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13화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가고 있었다. 선배들이 수강 신청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해서 모이기로 한 날이다. 학교는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지금 출발하면 시간은 느긋하다. 나는 이미 히어로시계가 있지만 히어로시계도 준다고 하니, 아마 대부분 모이지 않을까 싶었다. 히어로 시계는 민간인도 찰 수는 있지만 히어로 잠재력테스트를 받아야만 했고 시계도 특수기관에서 만든 것이어서 많지는 않았다.
아빠가 히어로바이크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그냥 버스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귀찮기도 하고 튀고 싶지도 않았다. 아빠는 왜 그렇게 용기가 없냐고 면박을 줬지만 히어로바이크라도 바이크는 위험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하여튼 그냥 넘겼다.
그런데 오늘 버스 안에서는 나를 보고 아는 척 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누나! 스텔라맨하고 같이 다니죠!”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꼬마다.
“그래. 안녕.”
“싸가지 없단 소리 많이 들었는데, 안 그러네요!”
“…….”
솔직히 약간 충격받았다. 내 소문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꼬마까지 그럴 줄이야.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싱긋 웃고 그 애를 외면했다.
“싸가지 없는 거 맞나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 애는 해맑게 말하고는 다른 자리로 갔다. 그 말이 마치 송곳 같다. 아, 나 히어로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그런데 점점 긴장된다. 히어로바이크를 탈 걸 그랬나.
버스에서 내리자 학교의 대문이 코 앞이었다. 거대한 H모양의 입구가 조형물처럼 놓여있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학교 앞 피시방이다.
버스에 내려서부터 나는 기묘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도 히어로지망생, 아니 이제 능력이 개화했으니까 히어로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낌새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누구지. 나를 따라올만한 사람이.
몬스터인가. 포탈이 열리면 경계령 정도는 내릴 텐데, 블루헤드 측 몬스터도 다 처리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요즘은 유입된 몬스터가 길거리를 다니기도 한다. 그 중에 지능이 높은 몬스터는 사람과 대화하기도 했고 히어로를 따라다닐 수도 있다. 히어로몬스터가 되어서 유명해지고 싶은 몬스터나 애완동물로 삼아달라는 몬스터도 드물게 있긴 했으니까.
대처 방법은 간단하다. 나는 각진 건물 사이로 이리저리 내달렸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상쩍은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었고 인간이었으며 마른 느낌이었지만 키가 몹시 커서 그런지 덩치가 큰 것처럼 보였다.
‘내버려 둘까.’
나는 형체만 기억해두고 피시방으로 걸어갔다.
피시방 앞에 섰을 때, 여러 히어로지망생들이 이미 안에 와글와글 앉아있었다. 각자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고 한 줄로 앉아있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앉자 익숙한 얼굴이 옆에 있었다. 이찬오빠가 씨익 웃으며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때 나를 보호해줬던 여자애.
히어로학과는 아무래도 과 특성상 80%가 남자라 여자애들은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여자들은 다 같은 수업을 듣기로 했어.”
그 애가 내게 말했다. 여건상 그러지 못했지만 묻혀 사는 것을 편해하는 나는 그냥 따라갔다. 하라는 대로 하니까 편했다. 사실 어떤 수업을 들어야 좋은지도 잘 모르겠다.
“자, 코드 다 받아적었지? 9시 되면 시작이야. 빨리해야 해!”
컴퓨터에 코드를 넣고 재빨리 엔터를 쳐야 했다.
나는 재빨리 코드를 넣었다. 계속 순조롭게 등록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여석이 없습니다
“아, 이런.”
“하나 정도는 괜찮아.”
이찬이 말했다. 어느새 그는 다 입력한 모양이다.
“아이씨!”
와다다다다. 옆에 큰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 여자애가 부서져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나 빼고 다 실패했잖아!”
여자애가 성질을 부린다. 이찬이 하하 웃는다. 선배들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필수교양은 교수님한테 부탁해봐.”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잔뜩 웅크렸다. 나는 그 격렬함에 난처한 듯 웃고 말았다. 밖에 나갈 때 이찬과 여자애가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네왔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지 않을래?”
“응. 그래.”
이찬을 보면 자꾸 경어를 쓰려고 한다. 나는 어쩐지 상쾌한 기분이 되어 피시방으로 나왔는데, 피시방을 나오자마자 굳어버렸다. 모자를 쓴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미행하던 인물이 틀림없다. 그가 모자를 약간 들어 올리자, 나는 더욱 굳어버렸다.
……카모스!
이찬은 카모스를 보고 싱글싱글 웃는다. 나는 카모스와 우리 일행 쪽을 가로막았다. 그러고 보니 카모스의 얼굴을 아는 건, 나와 히어로들밖에 없다.
히어로지망생인 이찬과 여자애는 카모스의 얼굴을 모른다.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 날 공격하지 않고 따라온 것일까. 뿔이 없으면 힘이 점점 약해진다고 했으니까 기회를 엿본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군. 오랜만이다.”
“아는 사이?”
이찬이 뒤에서 말해왔다.
“왜 이 사이를 막는 거야?”
여자애의 목소리도 들린다.
“사이를 막는 게 아니다.”
카모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카모스는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내 팔을 조금 내렸다.
“나는 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내 뿔을 돌려줘야지.”
“뿔?”
이찬이 되묻는다. 히어로활동은 협회에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힘을 쓸까 말까 망설였다. 힘을 써도 히어로슈트도 없고 힘을 쓰는 방법도 모른다. 망설이는 사이에 카모스는 점점 다가와 이찬과 여자애와 악수를 했다.
“반가워. 나는 이 찌질이의 빚쟁이다.”
“아 그래. 반가워.”
저 속없는 오빠는……. 하지만 대화는 해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블루헤드를 알 수 있고 그들을 돌려보낼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잖아. 나는 용기를 내어 카모스를 쳐다보았다.
“커피 한 잔 어때? 감모손.”
“그래, 너도 신입생인 것 같은데.”
이찬이 맞장구쳤다. 카모스의 눈빛이 사나워진다.
“감모손?”
“네 이름이잖아. 감모손.”
나는 뻔뻔스레 카모스를 보았다. 눈치 없이 카모스라고 하면 합심해서 잡아넣을 생각이었다.
“커피가 뭐지?”
“엥? 커피가 뭔지 몰라?”
이찬오빠가 묻는다.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농담이겠지. 얘가 농담을 좋아해서. 일단 나와 얘기하고 싶은 거지? 가자.”
“우리랑 커피는?”
이찬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카모스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대답했다.
“같이 가지. 상관없다. 히어로가 몇 명이든.”
분명히 몇 주 전만 해도 이 말은 허세가 아니라 실력이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허세로 느껴진다. 포탈은 왜 열지 않고 여기로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