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맑음 10화
“나 목성에, 목성에, 뭐였더라.”
그는 혼자 말을 걸더니 혼자 멀뚱히 생각에 잠긴다.
“다시 보고 와요.”
“그래야겠다.”
나는 걸어가는 이찬을 보았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완전 허당이다.
신입생들의 적성검사가 끝나자 수련원의 각 방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최대한 아빠와는 멀리 떨어지려고 했지만 내가 다른 방에 가 있자 아빠가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 왔다.
“여어!”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다!”
“저 어릴 때 선배님 프로그램에 나오는 거 봤어요.”
아이들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아빠의 뒤에서 이찬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아빠에게 병을 하나 내밀었다.
“헛개수 한 병 드십시오. 선배님.”
“아, 이 친구 마음에 드는걸!”
이찬과 아빠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설마 아는 척하시지는 않겠지. 나는 딴청을 피우며 누군가 따라놓은 소주를 들이켰다.
“소라야. 지금 혼자 술 마시는 거냐?”
눈치 없는 아빠가 결국 아는 척을 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놀란 눈을 하며 우리를 보았다. 이번, 학교도, 망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술을 끝까지 들이키고 말았다.
“이 녀석이!”
“아는 사이세요?”
누군가가 조심스레 묻는다.
“아 딸이야. 예전에 같이 방송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그 소라가 그 소라?”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때 적성 테스트할 때 불꽃이 많이 올라오더라!”
“우리 엄마가 팬이었어요!”
그런 다양한 찬사가 쏟아질 때쯤,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건 좀 혜택을 받은 거 아닌가요? 비리까지는 아니겠지만, 불공평해.”
침묵이 이어졌다. 아빠는 하하 웃으며 종이컵을 들었다.
“술이나 한잔하자.”
나는 조금 울컥했다. 대학교 생활은 좀 편안하게 하고 싶었는데, 히어로학과를 온 것부터가 멍청한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내가 잘하고 할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래서는 고등학교의 연장선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몇 잔 마시지도 않고 알딸딸해지자 컵을 내려놓았다. 취하는 것은 처음이라, 좀 무섭다. 사람들은 이미 취한 사람들도 있고 특히 이찬은 재롱을 피운다고 벌칙으로 춤까지 추고 있다. 게임은 계속되고 있고, 나는 눈치를 보아 일어섰다.
“어디가?”
아까 불공평하지 않으냐고 했던 여자아이. 새침하다.
“화장실 가려고.”
더 묻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마법진을 지나쳐 완벽히 바깥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친다. 알딸딸한 기운은 빠지질 않았다.
여기서도 구설수에 올라야 한다니, 나는 체질이 도무지 영웅체질은 아닌 것 같은데. 엄마와 아빠가 다 히어로였는데, 나는 왜 히어로가 아닌 걸까.
“소라야.”
별을 보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아빠가 서 있다.
“별이 참 예쁘지?”
“그냥 사람들하고 계시지…….”
“걔들도 걔들끼리 친해질 시간도 있어야 하고, 뭐 내가 별로 중요하진 않아. 친목이고 정보만 좀 알려줄 뿐이고 그런 거지.”
나도 불편한데.
“아빠가 오면 불편해요.”
“언젠가부터 네가 기죽어있더라. 기죽을 게 전혀 없는데.”
나는 멍하니 별을 보았다. 별로 할 말이 없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 뭐냐?”
“몰라요. 숨쉬기랑 먹는 거.”
“네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아빠와 진지한 이야기는 처음인가? 나는 아빠를 보았다.
“줄곧 무언으로 강요한 거 아닌가 싶었어. 하지만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한 거야.”
“그래서 해영 아줌마랑 안 있고 여기 오신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었다.
“뭐, 걱정돼서.”
아빠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아빠 옆에서 공간이 비틀리듯 갈라지더니 검은 소용돌이가 용솟음쳤다. 왜 하필 여기서, 이때? 나는 포탈이 열린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포탈 옆에 종이컵을 들고 온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포탈을 보지 못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 있었네.”
여기에 왜 또 이찬 오빠가 나타난 거지. 검은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더니 천진한 표정의 이찬 오빠 옆으로 뿔이 두 개 달린 카모스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불행 중 다행으로 카모스를 따라 나오는 몬스터는 없다.
“여기 있었구나. 찌질이.”
“피해요!”
나는 몸을 날렸다. 카모스가 한 손으로 나를 붙잡는다.
“여기 있었어…….”
카모스는 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한껏 눈을 맞추었다. 저 붉은 눈동자가 소름 끼칠 정도로 투명했다.
“놔!”
“내가 널 놔줄 리 없지.”
카모스는 소름 끼치는 입꼬리를 올렸다.
“미친놈!”
“크하하!”
이 녀석은 미친놈이라고 하기만 하면 발작적으로 웃는다. 그 틈을 타 아빠가 카멜레온맨으로 변신해 카모스를 밀쳐냈다. 보통의 힘이라면 카모스를 밀쳐내지 못했겠지만, 아빠의 모양새는 벌써 카모스와 똑같이 되어있었다. 아마도 힘도 카모스와 같을 것이다.
나는 히어로시계를 열어 빔을 쏘았지만 카모스에게는 따끔한 정도인 것 같다.
나는 다급히 아빠를 보았다.
“전수해주세요. 죽기 전에.”
“이찬아. 파이어레드맨과 아이스맨을 불러와.”
아빠는 결단한 듯 결의에 찬 눈으로 이찬 오빠에게 지시하고 내게 히어로 시계를 대었다.
“깨우는 거라, 잘 통제해라. 지금 히어로슈트도 없으니까.”
“알았어요.”
갑작스럽게 몸에 기가 돌았다. 아빠는 침으로 피 한 방울을 내더니 내가 차고 있는 히어로시계에 떨어뜨렸다.
“다행히 우리는 속성이 같아서, 괜찮을 거야.”
근육이 팽창하는 느낌이 들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나는 바닥에 앉아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찌질이 놀이 중인가?”
카모스가 내게 다가오자 아빠가 막아섰다.
“찌질한 능력 두 번째, 카멜레온이랬던가?”
“카멜레온맨이다.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이젠 안 봐준다.”
거대한 암흑 오라가 생겼다. 블랙홀같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나뭇잎이 녹아 들어가고 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카멜레온맨, 당신은 필요 없어.”
카모스는 모처럼 예의 바르게 말하며 그 구덩이를 그대로 아빠에게 날렸다.
“안 돼!”
나는 아빠 앞을 막아섰다. 죽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죽는 것이 낫다. 아빠는 히어로고 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히어로시계에서 뻗어 나간 막이 와장창 깨진다. 그리고 내 몸도 이제 직격이다. 거대한 통증.
……이제 죽은 건가?
나는 눈을 떴다.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련원 앞뜰이었다. 나무는 수 그루가 꺾여 있었다.
“아이를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아이스맨의 목소리.
“지옥에 떨어져라!”
파이어레드맨의 목소리.
역시 난 죽은 건가?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눈앞은 너무 푸르르고, 풀 내음이 싱그럽고 별이 아름다웠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섰다.