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이바 14
9.
페리온스는 참담했다. 어니스트는 페리온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원래 킹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야. 내가 지켜줄게.”
“…….”
페리온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맙다고 말하려고 입을 달싹여 보았지만 그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마차를 타고 성 안으로 가고 있었다.
“못 잤어?”
웜이 걱정스레 페리온스를 바라보았다.
“아냐. 별 거 아냐.”
“어제 검술 때문에 그런 거야?”
“아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는 어제 저녁 시간에 왜 안 나왔어?”
페리온스는 타모르에게 사정하는 그 모습을 웜이 보지 못한 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해져서 물었다. 웜은 안경을 살짝 들어올렸다.
“마법에 대한 책을 찾아봤어. 난 해봤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어떤 건데?”
“오늘 서재에 같이 가보자. 너도 한번 해 봐.”
“좋아.”
웜은 빙그레 웃었다.
도착하자 영주는 원탁에 앉아있었다. 페리온스는 꾸벅 인사를 했다.
“르네는 오지 않았나?”
“바쁘셔서 제가 왔습니다.”
“자넬 받아주는 데에 조건이 있네.”
“네.”
“반짝이는 계곡에 가면 검을 만들어주는 곳이 있네. 거기서 푸른장미꽃을 넣은 검을 만들어오게.”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영주는 짖궂게 웃었다.
“뭔지 알고서는 알겠다고 하는 건가?”
르네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예스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페리온스는 생각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영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알겠습니다.”
페리온스와 웜은 돌아서 나왔다. 웜은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괜찮겠어? 함정인 것같은데.”
“할 수밖에 없지…….”
“흠.”
돌아나오는 길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딱 한 번 들었지만 페리온스와 웜도 기억하고 있다. 링메일이 부딪히는 소리다. 영주의 넷째 아들이라고 했던 카몬이다. 주근깨가 가득 박힌 얼굴로 짖궂게 웃었다. 검을 쥐고 있었다. 빼내는 솜씨가 제법 빠르다.
“몸을 의탁하러 왔다지?”
“…….”
페리온스는 말없이 카몬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니스트도, 르네도 없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카몬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카몬은 검을 꺼냈다.
페리온스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을 평가할 수 있을 좋은 기회가 아닐까. 페리온스는 검집에 손을 갖다대었다. 웜이 페리온스의 어깨를 잡았다.
“페리온스! 참아!”
“그렇게 나와야지. 네가 과연 의탁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볼까? 르네백작도 실력은 없는 게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 재수없었는데 말이야.”
페리온스는 검을 빼들었다.
“덤벼 봐!”
페리온스와 카몬은 검을 들고 경계하며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다.
‘제 검술은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페리온스의 귀에 불현 듯 그 소리가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페리온스는 과감히 뛰어들었다. 카몬은 허리를 굽히며 배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페리온스가 뒤틀어 막자 몸이 꼬이면서 검 두 개가 강렬히 부딪혔다. 카몬이 검을 거두는데 페리온스는 진동이 아직 몸 안에 남아있었다. 멈칫하는 새에 카몬은 검 손잡이로 페리온스의 어깨를 후려쳤다.
“윽.”
페리온스는 털썩 꿇어 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일어서서 지켜본 카몬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것 보라고! 하하하하!”
페리온스는 입가를 굳게 다물고 다시 일어섰지만 카몬은 뒤돌아 서서 걸어나갔다.
“하하하하! 별 것 아니잖아! 하하!”
높은 천장이 있는 성 안에서 목소리는 쩡쩡 울렸다. 웜이 얼른 다가와 페리온스를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저 놈은 성안에서 검술을 배운 놈이야. 신경 쓰지 마.”
“물론이지.”
페리온스는 툭툭 몸을 털었다.
“나 혼자로는 안 되는 건가.”
사실 비참했다.
“응?”
제대로 못 들은 것인지 웜이 반문했다. 페리온스는 손바닥으로 웜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웜은 도착하자마자 서재로 갔다. 페리온스도 서재로 따라 들어갔는데 집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재는 휘둥그레질 정도로 높은 천장에 나선형으로 계단이 오르내리는 동안 책이 꽉차 있었다.
“이거야. 마법 서적이 잔뜩 있어.”
웜은 낑낑거리며 두꺼운 책을 서너권 가지고 내려왔다.
‘기초 마법서.’ ‘마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이해하기 쉬운 실용마법.’ ‘바로 따라할 수 있는 마법서’였다. 웜은 착실하게도 철저히 초보자용으로 마법서를 고른 것같다.
“해봤어?”
페리온스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틀림없이 하지 말라는 건데, 또 르네백작님이라면 하라고 할 것같기도 하고.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 봤는데, 역시 마법은 사기인 것같아.”
“안 돼?”
“전혀. 근데 새로워서 재미는 있어.”
둘은 등을 맞붙이고 앉아서 두꺼운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실의 불꽃과는 다른 청량한 빛이 군데군데 머물러 있어서 전체적인 공기는 어두운데도 읽어내려갈 만했다. 한참을 서로 책 넘기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뻐근하다. 몇 시지?”
웜이 기지개를 폈다.
“나가 볼까?”
서재를 나가자 바로 거실의 창문 너머의 뜰에 어니스트가 있었다. 어니스트는 검을 휘두르다가 웜과 페리온스를 보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페리온스와 웜은 뒤뜰로 바로 나갔다. 석양이 지고 있어 잔디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둘이서만 뭐한 거야? 나 왕따냐?”
“설마. 마법책 읽고 있었어.”
“마법?”
그렇게 말하고는 어니스트는 자신의 입에 급히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쉿! 금지잖아.”
“에이, 별 거 없었어요. 되지도 않아.”
웜이 손을 내저었다.
“어떤 건데?”
웜이 속삭이며 묻자 페리온스가 싱긋 웃었다.
“책에는 배에 힘을 주고 단전으로 마나를 끌어모은다고 생각하고 그걸 손가락으로 옮기면 기초 마법을 쓸 수 있대. 이렇게 암시 단어도 말하면 좋대.”
페리온스는 단전에 힘을 주고 외쳤다.
“라이트.”
그러자 손가락에서 반딧불만한 빛이 반짝이며 흘러나온다. 빛 한 점은 나풀나풀 나비가 날 듯이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나왔어!”
웜은 입을 쩍 벌렸다.
“난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라이트.”
어니스트가 힘을 주고 외쳤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잘 안 되는 것 같구만.”
페리온스는 조금 멍했다. 웜이 어니스트를 보았다.
“기초마법서에는 마법사의 혈통이 있으면 마법이 쉽댔는데.”
“마법사는 멸종했잖아.”
웜과 어니스트는 둘이서 종알종알 말하다가 페리온스를 보았다. 어니스트는 씨익 웃으며 페리온스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너 검사나 검투사가 아닌가보다.”
“그럼…….”
페리온스는 더듬더듬 말했다.
“대단한 거 아냐? 위험하기도 하지만.”
“비밀로 해줄게.”
“고마워.”
페리온스는 얼떨결에 둘과 악수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