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22화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히어로가 부끄럽지도 않나 봐.”
두근거린다. 심각하게 뛰고 있다.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하다.
눈앞이 까맣다. 숨쉬기가 힘들다. 괴로워. 죽을 것 같아.
“소라야?”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앞이 잘 봐 지지 않는다. 심장을 쥐어뜯고 있었다. 희미하게 앞이 보인다. 이찬오빠다.
“잠깐 나갔다 들어오자.”
그는 빙그레 웃는다. 나는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강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뒤뜰 화단에 앉아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찬은 인스턴트커피를 뽑아왔다.
“이거라도 마시면 좀 나을 거야.”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체했어?”
“…….”
“자주 이랬어?”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가끔.”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정신적인 문제 아니야?”
“……!”
몸이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도 못 해본 문제였다.
“우리 엄마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너 보니까 괜히 생각이 그리로 가네. 그 정도는 아니겠지.”
이찬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상담은 받아볼 필요는 있겠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지나치게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다.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너무 괴로우니까.
“그래? 히어로들은 그런 거 질색하니까.”
“난 약한 히어로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이번 일도 해결했잖아. 무섭던걸.”
그와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9시가 지나갔다. 카드를 찍으면 어차피 지각이거나 결석일 것이고 교수님의 잔소리를 생각하면 들어가기가 무서워진다.
“늦었네요.”
“괜찮아. 괜찮아. 히어로는 실전이야.”
나는 뒤늦게 속이 메슥거렸다. 이찬이 등을 토닥여주며 외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땡땡이치자!”
“10분 있다 들어갈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너 범생이다?”
“어제 선우얼굴을 못 봤어요. 마치고 얘기 좀 하려고요.”
오는 것도 따로 오고, 어제는 말만 붙이려면 방에 들어가거나 외면해버렸다. 뭐에 틀어진 것인지. 어쩌면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런 것이다. 나쁜 녀석, 고맙다는 인사도 못 전했는데.
수업을 마치고 나는 선우에게 다가갔다. 선우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히어로학과를 오게 되니 정도는 덜했지만, 여전히 선우는 아이들의 영웅이었다.
다가가려니까 어쩐지 긴장이 된다.
어쩌면, 그동안 선우도 내게 다가오는 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거리낄 때도 있었는데 다가와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고등학교에서 선우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선우야.”
선우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다가 그제야 옆을 보았다. 나를 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이다.
“얘기 좀 해.”
“먼저 갈게. 얘들아.”
“그래. 내일 얘기하자.”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먼저 갈게! 소라야!”
바깥에 나서자 이찬이 요란스레 인사를 한다. 수선화가 부끄럽다는 듯 끌어당겼다. 당겨지면서도 이찬은 화려하게 손을 흔들었다. 선우는 살짝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인데? 갈 때는 각자 가기로 했는데.”
선우의 음성이 퉁명스럽다.
“고맙다는 인사를 못 했어.”
“뭐?”
“방독면.”
“…….”
선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듯하다. 하얀 얼굴에는 빨간 기가 더 티가 났다. 그는 이제 퉁명하다기보다는 살짝 삐진 듯이 물었다.
“너 아까 쓰러질 뻔한 거지?”
“아냐.”
“안색이 안 좋던데.”
“금방 좋아졌어. 걱정하지 마.”
“왜 걱정을 안 해야 하는 건데?”
“뭐?”
“왜 나를 부르지 않았지?”
“무슨 말이야?”
“왜 네가 안 좋은데 강이찬이 나가?”
“뭐? 뭐?”
“양호실도 안 데려갔을 거야. 그렇지?”
“하지만 최선을 다해줬어.”
“그게 최선이라고? 아니, 너랑 시시덕거린 것뿐이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어이가 없어 선우를 보았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을 호의를 곡해하거나 싫어한 적은 없었다.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선우는 멈추지 않고 다그쳤다.
“너랑 안 지 3개월도 안 되었는데, 뭘 믿고 그러는 거야?”
“그래도 위험을 함께 했어!”
“뭐라고……?”
선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렇게 빨간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네 맘대로 해.”
그는 짧게 말하고는 장미가 피어있는 화단이 있는 건물 뒤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정문과는 반대쪽이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혼자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쏟아져 나온다. 그중 아까의 아이도 있었다.
“여어, 도둑소녀! 도둑질하려고 서 있냐?”
이제는 나한테까지 말을 거는데, 그 말은 말이라기보다는 순 시비조였다. 나는 돌아서서 걸었다.
“무시한다. 저거. 크하핫!”
나는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나를 싫어하는 아이의 얼굴이나마 알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가는 길마다 막아섰다. 분명히 피해가려고 했는데, 대체 누구지? 또 이상한 시비가 걸리는 거야?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는데, 그때 커피 향이 솔솔 났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추정되는 제품을 들고 있는 카모스였다. 망토가 뒤로 나풀거렸다.
“찌질이…….”
그는 애틋하게 내게 말을 건넸다.
“넌! 왜 안 잡혀가고 여기에 있지?”
나는 바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난 내 손으로 블루헤드를 해치웠어.”
그는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에 이로운 외계인들은 히어로몬스터로 취직하기도 하고 허가 외계인으로 여기에 장사하거나 생업에 종사하며 살기도 하지. 나는 그런 허가 외계인이 된 것이다.”
“말도 안 돼! 넌 블루헤드의 수장 카모스라고!”
그는 훗,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카모스의 얼굴은 아무도 모르지. 난 가면을 쓰고 활동을 했거든.”
“나는 알아! 너라는 걸!”
“평범한 외계인을 모함하면 못 써. 아가씨.”
이 악당……!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나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