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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이라는 분이 누나들의 리더인가요?”

 

우리 중엔 리더는 없어. 하지만 Y그룹에 사랑받는 손녀니까 뭘 하려면 화경이한테 허락받는 게 좋긴 해.”

 

그럼 그 누나를 한 번 보고 말하고 싶은데요.”

 

?”

 

우리가 사귀는 것.”

 

에이~ 뭘 그렇게까지.”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잖아요. 누나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알리고 싶은데.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어어.”

 

소윤은 얼굴이 벌게졌다.

 

잠깐 보면 되니까요. 지금 잠깐 불러내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아요?”

 

다음에 그러면 안될까? 불러내는 게 조금.”

 

화경이 누나 말에 누나가 꼼짝을 못하는군요.”

 

이번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훈의 비틀어진 입가를 보자 소윤은 이번엔 설레는 것이 아니라 모욕감이 치솟아올랐다. 평소부터 화경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왔던 자신이었다. 필요하다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굽신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것을 제훈의 입에서 비웃음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그래? 어느 애가 이상한 말을 했구나?”

 

아닌 것도 아니네요. .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라고도 못하는 건가요?”

 

아니야!”

 

나는 누구에게도 누나가 내 여자라고 할 수 있어요.”

 

잘 봐. 전화 걸었어.”

 

소윤은 휴대폰화면을 제훈의 앞에 내밀었다. 신화경으로 가는 전화였다.

 

만나자고 하세요.”

 

알았어!”

 

소윤은 손에서 진땀이 흘렀다. 화경과는 자주 연락했지만 주로 소윤이 연락을 받는 입장이었고 보통 화경이 뭔가를 지시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화경아. 아 나 소윤인데. 오늘 남자친구 소개하기로 했잖아. 네가 안 왔더라. 소개할까 싶어서 오늘 시간 돼? , 안돼?”

 

더듬거리는 소윤 사이로 제훈이 휴대폰을 뺏어들고 냅다 고함쳤다.

 

소윤누나 남자친구인데요, 찾아갈게요!”

 

!”

 

가요.”

 

제훈은 생긋 웃었다.

 

분명히 안된다고 했을 거야. 가도 안 만나줄걸!”

 

일단 가보죠.”

 

소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차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운전석에 앉자 제훈은 태연스레 옆좌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소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앙다문 채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도착한 것은 어느 주택가였다. 넓은 집들이 여기저기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적당히 높지 않게 서 있었다. 소윤은 차를 멈춘 채 제훈에게 내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먼저 차에서 내렸다. 제훈은 벨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정중한 목소리가 벨을 향해 울려퍼졌다.

 

화경아가씨 친구 소윤입니다.”

 

잠시 소리가 끊기더니 이내 다시 정중한 음성이 들렸다.

 

아가씨께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아가씨께 심채희와 관련된 친구를 데려왔다고 전해주세요.”

 

다시 잠시 소리가 끊겼다. 그러더니 덜컥 대문이 열렸다. 제훈이 들어서려고 하자 소윤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미쳤어?”

 

기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누나. 미안. 얘기할 게 있어서 그래.”

 

이렇게 제멋대로 할 거라면!”

 

헤어져줄게. 내가 제멋대로 했으니까.”

 

제훈은 마지막으로 상냥하게 웃어보이고는 어이가 없어 덩그러니 서 있는 소윤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웬 촛불이야?’

 

제훈은 높은 벽을 따라 걷다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보고 으스스한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잠시 한기가 들어 몸을 떨었다. 큰 홀이 나오자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집사가 마중나왔다.

 

소윤 아가씨는 어디 계십니까?”

 

아까의 그 정중한 목소리의 주인공 같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가씨가 원하는 것을 쥐고 있을 겁니다. 저를 소윤아가씨가 화경아가씨에게 드리는 선물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연락해보겠습니다.”

 

심채희를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씀해주시면 될 겁니다.”

 

집사는 잠시 인터폰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들어가십시오. 방 안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제훈은 아무리 천하의 류제훈이라지만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가 잔뜩 경계하고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이 집의 분위기 또한 보통의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명 자체가 어두웠고 약간은 음침했다. 게다가 넓고 공간이 많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집사가 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침대는 흰 색이었지만 여전히 빛의 양이 많지 않아서 침대만 유달리 희어 보였다. 제훈은 성큼 성큼 들어갔다. 집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적막함이 가득찼다. 침대 위에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녀가 아마도 화경일 것이다. 화경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제훈이 먼저 말을 건넸다.

 

소윤누나는 아파서.”

 

걔는 우리집 근처만 오면 아파.”

 

화경은 턱을 약간 들고 제훈을 보고 있었는데 조금 오만해보이는 자세였다.

 

근데 네가 내가 그 여자를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걔가 말했니?”

 

소문 들으면 알지. 어디서 나온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경은 약간 발끈한 표정으로 제훈을 보았다.

 

왜 반말이야?”

 

같은 학과는 아니지만 같은 학년에 동갑이라고 들었어. 소윤누나한테서 들은 건 아니고 네가 표적으로 한 대상과 동기인 바람에 말야. 소문은 엄청나게 빠르다구.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게 알려줘야 해? 태도가 형편없네.”

 

무슨 사냥을 한다고 하던데, 거기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네가 무슨 정보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너와 그 애가 어떤 관계인지가 중요하지. 걔를 아는 건 시간만 조금 더 있으면 어려운 일도 아냐.”

 

그런데 왜 나를 들여보냈지? 절박한 거 아냐? 사실은?”

 

나가. 더 들을 필요 없겠어.”

 

나를 키워주면 쥐를 잡아오는 고양이가 될 거야.”

 

무슨 소린지.”

 

화경은 인터폰을 눌렀다.

 

심채희를 죽이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제거하는 법. 알고 싶지 않아?”

 

그제야 화경은 제훈을 돌아보았다. 제훈은 입꼬리를 올렸다.

 

먼저. 죽이든 살리든 네 맘이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 애에게 사고가 난다 쳐. 로진의 마음은 영원히 사라진 심채희에게 머물고 너는 영원히 분노의 대상이 되겠지. 하지만 심채희가 잔인하게 로진의 마음을 짓밟고 난 뒤라면 얘긴 달라져.”

 

그래서?”

 

나를 키워줘. 그 애의 마음을 빼앗아오지.”

 

화경은 비웃었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걔가 행복한 꼴은 두 눈뜨고 못 봐. 그게 로진이든 다른 사람이든 내가 왜 그 꼴보기 싫은 애의 행복한 모습을 봐야하지?”

 

제훈은 화경의 미움이 이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지만 냉정한 어조를 유지했다.

 

행복한 모습? 과연 그럴까? 그 때가 추락시키기 가장 좋을 때는 아닐까?”

 

화경은 입을 다물고 제훈을 보았다.

 

모든 남자에게 버림받고 비참해졌을 때로 만들 수도 있지.”

 

너도 그 앨 싫어하는구나?”

 

화경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제훈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난, 이용당한 거예요. 흐흐, 내 주제에 무슨.”

 

선아는 빈 속에 몇 잔씩이나 걸친 소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시는 속도를 보아하니, 얼마 있지 않아서 취객을 감당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소윤이 이러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고 평소에도 잘 참는 성격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아는 보고만 있었다.

 

화경이라구요. 걘 결국 화경이가 목적이었던 거야. 그래. 화경이가 예쁘긴 하죠. 하지만 너무 심하잖아요. 나는 뭐냐구. 이렇게 되면 난 얼마나 우습게 된 거죠?”

 

그 놈이 누구야?”

 

있어요. 그런 놈. 언니는 몰라요.”

 

선아는 한숨을 다시 한 번 쉬었다. 그 망할 놈이 누구인지, 잡아서 주리를 틀고 싶었다. 선아는 소윤이 주정을 하다가 잠이 들자 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줘.”

 

선아는 대뜸 말했다.

 

? 무슨 일이야?”

 

소윤이가 술에 취했어. 많이. 나 혼자선 무리야. 운전면허도 장롱면허구.”

 

기다려. 어딘데?”

 

민훈은 곧 가게에 도착했다. 축 늘어진 소윤을 선아와 민훈이 부축하고 소윤의 차 뒷 좌석에 태웠다.

 

소윤이가 술을 많이 먹는 애가 아닌데? 왜 이렇게 떡이 됐어.”

 

민훈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윤이가 술먹으면서 화경이 얘기를 좀 하던데.”

 

선아는 안전벨트를 매며 민훈의 옆얼굴을 보았다. 곱슬머리가 제법 자라 있었다. 예전에는 바짝 위로 올라가 있던 것이 눈썹 옆까지 구불거린다. 민훈과 화경은 자신에게는 항상 잘하는 터라, 민훈이 화경에 대한 걱정을 말할 때마다 그들이 사는 세계가 새삼 낯설었다.

 

그 애에 관련된 일이야?”

 

민훈이 물었다. 차가 출발한다.

 

그 애라면, 채희?”

 

그래. 화경이가 싫어하는 애라면 그 애가 먼저 생각나네. 이 번에 휴학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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