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39화
“끝났어?”
“응.”
“걸어갈까? 버스 말고.”
올 때도 학교까지 걸어왔다. 버스는 아무래도 선우에게는 지금 상황에서 무리일 것 같다.
“응. 가자.”
선우는 후아암, 하품을 했다. 나는 청소 5시간 쯤 했다고 등허리가 다 뻐근했다.
“실망하지는 않았어?”
선우가 묻는다. 나는 의아하게 선우를 보았다.
“뭘?”
“내가 후계자인 줄 알았을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기지개를 켜다가 선우를 보며 물었다.
“너야말로 그래서 친절한 거야? 나한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흥…….”
선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기분 상한 거야?”
“됐네. 친절한 선우씨.”
“…….”
“나는 맨날 착각하고 있어. 바보가 된 기분이야.”
“뭘 착각했는데?”
“의무적으로 잘해주지 마.”
“아닌데, 그런 거.”
“아니면 뭔데? 네가 좀 싸가지는 없지만 착하니까 그런 거잖아.”
“양립할 수 있는 거냐? 그거.”
“양립할 수 있지! 불가능한 게 어딨어.”
“아니야.”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말을 꺼내지 말 걸 싶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쏘아붙이고 싶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예쁘니까 잘해주고 싶은 거지.”
“뭐?”
“네가 예쁘니까. 맞춰주기 까다로운데 맞추고 있잖아.”
선우도 조금 화난 것 같다.
“…….”
나는 말문을 잃었다. 사실 예쁘다는 말은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저히 농담으로 보이는 표정은 아니다. 우리는 말 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세상이 산란 되고 있고 넓은 빛 속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난 두려워.”
선우가 말했다.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을까. 이 말도 내게는 처음이다.
“내가 아버지처럼 될까 봐. 그래서 시간을 갖고 싶은 거야.”
“아버지가 어땠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은 무언가를 깨부수고 있는 모습이야. 폭력적이었고 기가 질릴 정도로 기가 세셨어.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접시를 깨고 소리를 지르고 그 접시를 일부러 밟아 피가 난다거나. 겁에 질려서 상대할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어린 나이에 힘들었겠다.”
“내가 두려운 건 그런 아버지의 모습보다도,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하잖아.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아. 내 꿈은 사실 히어로가 아니었어.”
히어로가 아닌 선우. 상상되지 않는다.
“네 꿈이 뭐였는데?”
“좋은 아빠가 되는 거.”
우리는 계속 걸었다. 나는 선우를 보았다. 어느 때보다도 눈의 그늘이 깊이 드리워져 있다.
“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조금 바뀌고 있어.”
“그래? 뭘로 바뀌었는지 궁금하지만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괜찮아.”
애써 생각한 말이 이게 전부였다. 나는 선우의 안색을 살폈다. 선우는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제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는 동안 세상은 점점 어두워졌고 나는 멍하니 걷다가 헉,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이 길로 걸으면 카모스가 일하는 커피숍이 나온다. 그러나 인제 와서 어쩔 수 없었다.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 흘러나오는 카페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카모스는 무려 바깥에 나와 있다. 향신료를 들고서.
“…….”
선우는 앞만 보고 가고 있었고, 계속해서 침묵이 흘렀다. 카모스는 아는 체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카모스는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한참 지나서야 나는 숨을 뱉었다.
“안 좋아?”
선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미안해.”
“뭐가?”
“성질내서.”
“너무 참는 것도 안 좋아. 까다롭다고는 했지만 괜찮아.”
“미안해.”
“대체 뭐가?”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모스에 관해서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이 미안하다. 그러나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신고도 못 한다고 했고.
우리는 들어가서 각자의 방에 올라갔다. 지치기도 했고 비밀을 들킬까 봐 부엌에서 대화하는 것은 좀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는 방에 올라가 블루헤드의 기운을 느꼈다. 몸속에 들어온 뿔 때문인지 가끔 식은땀이 날 때가 있었다. 그게 정신적인 문제인지, 뿔 때문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카모스는 블루헤드의 기운을 견디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
생각이 깊어지면 괴롭다. 나는 2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씻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야겠다.
활동정지 명령을 받아 운동장도 쓸 수 없게 되었고 선우의 헬스장을 이용하는 것도 일단 금지라 나는 아침에 조깅을 했다. 오늘은 주말이라 청소도 쉬는 날이다. 1층은 조용했다. 선우에게는 모처럼의 완벽한 쉬는 날이겠지.
가는 길에 오랜만에 집에 들러서 잠이 덜 깬 아빠와 뽀삐에게 인사도 했다. 다행히 집 안은 그럭저럭 정돈되어 있다.
가는 길에 카모스의 카페도 지나쳐가게 되었는데 나는 그냥 뛰었다.
그러나 앞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망토가 펄럭이며 가로막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다.
“아침부터 내가 보고 싶었나?”
“……네 녀석!”
“보고 싶었던 게 틀림없군. 커피나 한잔하고 가라.”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카모스는 현란한 스텝으로 막아섰다.
나는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다. 선우에게 말을 못 하는 것도 억울한데, 카모스는 집요하다.
“우냐?”
“안 울어!”
카모스는 나를 집어 들었다. 내 후드를 집어 들자 나는 공중에 발이 살짝 떴다. 대롱대롱 매달렸지만,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카모스를 보았다.
“커피숍 안으로 안내해주지.”
카모스는 훗, 웃었다.
나는 결국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기왕 들어왔으니 물을 건 물어야겠다. 카모스는 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가려면 나갈 수 있었지만, 기왕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