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29화
“하지만 그것보다 난 지구의 음식이 더 좋아. 여기를 망가뜨릴 일은 없다.”
“…….”
“나를 믿을 수 없겠지. 일단 너를 돕도록 하겠다. 내가 블루헤드의 수장이나, 지구의 침공에 대해서는 수정할 수 있다. 나는 목표를 교역으로 수정했다.”
“믿기 힘들어.”
“그렇겠지.”
그는 훗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는 있었다. ‘너를 돕도록 하겠다.’ 역시 백화점에 있던 그 녀석은 카모스였다.
“뭐 그렇게 심각해?”
주말에 선우와 나는 식탁 앞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다. 나는 카모스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선우는 반 잔 정도 남은 컵에 우유를 좀 더 따라주었다.
“뿔, 이거 신고하면…….”
“안 돼.”
선우는 단호하다.
“왜?”
“너는 돈의 세계를 몰라.”
돈의 세계. 돈이 많았던 적이 많지 않아서 돈의 세계는 잘 모르겠다. 아빠와 엄마는 스타였지만 한 때였고. 그래도 카모스는 이 뿔을 탐내고 있고, 내 몸은 죽어간다는데, 신고하는 게 제일 올바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기계적으로 일어섰다.
“올라갈게.”
“잠깐만.”
선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머리 복잡할 때는 운동이 최고야.”
“잔소리는. 올라가서 스트레칭 좀 할게.”
“1층에서 같이 운동하자.”
나는 놀랐다.
“출입금지잖아?”
“그런 표정으로 들어가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언제나 가끔 이라는 것은 있으니까.”
“…….”
“늘 오는 기회가 아니야. 이리 와.”
선우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질질 끌려갔다.
학교 체육관에 가면 운동 시설은 있었지만, 집에서 쇳덩어리를 들며 운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마음도 심란한데 선우의 잔소리가 반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고맙다.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나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안 일어나?”
“다했어. 난.”
“기껏 개방 타임을 가졌더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백화점 갈라버린 범인, 잡혔어?”
알면서도 묻다니, 나도 참 간사하다. 범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히어로협회의 입장이 궁금했다.
“등록된 히어로 중에서는 찾지 못했어. 히어로협회에서도 고민이야.”
“그래?”
“가능성이 여러 개가 있는데 히어로능력을 너무 크게 타고난 천재가 교육을 받지 않고 그 수준에 이르렀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얼굴은 공개됐어?”
“아무도 못 봤다고 하던데, 너 현장에 있었다고 했잖아. 뭔가 단서가 없어?”
“그림자만 봤어.”
“그래. 빨리 찾기는 해야 해. 그런데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는 싱긋 웃었다.
“이제 운동 다 했으니 바깥으로 나갈 것.”
“……너 진짜.”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바깥으로 나왔다. 부엌과 계단 사이에서 정리하는 선우를 보았다. 선우는 한동안 청소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더니 추방 명령을 받고 멀찍이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오늘 주말인데 약속 있어?”
“아니, 왜?”
나는 살짝 두근거리며 물었다.
“교외에 나갈래?”
“응.”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선우와 모처럼 나가는 거니까. 운동은 반갑지 않았지만, 산책은 좋을 것 같았다.
“좋아, 히어로카를 타고 가자.”
“너 히어로카도 받았어?”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의 히어로에게는 히어로바이크만 지급되고, 그것도 일반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히어로카가 있는 우리나라의 히어로는 10명 남짓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에 공로상으로 받았는데, 몇 번 안 타 봤어. 반쯤 자율주행이라 괜찮을 거야.”
“너무 화려한데.”
“산책할 곳은 안 화려하니까 괜찮아.”
“산책할 곳도 생각해놨어?”
“절에 가자. 고풍사라고 1시간 거리에 있어.”
“음…….”
“왜?”
생각에 잠긴 나에게 선우가 물었다.
“선우가 나한테 왜 이러나 싶어서.”
나는 솔직히 털어놨다. 조금 자극적인 말을 하자면, 뭘 잘못 먹었나 싶다. 가끔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기는 하지만 1년에 한 번꼴이라 여전히 익숙지 않다.
“모처럼 쉬는 날이니까.”
그는 차고에 가서 문을 열었다. 차고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두 대 이상이 들어갈 것 같은 넓은 크기의 차고였다. 자동으로 문이 올라가고 새하얀 히어로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개의 검은 반점이 있어 마치 젖소 같다.
나는 옆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선우가 다가왔다.
“열어줄게.”
선우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는 안으로 쏙 들어갔다. 좌석이 제법 넓다. 버튼이 몇 개씩 있었는데 감히 누르지를 못하겠다. 히어로카니까 아마 무기 같은 것도 있긴 있을 것이다. 선우가 곧 옆자리로 들어왔다. 시트 냄새가 훅 끼쳤다.
“아직 새 차 냄새가 나네.”
나는 중얼거렸다.
“보통 날아가니까 쓸 일이 없어.”
“그렇구나.”
나는 타도 되는지 모르겠단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부담 갖지 마. 언제든 타서 익숙해지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안 몬 거야.”
“그래.”
“출발한다.”
선우는 그런 것치고는 익숙하게 버튼을 눌렀다. 엔진소리가 들리며 히어로카는 앞으로 나갔다.
선우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이럴 땐 귤이라도 까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물 한 병도 못 챙겨왔다. 생각만 많아진다.
그나저나 선우는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다. 요즘 항상 차갑게 떨어져 있었고 기분도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운전하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이윽고 산 밑자락의 주차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