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21화
“그럴 수 없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카모스는 씨익 웃더니 내 앞에 섰다. 나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카모스가 내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두 손에 긴 장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포털을 향해 휘둘렀다. 힘은 크지 않아 몇 명의 블루헤드가 고꾸라졌지만, 끝없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왜, 왜, 우리 편에서 싸우려는 거지?”
“널 위해서가 아냐. 나는 지금 되돌아갈 수 없다.”
나는 얼른 화면을 전환했다. 블루헤드는 한 군단이 20명이다. 다섯 군단이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는 100명이 나올 것이다.
수면가루 위력D 속성: 풍
“제발 돼라!”
나는 외치고 버튼을 눌렀다.
“수면가루!”
포털에 대고 수면가루를 열심히 뿌리기 시작했다. 마력 덩어리라서 소용없다고 했는데, 통할까? 수 분 후, 통했다.
심지어 카모스까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안도했다. 이 세상에서 카모스와 이찬오빠와 셋이서만 남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일도 없었으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라야!”
이찬오빠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이제 시간 싸움이야. 협회로 가자.”
협회는 학교 안에 있었다. 나는 겨우 일어서서 걸었다. 아직은 걷는 게 더 편하다.
사람이 일어나야 협회에도 보고 할 수 있었다. 협회의 지붕 위로 올라가 이찬오빠와 나는 노을을 보았다.
“모두 잠든 시간에 우리 둘만 깨어있다.”
“그러게요. 무슨 악연인지.”
“야. 말을 그렇게 하냐. 그래도 오늘은 잘 막아냈다. 네 능력, 좋은 것 같아.”
“고마워요.”
이찬오빠는 항상 생각하지만 참 편안하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러나 문득, 이 좋은 노을을 선우와 함께 봤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의 일은 사실 선우의 힘이 컸던 것 같다. 내게 방독면을 주었으니까.
이찬은 옆에서 하하 웃었다.
“아직 슈트는 받지 못했지만, 나도 내 꿈을 이뤄가고 있는 것 같은걸!”
참 긍정적인 오빠다. 나도 옆에서 빙그레 웃었다. 보람된 일임에는 분명하다.
곧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히어로시계를 보았다. 블루헤드의 움직임은 없다. 우리의 승리였다.
며칠 뒤였다. 정문 앞, 대학신문이 나뒹굴고 있었다. 낙엽처럼.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내 얼굴이 신문에 박혀있다. 수선화는 신문을 주워들었다.
“호외요, 호외!”
신문부 다섯 명이 열심히 신문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중 안면을 튼 얼굴도 있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서리는 호쾌한 걸음으로 내게 나가와 악수를 청했다.
“선배.”
“고맙다는 인사를 할 필욘 없어. 되려 내가 고맙지.”
나는 살짝 그 밝은 기운에 기가 질렸다.
“훌륭한 히어로가 돼라. 자 여기 신문.”
황금주먹에게 공격을 퍼붓는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확대되어 있었다.
‘새로운 히어로! 수면 공격을 막다?’
신문의 활자도 큼지막하다. 1면이다.
“유명인이 됐네.”
선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자마자 신문을 구겨서 버린 수선화가 한마디 했다.
“이찬이는?”
“미술부에 입부 한다고 가던데.”
“그래?”
“양반은 못 되는군. 저기 온다.”
뭔가 한 줌 가득 싸 들고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산 아래의 미술부에서 히어로운동장까지 가로질러 오는 것 같다.
“왜 그렇게 급해?”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플라스틱병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으이그.”
수선화가 얼른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자 이찬은, 발을 세워 더 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안 돼. 이거 뭔지 모른다고. 만지지 마!”
“어떻게 된 거야?”
“그게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이 툭 튀어나오는 거야. 계속 그렸는데 계속 툭 튀어나와서 결국 못 그리고 나왔어.”
“무슨 말이야?”
수선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히어로슈트를 착용하고서 물었다. 안전하게 병을 옮기려는 준비였다.
“그러니까 이 플라스틱병이 그린 거라는 말이야?”
나는 물었다.
“그래!”
“새로운 능력일 수도 있겠어.”
“오오!”
“먼저 보고하러 가볼게!”
“그래!”
나는 학교 옆에 바로 붙어있는 히어로협회로 날아갔다. 바닥에 착지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넓고 휑한 공간이 나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2. 3학년 선배들이 쉬고 있었다. 그중에는 신문을 보고 있는 선배도 있었는데 나와 신문을 아래위로 살폈다.
“너, 누구냐? 히어로명이 뭐야?”
“이름은 아직 없는데, 데이터 분석을 해주셨으면 해서요.”
“신문에 나와 있는 애 아니야?”
“건방지네. 학교에서 비상시도 아닌데 슈트를 입어?”
“선배가 종이냐? 유명해졌다고 유세하냐? 턱 데이터 주면 해주디?”
그들은 내게 점점 다가왔고 나는 문을 뒤에 두고 점점 구석으로 몰렸다. 문을 열고 나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라 아니냐?”
황금주먹 선배였다.
“무슨 일이야?”
“이찬이가 능력이 생긴 것 같아서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튀어나왔대요. 위험물질일 수 있어서 슈트를 입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선배들은 뒤에서 수군덕거리며 쏘아본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과는 하루는 걸린다. 가 봐.”
“네.”
나는 돌아 나왔다. 밖에는 어느새 수선화와 이찬 오빠가 서 있었다.
“분석해준대?”
“응.”
“야호!”
이찬 오빠는 제자리에서 1미터는 뛰어올랐다. 오빠에겐 꿈이니까, 잘 됐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수군거림이 지워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학과생들이 모두 들어야만 하는 필수교양으로 히어로의 역사와 능력의 기원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오늘 9시는 히어로의 역사를 들을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뛰어다녔더니 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것이 탈이었다.
아이들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감탄하는 친구도 있었고 비웃는 친구도 있었다.
“야. 완전 빽 없는 인간은 서러워서 살겠나. 슈트도 맨 처음 받고 말이야.”
“조용히 말해. 듣겠다.”
“짜증난다.”
좋게 봐주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 나의 초점은 그리로 가서 꽂혀버리는 걸까. 정말 좋지 않은 성격이다. 특혜를 받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냥 쟨 임무 수행하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