빠르게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내 탓이다.”
로진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어떡할거야?”
“채희가 준 어깨의 전화번호. 그리고 기사님들의 연락망. 이 것만 있으면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거다.”
제훈도 점퍼를 챙겨입었다.
그 시간에 채희는 작은 방 안에 있었다. 어제 밤에 길을 가는데 흰 차가 따라왔다. 창문이 열리자 화경의 얼굴이 있었다. 말할 게 있으니 따라오겠느냐는 말에 부모님께 말을 하고 따라갔는데 커피숍이나 가려니 했던 방향이 자꾸 틀어져 모르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미심쩍었지만 작은 방으로 안내를 하는데로 따라갔다. 다과를 내오겠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나간 화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 째 방 안에 갇혀 있었다.
채희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목이 말랐다.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방문은 잠겨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휴대폰은 아직 빼앗지 않았다. 채희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어떤 전화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반가웠다.
목소리는 낯설었는데 그 때 미행하던 아저씨인 것같았다. 그는 방문을 열고 근처에 있는 X브랜드 커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문 밖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채희는 얼른 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다.
위기감이 들었다. 그녀는 곧장 밖으로 뛰었다. 다행히 경호가 없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었을 때 이윽고 X브랜드 커피가 보였다.
“야 심채희!”
맞은 편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주황색의 약간 긴 머리가 바람결에 엉망으로 휘날렸다. 그 옆에는 로진이 달려오고 있다. 짧은 로진의 머리도 땀에 젖어 엉망이었다.
“네가 화경이와 간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다행이다.”
“네…….”
채희는 화경과 어떻게든 대화를 하면 풀릴 수 있다는 계산으로 간 것이었지만 자신의 계산은 틀린 것같다. 채희는 쓰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로진은 민훈에게 화경의 계획에 대해 알아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셋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서 넓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로진은 민훈에게 부탁해뒀으니 안심하라고 채희와 제훈에게 말했다. 자신이 어떻게든 결착을 내겠다고.
“그런데 왜 가둔 걸까요?”
채희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로진과 제훈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던 로진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그 때 네가 번호를 얻어둔 사람이 도움이 됐어. 그 때 네가 커피를 사줬었다며?”
“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마침 눈 앞에 아메리카노를 천원에 팔고 있어서.”
채희는 그 때 물벼락을 맞았을 때 옆에서 움찔하던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를 떠올렸다. 뭔가 허술해보이는 아저씨였지만 자신이 추궁하자 사설탐정이라고 고백했다. 어쩐지 느낌이 안쓰럽게 느껴져 아메리카노만 사들려서 얼른 돌려보냈었다.
“그 것 때문에 도와준 모양이야. 큰 일날 뻔 했어.”
“화경이는 조심해. 제정신이 아니야.”
로진과 제훈이 앞다투어 말했다. 채희는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긴장이 풀려 픽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데 별 일이야 있겠는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은 생각을 깊이 하는 타입은 아닌 것같다.
“바래다줄게. 일단 휴학도 했으니까 되도록 집 안에 있어.”
제훈이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야겠어.”
로진도 따라 일어섰다.
“혼자갈 수 있어요. 화경이도 납치가 아니라 같이간 거예요. 내가 좀 부주의 했어.”
그렇게 말했지만 두 남자는 채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제훈과 로진은 서로를 보았다.
“화경이는 무슨 꿍꿍이지?”
“정기사님이 화경이 가는 경로를 알아봤는데.”
“알아봤는데?”
“화학학과에 들렸다고 해. 정신과도 아니고 화학학과……. 무슨 꿍꿍이일까?”
“잘 구슬려놨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나갔군. 걔가 그러는 건 뻔한 거 아니야? 몸에 안 좋은 걸 얻어냈겠지.”
“역시 그런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려고 할 수가 있지.”
“너도 정신을 차렸구나. 전엔 그럴 애가 아니라고 하더니. 걘 그게 가능한 애야.”
둘은 각자 고민을 했다. 로진과 제훈이 엇비슷하게 말을 밖에 내어 토로했다.
“후, 하여튼 앞으로는 금주다.”
“로또가 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성공해서 힘을 가지고 만다.”
다짐하는 둘이었다.
집에 돌아온 채희는 화경이 어떻게 하든 간에 자신은 휴학을 했으니 다른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 방해를 한다면 해외로 봉사활동이라도 가볼 작정이었다. 거기까지는 따라올 수 없겠지. 잘하는 것이라고는 달리기밖에 없었지만 빨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같았다.
로진이 소개시켜준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힘을 빌리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몇 시간쯤은 본 것같은데 갑자기, 빵빵! 하는 클렉션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하고 가만히 있자 다시 빵빵! 울린다. 채희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곳에는 아까 자신을 바래다주었던 로진이 서있었다. 채희는 당황해서 급하게 밑으로 내려갔다. 차를 모르는 눈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까만 차가 서있었다. 로진은 채희가 내려와도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표정없이 말했다.
“앞으로 외출할 때는 나를 불러.”
“어, 어떻게 그래요!”
“이번에 그런 일이 있고서도 그래? 꼭 불러.”
“선배도 선배의 일이 있을텐데 어떻게 그래요.”
“그럼 틈내서 같이 일하고 공부할래? 미안하면 그렇게 하자.”
뻔뻔스러운 건지 진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채희는 말문이 막혔다. 채희는 결국 화제를 돌렸다.
“……웬 차예요?”
“집에 있던 거야. 기사님이 타도 괜찮다고 해서 타고 나왔어. 전에 내가 말했던 알바는 생각해봤어? 되도록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로진으로서는 채희를 자신의 눈 안에 둘 요량이었다.
“다른 데 이력서를 넣어놨어요.”
“왜…….”
로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표정은 미미하지만 그 감정이 밖으로 드러난다. 채희는 웃었다. 뭔가 그가 감정이 드러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를 알기 전에는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 채희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더니 더 활짝 웃었다. 전화를 끊고서도 미소는 여전히 잔잔했다.
“오라하네요.”
“어디에? 그리고 뭘?”
“알바요. 커피숍이에요. 대형이라서 복지도 잘 되어 있대요. 일단 면접 보라는데, 될 거 같아요.”
“계열사?”
“작은 가게부터 시작했대요. 일부러 계열사보다 성장형을 택했어요.”
“그래? 잘했어. 계열사면 그 쪽 사람을 찾아서 부탁할까 했는데.”
“네. 너무 선배 신세 지는 것같고 그래서.”
“그런 생각하지마.”
로진은 운전석 반대편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제부터 기사라고 생각해. 모셔다 드려도 될까요?”
채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발요! 부모님도 보고 계시단 말예요.”
채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중 어머니는 놀리는 듯한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아……. 미안.”
로진은 멋쩍게 말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