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30화
“여기서부터 걸어서 올라가야 해. 잠깐만.”
선우는 다시 내려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이런 대우가 몹시 낯설다. 그것도 선우에게 이런 대우라니,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스포츠카같은 차에 타고 절에 오다니, 사실 좀 부끄럽다.
“네가 좋아할 만한 풍경인데.”
선우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대였다. 나는 항상 노을의 번짐을 좋아했다. 선우는 그것을 어떻게 안 것일까.
“응, 좋아해.”
“여긴 편안하더라고. 눈 녹듯이 경쟁심이 조금 없어져.”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네가 경쟁심이 있었어?”
“당연하지. 괜히 인기순위 1위 히어로가 아냐.”
“그건 아직도 안 믿기지만. 난 네가 당연하게 1등을 하는 줄 알았어.”
“발버둥까지는 아니어도 노력은 하지. 여기 오는 것도 노력의 하나기도 해. 나 자신에게 안정감과 따뜻한 풍경을 선물해주는 거야.”
“흐음, 나랑 같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억지를 부려보고 싶다.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다른 말을 꺼냈다.
“이찬형 일 들었어. 형이더라.”
“아, 소문 난 것 같았어. 너도 들었구나.”
“오해해서 미안하더라.”
“아 괜찮아. 착각할 만도 했지.”
“이찬이 형을 오해한 건 많이 미안하지는 않아. 너를.”
“…….”
기분이 풀린 건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나도 이런 착각은 싫은데.
“나한테 너무 애쓸 필요 없어.”
나는 짐짓 차갑게 말해버렸다. 선우는 말없이 꾸역꾸역 걸었다. 나는 말을 덧이어 붙였다.
“나도 착각하는 게 두려워. 네가 너무 애써버리면 내가 착각하게 돼.”
“나도 네 마음이 뭔지 모르겠어.”
“확실하면 어떻고 불확실하면 어떡할 건데.”
자꾸 틱틱거리게 된다. 괜히 여기까지 데려오고서는 싸우고 가는 게 아닐지 무서웠지만 선우는 자꾸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 표현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이건 표현이 아닌 걸까? 선우는 잔잔하게 한숨을 쉬었다.
“내 마음은…… 서툴기 싫어.”
“……?”
“어디 가서 연애라도 하고 와야 할까, 배우고 와야 할까 싶어.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하든 내 행동이 다 오해가 되고 말아.”
그러고 보니 선우와 지내는 오랜 기간 동안, 인기는 많았지만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인기가 있는 애가 사귀지 않았을 리 없다고, 비밀리에 사귄 게 아닐까 했었는데 역시 그럴 시간도 없었나 보았다.
“지금 그거 고백이야?”
“모르겠는데.”
선우는 퉁명스럽다.
“지금 당장은,”
나는 말을 꺼냈다.
“당연히 지금은 같은 집에 사니까 무리야. 결국 깨질 게 뻔하잖아. 우리 나이도 너무 어려. 20살밖에 안 됐다고.”
이제는 선우가 더 틱틱댄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이런 이상한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싸우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어쩌자는 거야? 말을 하지 말든지.”
나는 속마음이 그대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3년 후.”
“뭐?”
“3년 후를 기다려줄래?”
“그동안 뭐 하려고?”
“그냥 성숙하고 크는 거지.”
“딴 여자 만날 거야?”
선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럴 시간은 없지 싶다.”
“이상해.”
“그러게.”
선우도 동의했다. 우리는 절의 입구에 드디어 도착했다. 절의 입구에 도착하자 역시나 선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는 싸인을 해주러 바쁘게 다녔고 나는 가만히 서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고백 맞지? 고백인 거지? 선우도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고? 이거 어장은 아니겠지?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데 선우가 내게 다가왔다.
“가자.”
여기선 오락실에서처럼 극성맞게 알아보지는 않는다. 모른 척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걸었다.
선우는 구석 자리까지 걸어갔다. 산 위에 있어 호흡이 조금 짙어진다. 우리는 암자까지 걸어갔다. 짙은 녹색으로 된 처마가 작은 집 위에 놓여있다. 집이라기보다 방이라고 해야 더 적합할 만치 작은 집이었다.
선우는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큰스님이 있는 곳이야.”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음, 왔으니 뵈러 가려고. 스님! 한 시간 전에 연락드린 선우입니다.”
“오.”
작은 감탄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거구의 스님 한 분이 회색 법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스텔라맨이로군. 옆에 분은?”
“저는, 아직 이름이 없는 히어로지망생입니다.”
“음. 비밀이 많은 표정을 하고 있구먼.”
“천만에요!”
나는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선우는 침착하게 물었다.
“제가 다치지는 않겠습니까?”
“바람 부는 게 좋지 않군. 특히 이 절에도 기운이 좋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러나 잘 빠져나올 걸세. 늦어지면 내려가기가 불편하니 얼른 내려가게.”
“감사합니다. 스님.”
선우는 다시 꾸벅했다. 스님은 허허 웃으며 다시 문을 닫았다.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나를 위해 온 것인 줄 알았는데, 점을 보러 온 거였나?
“네 얘긴 없으셨으니 네가 다칠 일은 당분간 없나 보다.”
“안 물어봤잖아?”
“미래를 보는 분이라 그런 거 있으면 얘기하셨을 거야.”
“네가 이런 거 보는 줄은 몰랐는데.”
“난 다 믿어. 어릴 때부터 많이 데려가셨거든.”
“엄마가?”
“엄마가.”
엄마 얘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엄마는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셨다고 했지. 물어보기는 겁난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렇게 나쁜 감정까지는 아닌 걸까.
“걱정하지 마. 전에 나쁘게 말했지만 난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해.”
선우는 싱긋 웃었다.
가는 길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주차장까지 내려가자 어느덧 해는 거의 넘어가 있었고 차도 몇 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에 히어로카는 유달리 튀기는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는 이미 늦어서 촘촘한 철창이 쾅쾅 새겨지며 주차장 주변에 박혀 있었다.
“뭐지?”
“히어로카를 노리는 걸 보니……. 변신해! 소라야!”
선우는 급하게 히어로시계를 꺼냈다. 나도 버튼을 눌렀다.
“히어로카를 쫓아온 건가?”
블루헤드들이 히어로를 노린다는 것은 알고 있다.
새가 까악 울었다. 저 위에 날아오르는 괴생명체가 있었다. 곰처럼 커다란 몸에 박쥐 같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날렵하게 빠진 검은 머리의 인간형 외계인이 채찍을 들고 서 있었다. 인터넷에서만 봤지만 나는 그 녀석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몬스터 대장 겔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