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부탁. 중소회사 거라서, 거기밖에 고쳐줄 데가 없어.”
“좀 메이저한 회사 걸 사라. 좀.”
“난 브랜드같은 거 몰라. 가격 대비 좋으면 그만이지.”
“그래, 그래, 덕택에 난 귀찮고.”
“우리 집이랑 많이 멀어서, 넌 네 집 근처니까 부탁해.”
“맨날 부려먹어.”
승철은 투덜거리듯 대꾸하며 기계를 잡았다. 화연은 입구 근처에 서있는데, 승철은 기계를 받고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여 나는 등을 떠다밀었다.
“화연이 삐졌어. 빨리 가.
“아하, 날 보내려구? 야아, 약았다?”
“삐졌잖아. 네 여자친구.”
“넌 꼭 화연이 편만 들지.”
승철의 이죽거림도 잠시, 그도 화연이 염려되었는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나이. 아직 젊디젊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의 방식은 너무나도 가지각색이어서 나는 언제나 내 제자리걸음이 불안하곤 했다. 나 혼자 변하지 않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내 테두리에 있는 인물은 이들이었지만- 언제나 내 색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서윤은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온화한 표정으로 미묘히 비슷한 색을 가장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신경이 쓰였다. 비슷한 색을 가장하지만 않는다면, 너에 대한 이 신경의 쏠림을 가다듬을 수 있을텐데. 피로하다.
“다음에 보자. 꼭. 오랜만에 봤는데 조금밖에 못 있었네.”
승철은 눈을 마주치고나서 이내 사라졌다. 둘이 사라지자 침묵이 침전물처럼 공기 중에 떠돈다. 나는 한참 남은 안주를 말없이 먹었다. 서윤이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참 오랜만인데도 변하지 않았다.”
“제일 안 변하는 사람들일걸. 네가 외국 다녀오고 나서 처음이지?”
“더 오래됐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야.”
“중학교.”
나는 조그맣게 내뱉어보았다. 중학교 이후로도 나는 서윤을 종종 만났다. 대부분의 경우, 연락을 하는 쪽은 나였다.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다른 인물과 마찬가지로 잠시 만나다 스쳐가는 사이로 끝났으리라. 나는 서윤을 향해 물었다
.
“옛날 이야기는 안 좋아해?”
“구전동화같은 건 아닐테고, 옛날이야기?”
알면서 되묻기는. 나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고 서윤을 빤히 보았다.
“우리가 지나온 옛날이야기. 너랑은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항상 하는 것은 서윤이 관심있는 이성의 이야기나 혹은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의 이야기 등 언제나 최근의 이야기로 국한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말이 없는 아이였고, 커서는 언제나 최근의 이야기만 한다. 궁금했었다. 그 아이의 환경, 배경, 이야기-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웃음을 물 뿐, 입을 꾹 다문다.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담없는 사람. 그런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지만 언제나, 그런 사람들은 이내 스쳐가곤 했다. 서윤은 그러한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담담했고 담백했다. 그런 것에 외로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흥미없어……. 재미도 없고.”
서윤은 웃음기를 담아내며 간단히 대답했다. 얼굴이 마주치자, 서윤의 표정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흠칫 굳는다.
“뻔하잖아. 너무.”
“그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나는 예전부터 역사같은 것엔 별로 흥미가 없었어. 너는 좋아해?”
“싫어하는 건 아니야. 뭐, 추억을 얘기하는 건 좋아하는 편이고.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리게 되면 왠지 기분 좋기도 해.”
“좋은 일이 많았나보네.”
그 말에 어쩐지 까칠함이 묻어나서, 나는 쓰게 웃었다.
“관계에서, 마음은 늘 변하는 거지만, 추억은 안 변하니까. 인간이란 게 변덕쟁이라서 불변의 뭔가를 추구하지 않아? 난 그래.”
“추억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변하는걸. 기억조차 변해.”
서윤은 술을 들이켰다. 못 본 새에 주량이 는 듯 했다. 승철과 화연이 가자, 홀짝홀짝 들이키는 횟수가 조금 늘었다. 서윤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들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는 누굴까.
드러내서 묻지는 않았다. 서윤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걸 안다. 상처가 되는 질문도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는 서윤을 좋아한다. 서윤은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미소를 다시, 얼굴에 띄웠다. 누구보다 적응을 잘한 사람. 그리고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 그 불신의 대상에 나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냉냉함도 적응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불신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욱 이상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불신을 내가 알도록 내버려둔 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개방인지도 몰랐다.
내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면을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티끌 하나 묻히지 않은 채 보관해두는 것은 서윤일지도 모른다. 가면만이 발달하고 있을 뿐, 속이 어떤지는 지금은 물론 예전에도 몰랐었다.
“추억-이란 건 너무 왜곡된 기억이야. 네가 아니면 이 애들도 만날 일은 없었을걸. 나는 1년 이상 가는 관계가 없어. 내가 1년 이상 만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잠시 말을 멈추며 서윤은 웃었다.
“다 네가 연결해주고 있어. 네가 연락해주지 않았다면 너랑도 연락이 끊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네가 최초야.”
“기뻐해야할 지, 슬퍼해야할 지.”
“좋은 거야. 요지는, 네가 의외로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소린 또 난생 처음이네.”
그 날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몇 통이나 되는 문자로 화연의 구박을 받아야했다. 주로 서윤에 관한 것이었지만, 거기에 맺힌 한을 다른 주제로도 풀어 나를 질책해왔다. 말하자면, 점심을 먹지 않는 것까지 새삼스레 욕을 먹어야했다. 왜 그렇게 싫어해. 나는 결국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고 마지막은 ‘넌 걔를 주의할 필요가 있어’ 라는 화연의 문자로 끝이 났다. 화연은 이전부터 나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제 2의 엄마같아서 편하기도 했지만, 엄마만큼이나 잔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화연이 정말로 속이 답답하다는 듯, 나에게 ‘네가 서윤을 몰라?’라고 물을 때면, 나는 지진이 난 곳의 흑인들이 약탈과 방화로 괴로워할 때, 뉴스를 보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그네들이 흑인들이 그렇지. 다 약탈 방화지. 쯧쯧.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와 동일한 불쾌감과 무서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고는 했다. ‘우리도 동양인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낼 때처럼 차별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안해보았느냐고.
서윤이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오랜 세월 알아왔다. 그리고 인간들이란 남의 이야기에, 그 것이 안 좋은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흥미를 보이는 존재들이었다. 서윤과 내가 적당한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될 무렵즈음부터 소문은 하나 둘씩 귀에 슬며시 기어들어오고는 했다. 이혼했대. 어머니가 첩이었는데 버려졌대. 걔 불쌍해서 어떻게 해? 그래도 걔 괜찮은 애인 것 같아. 라는 동정섞인 말들. 나는 서윤의 가면을 조금은 이해할 수있을 것같았다. 그 때 서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면, 무시무시하게 왜곡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 동정으로 끝나는 말들도 그들이 서윤의 온화함을 맛본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싶었다.
나는 서윤을 정면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서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제 3자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제 3자로서의 나는, 그녀가 첩의 자식이었고 사랑과 돈에 깊은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 어린애이며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나는 그 사실 이전에 서윤이라는 인간의 분위기와 말투, 성품이 그 사실에 앞서 생각되곤 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면 그 것으로 충분했다. 서윤이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것이면, 내게는 충분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잠시 잊혀진 채, 같은 아파트의 동갑내기 4인이 모인 이후로 1주 남짓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포트에 물을 올리고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먹는 인스턴트 커피를 질리지도 않고 먹고 있었다. 지금으로 3잔 째. 인스턴트가 질려, 괜찮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기계와 원두를 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내겐 돈이 없었다. 물이 끓을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바지 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여보세요.”
“뭐해?”
서윤의 목소리다.
“그냥 있어. 아, 맛있는 커피 먹고 싶어.”
“커피?”
“며칠째 내 몸에 저렴한 카페인이 흐르고 있거든. 금욕도 이제쯤 되니까 미치겠어.”
“일단 카페인이 들어가면 금욕은 아니지?”
실실 웃는 웃음이 이까지 흘러들어온다. 나는 웅얼거렸다.
“아무튼……. 네가 전화를 다하고 무슨 일이야?”
“일이 있어야 전화해? 카페인이라니까 생각났는데, 우리집에 꽤 괜찮은 차가 들어왔거든. 중국차인데, 오룡차라고. 비싼 카페인 섭취하러 와도 돼. 되도록 오늘, 이면 좋겠는데. 오늘 시간 괜찮아?”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가도 돼?”
“응. 6시에 올 수 있어?”
“응. 그럼 그 때 갈게.”
전화를 끊고 나자 허무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연락도 잘 하지 않는 녀석이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고, 그렇게 얼핏 생각했었다. 그러고보니, 귀국 전화도 서윤에게서 먼저 왔었던가. 최근에는 서윤이 먼저 연락오는 적이 잦았다. 나는 끓인 물을 가루커피에 부었다. 검은 색이 차오르고 그 안에는 나의 얼굴이 언뜻 비쳐 희미하다. 희미한 눈동자가 내 것인데도 무심해보였다.
요즘은 어떻게 옷을 껴입어도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그다지 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도 나는 가만히 있다가 몸을 떠는 적이 잦았다. 시계를 보자 5시 30분쯤에서 분침이 째깍거린다. 속으로 대충의 시간을 재어보고 나는 문을 열었다. 벌써 내려온 어두운 그림자를 보며, 어쩐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로움은 종종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가 아닌, 둘, 셋, 넷, 그 이상이었더라도 외로움이 가실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쓰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설쓰기 장편 > 도시의 밤(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의 밤, 극본6 (0) | 2023.03.16 |
---|---|
도시의 밤, 극본5 (0) | 2023.03.15 |
도시의 밤, 극본3 (0) | 2023.03.13 |
도시의 밤, 극본2 (0) | 2023.03.12 |
도시의 밤, 극본1 (0) | 2023.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