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15화
“신경 쓸 거 없어.”
“신경 쓸 거 많아.”
선우는 흘낏 내 쪽을 보았다. 눈빛이 강하다.
“또 올 거라고.”
“그렇겠지.”
“물리칠 수 없었어?”
“…….”
나는 말을 잃었다.
“적 사정을 생각하면 안 돼. 왜 이렇게 여리냐? 센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센 척 한 적 없어. 긴장해서 언 거지.”
“카모스를 보고 얼었다고?”
“그건 아니지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카모스도 생각보다 우리나라 말을 잘했고,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유혹했다며.”
“뿔을 되찾으려면 내가 뽀뽀를 해줘야 한대.”
나는 순화해서 말했다. 선우는 무섭도록 나를 보았다.
“안 돼.”
“응 안 할 거야. 절대. 싫다고.”
“왜 살려두는 거야?”
“그쪽이 공격적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카모스 말에 의하면 힘으로는 카모스의 뿔을 자를 수가 없대. 그래서 얘기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를 유혹해서 뿔을 되찾아올 거라나? 그런 거겠지.”
“정말 태연하다. 카모스를 얕보는 거 아냐? 그놈은 항상 혼자 나타나서 지지 않았어.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그 부하들도 어마어마하다고. 놈을 없애는 건 빠를수록 좋아.”
“부하들은 얘기를 더 들어 봐야 하겠더라. 어쨌든 정보의 통로이기도 하잖아. 블루헤드가 철수해도 또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놈은 어디에 있지?”
“그건 몰라.”
“소라야.”
선우는 휙 돌아섰다. 마트가 어느새 앞이었다.
“너는 왜!”
선우의 큰소리는 오랜만에 듣는다. 그러나 큰소리는 한 번 터졌다가 다시 절제되었다.
“양파나 사자. 너, 나랑 사는 거 싫어? 확실하게 말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안 되는 거잖아?”
“싫지는 않다는 거지? 분명히 말했다. 싫지 않다고.”
나는 불안해져 왔다. 나는 회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양파가 가득 담긴 망을 쥐고 우리는 올 때보다는 훨씬 말이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선우가 양파망을 열며 물을 끓이고 있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저씨.”
“왜 그러냐.”
“소라, 우리 집에서 살게 할게요.”
“웬일로 마음이 바뀌었어? 나야 고맙다만.”
“특훈해야겠어요.”
선우가 다부지게 말했다.
“언제가 좋겠냐?”
“당장도 괜찮아요.”
“뭐? 내 의견은?”
내가 황당해서 되묻자 스텔라맨은 지그시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싫지 않댔잖아.”
“뭐, 뭐, 갑작스럽고, 또 난 알아서 독립해서 살 거고!”
“혼자는 안 돼.”
“나도 혼자는 반대야.”
스텔라맨의 말에 아빠가 얄밉게 덧붙였다.
“남자랑 같이 사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는 버럭 고함질렀다. 이 사람들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선우는 믿을만해. 그치?”
아빠는 선우를 보았다.
“…….”
선우의 표정은 굳어있다. 그는 화제를 돌려버렸다.
“나도 좋아서 같이 사는 거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위험해. 그리고 특훈시켜줄게.”
“으윽.”
“너도 뒤처지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따라와.”
“시간을 좀 줘.”
“일주일 줄게.”
“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저 빡빡한 놈.
“길게 준 거야.”
단호하게 못을 박는다.
선우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가슴팍이 답답해져 왔다. 이런 식으로 더불어 산다는 건 나는 정말로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 건가? 그보다 학교에 소문이 나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밉살맞게 보는 애들이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빠는 왜 학교에 와서는. 나는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현관문 앞에서 발에다 신발을 끼워 넣었다.
“어디 가냐?”
“산책이요.”
“하지 마. 늦잖아.”
“답답하단 말예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걱정하지 않던 아빠였는데. 나는 그 말을 들을까 하다가 그래도 역시 속이 답답하다.
“휴, 위험하니까 히어로시계 꼭 들고 가라. 뽀삐 데려가.”
“30분만 걷다 올 거니까 걱정 마요.”
나는 결국 밤거리를 나섰다. 밤이라 봤자 아직 9시라 불이 켜진 곳은 많았다. 요즘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줄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도 많았고, 아빠도 걱정도 팔자라니까. 그래도 내 어깨에는 소형화된 뽀삐가 둥둥 떠 있다.
번화가 쪽으로 걸었다. 그때마다 눈에 띄던 색감이 화려한 카페 하나에 눈이 갔다. 저렇게 작은데도 24시간 영업을 한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통유리로 된 창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저기 에스프레소를 내려 몰래 커피를 마시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그 아르바이트생은 분명, 카모스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 닮은 사람일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문을 보고 내어 뱉었다.
“손님. 어서 와라.”
아, 저건 카모스다.
손님이 왔는데도 에스프레소를 태연하게 쭉 마시며 냉정한 눈빛으로 여기를 보고 있다. 그러나 나를 인식하자, 그 차가운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뽀삐가 으르렁거리자, 나는 뽀삐를 박스 안에 넣었다. 간이박스는 몬스터들을 소형화해서 이동식 집처럼 쓰고 있었다.
“찌질이.”
“카모스! 왜 여기 있어?”
“나를 찾아왔나?”
내 말은 안 듣는구나. 분명히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런 식으로 장사해도 돼?”
“세상 좁더군. 갈 곳이 없어서 그때 히어로들과 마신 커피점에서 재워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여기를 소개해줬는데 마침 블랙몬스터가 운영하던 곳이더군. 황송해하며 나를 취직 시켜줬다.”
그 정도로 몬스터가 인간 세상에 살고 있단 말이야? 물론 종종 몬스터가 일하는 현장을 보기는 했지만 내 근처에 있을 줄은 몰랐다. 블랙몬스터라면 블루헤드소속의 몬스터다.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은 스파이라는 소리다.
나는 히어로시계에 있는 신고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그 사이 카모스가 내 시계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